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파견기관은 지원금과 체제비 명목으로 한화 고정 금액을 한국 통장으로 지급하는데 대부분을 출국 전 12월에 선입금해주고 파견된 해에 두 번에 거쳐 나머지를 입금해주었다. 그러니까 올해는 통장에서 계속 돈이 빠져나가기만 하고 들어오는 돈은 거의 없는 셈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돈 쓸 일이 뭐 있겠냐'며 '돈 좀 모으지 않았냐'는 친구의 물음에 나는 반은 그렇고 반은 아니라고 답했다.
보츠와나 생활에서 돈 쓸 일이 없긴 했다. 우리 동네는 시골이라 더 그랬다. 갈 데도 없고 놀 데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수도에 가더라도 상황은 비슷했다. 즐길 곳도, 사고 싶은 물건도 없고 쇼핑은 장보기가 전부였다. 물론 수도에는 영화관도 있고 옷가게도 많이 있고 갈만한 음식점들도 있지만 경험 삼아 한두 번 갔을 뿐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수도는 시골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모든 것이 풍부하고 다양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돌아다니기만 해도 숨통이 트였다.
택시, 노점상 등을 제외한 거의 모든 상점에서 카드 사용이 가능하므로 현금을 쓸 일이 없고, 해외에서 수수료 없이 쓸 수 있는 체크카드를 한국에서 만들어왔기 때문에 나는 보츠와나에서도 우리나라에서처럼 카드 한 장만 들고 다녔다. 단, 카드로 결제하면 보츠와나 뿔라가 미국 달러로 환산되고 다시 한화로 최종 빠져나가는 이중 환전 시스템이라 한화상으로 손해 보는 부분은 있었다. 우리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물가도 싸고 환율상 한국돈이 우세할 것이라고 착각하기 쉬운데 보츠와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보츠와나는 기본적으로 물가가 높고, 뿔라(Pula)가 한화(WON) 보다 비싸며, 전분야에 걸친 물건 대부분이 남아공에서 수입되므로 재화의 종류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1월 환율은 1 뿔라에 106원이었는데 점점 올라 8월에 111원까지 되더니 11월에 다시 106원 선을 회복했다. 나는 보츠와나에 오자마자 알 수 없는 이유로 아이폰과 노트북이 고장 나서 둘 다 새로 사야 했고, 자동차 구입과 그 소모품들 교체, 그리고 각종 살림을 장만하느라 초기 정착 비용으로 목돈을 써야 했다. 파견기관이 선입금을 해주는 이유가 있었다. 가계부를 안 써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적응기간이 끝나고부터는 대략 식비에 6할, 주유비에 3할, 통신비에 1할 정도를 지출하며 살았던 것 같다.
* 식비 : 나는 내가 직접 요리를 하기 때문에 외식비가 안 드는 대신, 장보는 데 많은 시간과 돈을 썼다. 집에서 삼시 세끼 해 먹는 게 하루 최대 일과라 장보기는 내 보츠와나 생활의 관심 1순위였다. 우리 동네 마트는 물건이 적어서 나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수도에서 장을 봐왔다. 식재료를 한꺼번에 사기 때문에 자취생의 장보기라고는 보기 어려울 만큼 나는 카트에 많은 양을 실었고, 그만큼 1회 지출량이 컸다. 살 수 있는 종류가 한정적이라 '이거라도 좋은 걸로 먹자'하고 나는 가능한 비싸고 좋은 걸로 골랐다. 우리 동네에서 볼 수 없는 싱싱하고 먹음직스러운 과일과 야채들이 진열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수도의 큰 마트들은 나에게 별천지였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바나나 외에는 현지 물가상 과일이 비쌌는데, 나는 다채로운 색감의 큼직한 과일들을 보면 엔돌핀이 돌며 구입을 망설이지 않았다. 식비의 또 다른 큰 축은 생수 구입이었다. 나는 운반이 쉽도록 5L짜리로 샀는데 한 통에 한화 2천 원 정도로, 내가 하루에 물을 1.5L 이상 마시고 생수를 여러모로 쓰다 보니 한 번에 열 통씩 사다 날랐고 지출도 꾸준했다. 