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생각난다.
어릴 적에 우린 서로의 집을 오가며 엄청 친했다. 그땐 그 친구 집이 우리 집 보다 잘 살았던 것 같다. 친구 엄마가 횟집을 하셨다. 내가 그 친구집에 간 기억이 더 많다.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는지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중학교 때 우리는 엄청 친했다. 친구를 S라고 칭하겠다. S의 집에는 불당이 있었다. 엄마가 모신다고 했었다. 엄마의 종교가 불교인걸 S는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 부끄러워하던 걸 보여준 친구가 나 말고 많지 않았다고 했었다. 친한 만큼 다투기도 많이 했다. 내가 다른 친구랑 좀 더 친하게 지내면 며칠 동안 말도 안 하고 삐져 있었다. 그러다 혼자 또 풀어져서 나에게 오곤 했었다. 고등학교를 가고 우리는 중학교 때보다는 멀어졌다. 그 정확한 이유도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나는 대전으로 대학을 갔고, 우리 집도 대전으로 이사를 했다. 자연스럽게 S와 나는 멀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연락이 왔다. 내 번호를 다른 친구한테 물어봤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으니, 스무 살 초반 때였다. 서로 나빠서 멀어진 게 아니었던 차라
반갑게 인사하고 우리는 대전에서 만났다.
S는 자기도 대전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직장을 대전에서 다니고 있고, 남자친구도 만나고 있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나 조금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S는 교회를 다니고 있고, 교회 오빠를 만나고 있다고 했다. 나를 자기가 다니고 있는 교회로 초대했다.
전도를 위한 연락이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것 같다.
몇 번 교회를 가긴 했지만,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 가끔 보면 상대의 생각이나 기분을 잘 들어주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른이 된 S의 느낌이 그랬다.
교회 가기를 피하자 S는 또 자연스럽게 연락이 소홀해졌고 멀어졌다.
그 후로 몇 년 뒤 스물여덟에 나는 결혼을 해서 남편 회사 사택으로 갔다. 충남 아산이다.
아이를 하나, 둘 낳고, 낯선 곳에서 살면서 결혼생활과 낯선 육아를 나름 열심히 했다. 연년생 두 아이를 키우며 매일 반복되는 하루하루에 지치고 힘든 시간이 많았다. 사회로 나가고 싶었다. 어떤 조직의 일원이 되어 나에게 주어지는 일을 해내고 그렇게 살고 싶었다. 아이들 조금만 더 키우고 하라고 조언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육아만 하는 나의 일상의 시계는 너무 늦게 가는 것 같았고 지루하기 시작했다.
그 지루함이 우울감으로 바뀌려고 할 때쯤, 사원아파트에서 만난 친구를 통해 영업조직에 들어가게 되었다. 남편은 네가 어떻게 영업을 하냐고, 분명 3개월쯤 하면 울고 돌아올 거라고 했다.
남편의 생각과는 다르게 놀라운 성과를 내며 입사 3개월 만에 달성한 실적으로 베트남 하롱베이를 갈 수 있게 되었다. 내 돈 하나 들이지 않고 온전히 회사에서 지원해서 가는 여행이었다. 신기했다. 영업이 처음이었던 나는 이렇게 내가 하는 만큼 성과를 내고 돈을 버는 이런 일이 신기하게 재미있었다.
그런데 베트남 여행을 가려고 준비하던 중, 셋째가 임신이 된 걸 알았다. 4살 3살 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일을 다니다가 셋째 임신이라니, 하지만 남편이 원했던 일이었고, 출산을 결심했다.
임신초기 베트남 여행을 잘 다녀왔고 그 후로도 계속 일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되는 좋은 실적으로 셋째 아이 만삭일 때 팀장 교육을 가게 되었다. 팀장이 되고 출산을 했다.
셋째를 출산하기 한 달 전에 친정집인 대전으로 미리 갔다. 첫째, 둘째 출산했던 병원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쯤 S한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어디서 내 소식을 들었는지, 셋째를 출산하기 위해 대전에 와 있다는 걸 듣고 연락이 왔다.
