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집

나만의 지하철 (10)

by 새초록

{지난 편까지의 이야기}

마음이 어두울 때면 나만의 지하철을 타는 상상을 하곤 해요.

한 칸 한 칸 거닐며 여행하다가 이제...







기다리는 집





이제 마법 열차는 어둑해진 도시의 거리를 달려요.

창밖으로 금빛 은빛 조명이 켜져서 골목 어귀를 밝혀요.

하늘의 별들이 벚꽃처럼 거리에 내려앉아 반짝여요.

누군가의 귀환을 축하하며 흩날린 빛나는 금종이 같아요.


나는 그곳을 얼마나 자주 상상하고 얼마나 깊게 사랑하는지 몰라요.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다음 칸의 문을 열 때, 환한 빛이 쏟아져요.

눈이 부셔서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펼쳐지는 풍경은 늘 새롭고도 또 낯익어요.


그곳은 낡은 한옥의 툇마루에서 이어진 대청마루 같기도 하고, 유럽 시골집의 꽃무늬 가득하고 아늑한 거실 같기도 하고, 금빛 거리 코너에 자리 잡고 몇 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골동품 상점 같기도 해요.


하나이면서 여럿인 그 칸의 한쪽 테이블에는 아직 따뜻한 허브차나 국화차가 담긴 찻잔이 놓여 있어요.

누군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고, 나는 생각해요.


어쩌면 나는 오래전에 이곳을 떠났다가 오늘에서야 돌아왔는지 모르겠네요.

기다리는 편에서는, 하루가 천 년같이 더디게 갔을 수도 있겠지만, 만약 할머니의 할머니처럼 오랜 세월을 살아가고 있는 누군가라면 오히려 백 년이 하루처럼 짧았을지도 모르겠네요.


기다란 창문 위쪽으로는 보자기 조각을 잇댄 가리개나 흰색 레이스 커튼이 걸려 있고, 아래쪽으로는 튼튼한 나무를 잘라 만든 가로 선반에 유리병들이 놓여 있어요.



유리병 안에는 집주인이 잃어버릴 수 없어 간직해놓은 꽃들이 가득하죠.

봄의 민들레꽃과 여름의 블루베리와 가을의 생강, 대추와 겨울의 건조된 귤껍질과 단밤 조림처럼, 아련하고 알싸하다가 이제는 아름답게 변한 것들이 담긴 그 매끈한 유리병을,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보다가 손을 뻗어 손가락 끝으로 만져보아요.

그것들은 자연의 열매를 닮았지만 더욱 연약하고 투명한 알맹이 … 그분께는 차마 모을 수밖에 없었던 나의 눈물이죠.










유년 시절에 너무 일찍 철든 모습으로 엄마와 동생들을 피해 혼자 거리를 걸으며 훌쩍훌쩍 떨어뜨렸던 눈물 방울방울과, 뜨거운 여름에 시커멓게 타들어 갔던 청춘의 눈물과, 때 이른 서리에 베갯잇을 적시며 꿈속의 기도에서도 흘렸던 모든 눈물을 누군가는 알고 있었군요.

누군가는 물거품처럼 부질없는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소중하게 모으고 간직했군요.

그 눈물에 녹아난 말 없는 슬픔과 가슴 치는 후회와 깊은 회개의 언어를 나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흐르는 대로 버릴 수도, 잊을 수도 없었군요.





눈물 골짜기를 지나가는 때도 있었어요.

밤마다 남모르는 눈물로 나의 침상이 떠오르면, 때로는 악몽의 협곡을 따라 원치 않는 여행을 떠나기도 했어요.

위태하고 외로운 내 영혼의 조각배는 불어난 폭포에 휩쓸려 그대로 부서질 것만 같았는데, 정말 포기밖에 길이 없다고 놓아버리려는 순간이면 피할 만한 새로운 물길이 잠잠히 열리곤 했지요.


누군가 길을 내주는 것이라고 온몸으로 느낄 때면,

그렇게 일어선 줄 알았다가 다시 넘어지기를 반복하는 삶에 지쳐 또다시 또르르 눈물 흐를 때면,





어느새 나는 이곳, 고향집 같기도 하고 시골집 같기도 하고 가치를 알아보는 눈에만 진귀한 것이 가득한 골동품 상점 같기도 한 이곳에 발을 들여놓고 있어요.

늘 오면서도, 한 번도 가지 못한 곳, 나의 눈물 병이 모인 이곳에.





벅찬 마음으로 걸음을 옮겨요.

마법 열차의 기다랗고 기다란 창문을 따라 나의 눈물 병들이 길게 길게 이어져요.


알지 못하는 슬픔은 없었군요.

헤아리지 못하는 고통은 없었군요.

그 진실이 오늘도 내 영혼의 조각배를 흔들리지 않게 붙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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