나만의 지하철 (9)
{지난 편까지의 이야기}
마음이 어두워질 때면 나만 탈 수 있는 상상의 지하철에 올라
한 칸 한 칸 거닐며 가고 싶었던 곳으로 가요.
바닷속 같은 어느 칸에서 나는 오랜만에 일하러 바깥 세상으로 나섰다가
곧 돌아오고 말았던 안타까운 시간을 떠올리며 충분히 애썼다고 나를 다독여요.
여전히 나는 깊고 넓은 물속으로 나아가기를 꿈꿔요.
마치 이 마법 열차 안의 바닷속 작업실 같은 곳으로요.
이 칸을 거닐 때 원피스 자락이
기다란 꼬리지느러미처럼
바다의 꽃 수지맨드라미처럼 살랑거려요.
물속의 자유는 놀랍고도 신비해요.
껍데기를 자주 옮겨 다니며 자기에게 꼭 맞는 자리를 찾는 소라게도 비난의 대상은 아니에요.
이미 단단한 집을 찾은 바다거북은 자기 속도에 맞춰 살아가요.
모래 속에 굴을 파거나 바위틈에 자리를 잡고 숨은 듯 살아가는 이들도 자기만의 작업을 열심히 하는 중인 걸요.
커다란 숲 같은 군락을 이룬 이들에게도 알록달록한 아름다움이 있어요.
바위틈 어딘가에 나의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보헤미안 감성을 지닌 나의 작업실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해요.
이 마법 열차 천장에는 알전구 레일 조명이 있어서, 원하는 곳만 비출 수 있어요.
먼지 나는 부직포와 플라스틱 틀 대신 은은한 스테인드글라스나 불투명 유리를 넣은 나무 틀로 살짝 기둥을 세워 구석진 자리를 만들어도 좋고,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 아늑한 자리를 잡아도 좋아요.
그러면 나는 그 자리에 나를 가득 채워요.
벽에는 선반을 달고, 바닥에는 양탄자를 깔고, 창가 쪽에는 기대어 쉴 수 있는 암체어도 놓을 거예요.
초록색 식물이 심긴 화분이 곳곳에 놓인 널찍한 나무 책상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거나 얼음이 달그락 소리를 내는 카페라떼가 올려져 있어요.
중앙에 놓인 테이블에는 등 모양이 동그랗고 네모난 원목 의자, 라탄 의자, 패브릭 의자 등이 다양하게 놓여 있어요.
거기서 커피 한 잔이나 매일 기대감으로 열어보는 도시락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눌 동료도 너무 멀지 않은 자리에서 자기만의 작업을 즐겁게 하고 있어요.
그녀의 책상에는 그녀다운 것이 가득해요. 책을 잔뜩 쌓아놓은 그녀, 재봉틀을 돌리는 그녀, 뜨개질을 하는 그녀, 그림을 그리는 그녀, 누군가에게 필요한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그녀, 수많은 질문에 답하며 자기에게도 꼭 필요한 답을 찾는 그녀.
우리는 그곳에서 사랑과 존중을 받으며 성실한 순간을 이어가요.
한쪽 벽에 기댄 허리 정도의 진열장 위에는 커피머신과 카페에 걸려 있을 법한 그림 한 점과 토분에 담긴 초록 식물이 올려져 있고, 그 위의 벽 선반에는 그녀와 나의 취향이 묻어나는 컵들이 깨끗하게 씻겨져 올려져 있어요.
아날로그 라디오처럼 생긴 스피커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와요.
오전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오후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도 좋아요.
나는 이제 활자화된 글자가 아니면 노래의 가사를 알아차릴 수 없으니, 음악은 정말이지 작업실의 배경음악인 셈이에요.
많은 소리가 내 귀에서는 소음 아니면 모호한 아지랑이 같은 음악의 범주로 크게 나뉘었다가 금세 흩어져버리지만, 오히려 가질 수 없는 그 소리를 갖가지 종이 상자에 담아낼 수 있으니, 나는 이곳에서는 숨은 장인 같은 사람이 돼요.
기억과 상상의 다락 높고 널따란 찬장에서 온갖 소리를 찾아올 수 있으니, 더는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해요.
마찬가지로 그녀도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아픔의 구멍이 있더라도 우리의 작업실에서는 기쁨을 덧댈 수 있기를 바라네요.
나는 이 마법 열차 나만의 작업실에서 알 수 없는 미래를 열심히 살아가요.
유명하든 무명이든 나예요. 내가 맞아요.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할 수 없는 것도 있는 나예요.
나는 여기서 뭐든 시작하고, 기억의 다락을 나만의 것으로 채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