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하면 사람들은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를까? 내 머릿속엔 가도 가도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진다. 2014년 1월에 아프리카 땅을 처음 밟아본 나는, 그때의 세렝게티 초원에서의 3일을 내 모든 여행 중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꼽는다. 차를 타고 아무리 달려도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거친 평지는 끝날 줄을 모르고, 동물들은 인간의 영역 밖인 그들만의 왕국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던 그 낯선 세계에 놀라고 감동했다. 그리고 그 장면들은 오래도록 내 로망이 되어주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5년 후인 2019년 1월, 나는 여행도 방문도 아닌 근무를 위해 아프리카 땅을 다시 밟았다. 초등학교 교사 경력 12년 차 되던 해였다. 나는 교육부 산하 기관인 국립국제교육원의 개발도상국 기초교육향상 지원 사업에 지원하여 남아프리카 한가운데에 위치한 보츠와나로 파견되었다. 파견 기관으로부터 받은 360일짜리 계약서에 근거해 서울시 교육청에 고용휴직을 신청하고 아프리카로 봉사를 떠난 것이었다.
아프리카 현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 '혼자' 사는 실제 상황이라 파견 생활은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국가 ODA 사업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만큼 편리한 삶을 기대하고 온 것은 아니었지만, 내 발령지는 수도와 가깝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고난도의 핸디캡을 가진 곳이었다. 내 추억 속 아프리카 초원은 관광지에나 있는 풍경이지, 현실은 낭만에 젖을 여유도 없이 아프리카 깊은 시골에서 사막의 척박함, 열악한 위생, 사람들과의 문화 차이에 고군분투했다. 그래도 봉사라는 단어에는 힘이 있는지 내가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이유를 상기하면 어떻게든 견뎌지고 하루는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왜 아프리카였을까.
동생은 KOICA에 지원하기 위해 대학교 조기 졸업을 했다. 학점 관리도 잘해놓고 취업 길도 열렸는데 봉사를 가겠다니 이해가 안 됐다. 더군다나 아프리카란다. 다시 생각하라고 강하게 설득했지만 진작부터 결심이 뚜렷했던 동생은 계획대로 다음 해 초에 르완다로 떠났다. 대학생 때부터 꾸준히 배낭여행을 다니며 더 큰 세계를 보고 여러 사람들을 만났었지만 2013년의 내 시야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랬던 내가 시간이 흘러 스스로 아프리카행을 선택하게 되었다니. 내 파견이 확정되었을 때 사람들 대부분은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냐며 좋은 결정이라고 격려해주었다. 그때 나도 먼 길 떠나던 동생에게 열렬한 응원만 보내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미 결정된 내 아프리카행에 대해 걱정을 늘어놓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는데 서운하거나 동요하지 않았던 건 지난날의 나도 그랬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자기가 직접 경험하기 전까진 본질을 알기 힘들고, 의미 있는 타자를 통한 간접 경험은 도움이 되지만 시의 적절하게 내게 영감을 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나에겐 아프리카의 포문을 열어준 사람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고, 가족 방문의 기회로 처음 그 땅에 발을 딛게 되면서 내 생각의 경계를 넓힐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도 유니세프 공익광고 속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의 모습이 아프리카인 전체의 모습인 줄 알 것이고, 흑인을 막연히 멀게만 느끼고, 아프리카를 무조건적으로 위험하게 여겼을 것이다.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만난 느낌으로는 우리와 사는 모습과 발전상이 다를 뿐 의식주를 영위하기 위해 주어진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건 마찬가지였고,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많은 것이 변했지만 그들만의 정서와 삶의 방법은 여전했다. 아프리카의 대자연은 압도적이었고, 특히 해외봉사를 나온 청년들로부터 받은 자극도 컸다. 한국을 떠나온 건 각자의 이유겠지만 불편함이 예고된 곳에 스스로 뛰어들어 남에게도 도움도 되고 자신의 경험치도 넓힌다는 게 멋져 보였다. 물론 그들 중에는 나의 직업 안정성을 부러워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미 직장 생활로 지쳐있는 서른의 나로서는 이십 대인 그들의 선택지가 더 크게 보였다. 내가 계속 공무원 생활을 하는 한 기회가 없을 것 같지만 코이카의 시니어 단원들처럼 퇴직 후에라도 꼭 이런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포부를 안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었다.