너무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자기도 셋째를 출산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했다. 심지어 우리는 예정일이 같았다. 어째 이런 일이, 거기다 예약해 둔 산후조리원이 같은 곳이었다. 너무 놀라운 소식으로 우린 다시 서로 가까워지는 듯했다.
같은 날 각자 다른 병원에서 S는 오전에 나는 밤늦게 셋째를 출산했다. 그리고 3일 후 산후조리원에서 만났다.
나는 아들, S는 딸을 낳았다. S는 첫째, 둘째를 아들을 낳고 셋째 딸을 낳게 되었다. 나는 첫째는 딸이고, 둘째 셋째는 아들이다.
조리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같이 보냈다. 니 아기, 내 아기, 하면서 신생아실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수다도 떨고, 식사시간, 간식시간 만나서 재미있게 이야기도 나누며, 우울하지 않은 산후조리원시간을 보내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아기가 100일쯤 되었을 때, 고민을 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하고 있던 영업조직에서 나의 복귀를 기다렸다. 팀장 교육을 받고 팀장으로서 나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편과 상의했다. 만약 네가 하는 일이 간호사나 선생님처럼 전문직이었으면 복귀가 당연한 거지. 그러니 지금의 너의 일이 너한테 중요하면 복귀하라고 힘을 줬다. 고마웠다. 하지만 100일 된 아가를 가정보육어린이집에 맡기도 출근하던 첫날 엄청 울었다. "아가 엄마가 오늘만 울 거야" 그리고 내 일에 최선을 다했다.
영업은 나처럼 아이가 많은 엄마에게 참 좋은 직업이었다. 시간을 조절해서 쓸 수 있고 출근, 퇴근의 정해진 시간이 없기 때문에 시간관리만 잘하면 성과를 내는 것에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돈 보다도 중요한 나의 가치는 나에게 일이 있다는 그 자체였다. 하루하루 아가에게도 충실하고 아가들을 맡기고 일할 때는 일터에서 집중했다.
늘 일과 가정 둘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던 시간들은, 대부분의 워킹맘들이 하는 고민일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S가 연락이 왔다. 아기는 잘 키우고 있고, 별일은 없는지 안부였다.
일을 다시 하고 복귀했다고 이야기하자. 대뜸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돈에 환장했니? 남편도 잘 벌고 있는데, 그 어린 아기를 굳이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일을 해야 되니?"
너무 큰 상처의 말이었다.
친구라는 게 그렇게 말할 수 있나?라고 생각했다가. 친구니까 나와 내 아기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겠지, 나 스스로 최대한 긍정적 생각을 하고 싶었다.
내 상황을 이야기하고 이해를 구해도 S는 그냥 너는 나쁜 엄마다.라고만 했다. 몇 번의 같은 대화가 반복되며, 서로 마음의 상처를 주는 말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자기는 그럴 수 없으니 나를 질투하는 거야? 뭐야. 나중엔 이런 말까지 했다. "나는 하는 걸 너는 못하니까 그러니?"라고 말이다.
그만두라고, 애 더 키우고 하라고, 마치 시어머니처럼 나에게 자꾸 이야기하는 S에게 어느 날,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전화기 너머로 이렇게 말했다. "너는 니 새끼 잘 키우고, 나는 내 새끼 잘 키우면서 각자 잘 살자!"
그 후 우리는 지금까지 보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동창 모임에서 얼굴을 마주 한 날이 있었는데, 그날 역시 나는 얼굴을 돌리고 마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잠시 후에 자리를 피해 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까지 할 일인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너무 다른 가치관으로 삶을 살아가는 친구였기에, 나 자신을 지키고 싶어서 헤어짐을 선택했던 것 같다.
우리의 셋째가 어느새 고2가 되었고, '잘 살고 있겠지'라고 생각만 한다. 문득 셋째의 생일날엔 그날 같이 산후조리원에 있던 S의 아이도 생일이겠구나, 생각한다. 내 일을 잘 지켜오며 가정과 아이들에게도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애쓰던 나에게 조금 힘을 주는 친구였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마음으로 나를 다독여 본다.
문득 생각난 S
너도 가끔 내 생각을 하고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