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4: 시선 a.

시선 a.

by 다온

20XX. 06. 13


인간은 제각기 다르면서도 놀라우리만치 비슷하다. 다들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으면서도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있다는 뜻이다. 역시나 같은 사람이 또 있었나보다. 나만 외로운게 아니었다. 잠이 안 오던 어느 날 밤, 또 할 일 없이 아디오스나 보고 있었는데, 온갖 화려하고 자극적인 게시물들 사이로 흥미로운 글이 눈에 들어왔다.


<일탈: 우주를 떠도는 공허한 마음들을 위하여>


처음엔 무슨 저급한 광고성 낚시글로 알고 그냥 지나쳤는데, 다시 보니 마치 나를 보고 제목을 지은 것 마냥 와닿아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게시물 내용은 정작 별거 없었다. 그냥 자기도 우주에서 할 것 없이 외롭고, 아디오스에서 폭로한 바가 있듯 ODT로부터 뒤통수를 맞아서 허무하다, 뭐 이런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일기와 다름이 없는 솔직담백한 글이었다. 여러 부분에서 동질감을 느끼며 글을 읽어 내려가다가, 마지막 줄을 보고 누워있던 몸을 반사적으로 일으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만나고 싶습니다. 만나야 합니다. 만날 방법이 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뭐야 변태같아 이상해, 이러고 넘겼겠지만, 지금 상태가 상태인지라 ‘방법’이라는 글자가 마치 온몸에 전구를 휘감은듯 눈부시게 눈에 들어와버렸다. 단호하기 그지없는 말투에 혹해버려서 이어지는 글에 들어갔더니 그가 개발한 H2P라는 통신 시스템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H2P, ‘Hetero Path Portae’ 라는, ‘타인에게 닿다’ 의 의미를 가진 이름이었다. 부랴부랴 H2P에 접속하여 대화해보니 글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달리 그다지 변태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냥 사람이 고팠을 뿐.


자신을 J 라 소개한 이 사람은 평소에도 타인과 곧잘 교류하던 사람이었는데, 우주선에 오르면서 그 모든 즐거움이 단절되고 게다가 사기까지 당해버리니 절망감에 그만 극단적인 시도를 했단다. 죽으려고 수면제를 한 움큼 집어서 삼키려는 순간 창 너머로 보이는 별들이 그렇게 아름다워보일 수가 없었고, 반짝이는 별들 중 어떤 것은 사실 별이 아니라 타인의 우주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저 밖에 사람이 있는데 외롭다고 죽기엔 너무 아까울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J는 숨 쉴 산소도 발 딛을 땅도 없는 우주에서 사람을 만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운이 좋게도 J는 컴퓨터와 우주선 시스템 체계 등 기술적인 면에서 일가견이 있었고, 항로를 임의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해킹 방법을 연구하는 한편 H2P에 조금씩 만날 사람들을 모집하는 글을 흘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어쩌다 댓글을 보게 되어 그와 연이 닿게 된 운 좋은 사람 중 한 명이 된 것이고.


모집하는 글을 공개적으로 올리지 않은 이유는 첫번째, 망할 놈의 ODT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고, 두번째, 너무 많은 사람이 몰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라고 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소통하면 참 좋겠지만,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고, 몇 개월을 깜깜하게 단절한 채 살다가 갑자기 한꺼번에 만나면 심리적으로 큰 자극이기도 할 것이다. 항로 변경 프로그램은 거의 개발을 마친 단계이고, J가 연락이 닿은 사람 중 다행스럽게도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어서 더욱 보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일단 모집한 사람들 한해 베타 버전으로 만남을 가진 뒤 더 많은 사람들에게도 닿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사실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실제로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매개체가 없이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고 육성으로 대화해본게 언제적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지금은 당연히 우주선 안에 혼자 갇혀있고, 이전에도 오염 때문에 외출과 접촉을 최소화하면서 살아서, 무언가를 통해 소통하는 것이 익숙해져버렸다. 그래, 그나마 지구에서는 일하느라 다른 수단으로 대화라도 했지, 우주에 와서는 아디오스도 내팽개쳤다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실 J와 대화하는게 굉장히 어색하고 낯설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 낯선 기분이 싫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까도 말했듯 평소 같았으면 J가 쓴 것과 같은 글에도 코웃음치고 넘겼을텐데, 어지간히 사람이 필요했는지, 정확히 말하면 내민 손이 절실했는지, 덥석 잡아버렸다. J와 대화한 요 며칠이 내가 우주에서 보낸 가장 재미있고 활기찼던 날들이 아니었나 싶다. 대화할 상대가 있다는 것, 내 말을 들어줄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실로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아닐 수가 없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괜히 청소도 열심히 했으니.


단지 지금 기대가 되면서도 두려운 것은, J 한 명이 아닌 여럿과 대화할 때도 이 즐거움이 계속될 것인지, 배가 될 것인지, 혹은 역효과만 발생할 것인지, 그리고 전달 수단 없이 바로 대화하는게 얼마나 어색할지이다. 글쎄, 해봐야 알겠지. 어찌됐건 지금 확실한 건, 드디어 만날 방법이 생겼고, 매우 기대가 되며, 나는 지금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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