2018년 초, 한국 교사들의 직무 만족도가 OECD 국가 중 꼴찌인 게 팩트임을 나 자신과 주변으로부터 매일 확인하며 ‘내가 이러려고 죽어라 공부해서 선생이 됐나’하던 어느 흔한 날이었다. 퇴직을 하려면 아직 30년이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30년 상환 대출로 집을 샀다며 너도 그렇게 하라는 친구들 얘기에 “평생 빚 갚으면서 살라고?”하며 경악했던 그 기간이다. 하기야 그동안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십 년이 간 걸 보면 '그깟' 세월이 되겠지만, 어쨌든 나는 현재 새파랗게 젊었고 인생에 있어 도약의 계기가 필요한 시점으로 느껴졌다. 재능 또는 노하우 덕분에 내 일에 대한 자신감도 분명히 있지만, 지금 이 상태로 여기서 계속 직장 생활을 할 에너지가 없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다 ODA 교사 파견 사업 공문을 보게 되었고, 나는 그냥 넘기지 않고 찬찬히 읽어보았다. 사실 신규 교사 때부터 해외 근무에 대한 바람은 컸지만 교사의 신분으로는 기회도 많지 않고 이런저런 핑계로 어디에도 지원서 한 번 내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재외 한국학교가 아닌 외국의 현지 학교로 가는 이 사업은 한국 시스템을 벗어나고 싶은 나의 눈길을 단 번에 끌었다. 미래 언젠가로 막연히 미뤄뒀던 개발도상국으로의 파견 타이밍이 갑자기 온 것 같았다. 사소한 모든 것까지 걱정이 되었지만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가장 컸다. 코이카와 파견 성격은 같으나 파견 기간이 교직 경력으로 인정되고 지원금도 더 많다는 것도 동기를 자극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안 갈 이유가 없었다.
나의 파견은 출국 두 달 전에 결정되었다. 처음 발표된 파견자 명단에는 내 이름이 없었는데 이후 추가로 확정된 것이었다. 부모님은 이번에도 대범하게 나의 결정을 이해해주셨고 값진 경험을 하고 오길 빌어주셨다. 자녀의 선택을 믿고 존중해주는 부모님을 가진 것은 정말 행운이다. '20대도 아닌데, 결혼이 더 늦어지겠네, 힘든 일을 뭐하러 굳이, 아프리카라고?' 등 걱정을 늘어놓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인들은 '네가 해외로 이제야 가는구나' 하며 격려를 해주었다. 앞으로 일 년은 한국에 들어올 계획이 없으니 물건과 통장 잔액을 정리해 두었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조용히 안부를 전했다. 파견 기관이 제공하는 건강검진도 무사히 완료하고, 필요한 예방 주사도 맞았다.
2019년 1월 6일이 막 되던 자정 너머의 시각, 나를 태운 비행기는 인천 상공을 날아 머나먼 곳을 향해 떠났다. 이제까지 가 본 30여 개의 나라보다 훨씬 더 멀리 있고, 쾌적하지 않은 환경에서 일 년을 살아야 하니 긴장이 될 만도 한데 내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편안했다. 비행은 꼬박 하루가 넘게 인천-도하, 도하-요하네스버그, 요하네스버그-가보로네로 이어졌다. 마지막 항공기는 매우 작은 사이즈로, 우리의 목적지가 얼마나 작고 깊숙한 곳에 있는 나라인지 가늠케 했다. 난기류가 심해 무사히 착륙하길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그동안 비행기를 많이 타봤지만 나는 이 날 처음으로 비행기 멀미를 했다. 늦은 밤, 드디어 보츠와나의 수도 가보로네에 도착했다. 보츠와나는 우리나라보다 7시간이 느리기 때문에 도착한 날은 아직도 1월 6일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12월 31일이 언제 올까 싶지만 지나고 보면 금방일 테니 이왕 온 거 잘 살아보자고 다짐했다. 이제 괴테의 말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장이 내 앞에 펼쳐졌다.
여러 가지로 그대는 게을렀다
행동하는 대신 그대는 꿈만 꾸고 있었다
감사의 말을 해야할 때 그대는 침묵을 지켰다
여행을 했어야했지만 그대는 자리에 누워 있었다
- 괴테어록 실천 158번 중 -
2019.1.6. 보츠와나에 도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