생수 가격이 점점 올라 부담스러웠는데, 보츠와나에 거주한 지 반년이 지나서야 수도에 있는 생수 전문점 '오아시스(Oasis)'를 알게 됐고 그 후로는 생수 5L를 7.5 뿔라(약 850원)로 리필하면서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 주유비와 세차비 : 1L당 9.4 뿔라(약 천 원) 정도로 우리나라보다 약간 쌌다. 주유할 때 무연 93과 95 중 선택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품질 차이가 없고 가격은 약간 더 싸다는 93을 권하길래 나도 그 추천에 따랐다. 보츠와나는 전국 주유소의 기름값이 같기 때문에 가격 비교를 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우리나라는 주유소에서 티슈, 물티슈, 생수 등을 준다면 여기서는 물건이 아니라 자동차 앞유리를 닦아주는 서비스를 한다. 덕분에 차체는 늘 모래 먼지로 뒤덮여 있을지언정 운전석의 시야만큼은 맑았다. 어떤 주유소는 보닛을 열어 엔진 점검을 해주거나 타이어 상태를 봐주기도 한다. 내 차는 풀로 채우는데 350 뿔라(약 4만 원) 정도 들었고, 200 뿔라(약 22000원)만큼 주유를 하면 수도를 편도 3번 (약 300km) 주행할 수 있었다. 나는 수도 갈 때만 운전을 하는 편이라 몇 번 상경하느냐에 따라 지출액이 달라졌다. 우리 동네에 많고 많은 세차장 중 앞 집 아저씨의 추천을 받아 이용하게 된 곳은 차 안팎을 정말 깨끗하게 해 주는데 35 뿔라(약 4천 원)로 가격까지 완벽했다. 우리나라의 손세차 가격을 생각해보시라. 셀프 세차, 자동 세차 가격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이렇게 인건비가 싸다. 세차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벌써 외부는 모래먼지로 휩싸이지만 내부는 말끔해서 기분도 좋고 돈 들인 보람도 있었다.
* 통신비 : 통신 요금은 선불제로, 통신사 대리점이나 마트에서 자신이 원하는 만큼 충전을 한다. 휴대폰의 전화와 문자는 충전 금액에서 차감되고 데이터는 패키지 상품을 별도로 구입하는데, 모바일용과 와이파이용 패키지가 따로 있어서 통신사의 이벤트 기간에 맞춰 혼합해 이용했다. 예를 들어 와이파이 행사가 있는 달에는 모바일 데이터를 최소한만 사고, 모바일 데이터 행사가 있는 달에는 와이파이를 안 사고 노트북도 테더링으로 사용하는 식이었다. 내가 기본적으로 썼던 모바일 상품은 한 달 동안 2GB를 쓸 수 있는 149 뿔라(약 16500원) 짜리였다. 내가 쓰는 통신사 오렌지(Orange)의 가성비 최고 상품은 밤 12시부터 오전 5시까지 모바일 데이터를 무제한으로 쓸 수 있는 10 뿔라(약 1100원) 짜리 Night Ninja Bundle이었는데, 밤을 못 새우는 나 같은 사람들에겐 무용지물이었지만 사람들은 보통 주말에 드라마나 영화를 다운받는데 유용하게 이용했고, 나도 가끔씩은 일부러 낮잠을 자고 일어나 한밤중에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우리 학교는 인터넷 연결이 안 되기 때문에 나는 수업 자료를 만들기 위해 매일 학교에 노트북과 와이파이 공유기를 가지고 다녔다. 공유기 전원만 켜면 어디서나 내가 충전한 만큼의 데이터를 쓸 수 있는 시스템이라 그 편의성이 마음에 들었다.
(좌) 내가 이용한 통신사 Orange (우) 와이파이 공유기 * 전기 : 마트에서 본인의 전기 미터기 번호를 알려주고 원하는 만큼 충전을 해서 쓰는 선불제다. 충전할 때 받은 일련번호를 미터기에 입력하면 구입한 kWh만큼 숫자가 올라간다. 100 뿔라를 충전하면 115 kwh정도 충전되니 1 kwh가 약 100원이고, 나는 1년 동안 400 뿔라(약 44000원)를 충전해서 썼다. 동네가 정전이 되었던 적은 몇 번 없지만 우리 집 전기 차단기가 이유 없이 자주 내려가는 바람에 항상 스위치의 일부만 올려놓고 살았다. 마트에서 우리 집 미터기 번호를 조회하니, 주소가 해당 관공서인 Southern District Council로 떴다.
우리집 전기 미터기 * 수도세 : 일 년 내내 단수였기 때문에 수도세는 낸 적이 없었다. 물 나온 날이 있긴 했지만 워낙 사용량이 적어서인지 고지서에 적힌 청구액은 0이었다. 이사 온 날 수도국에 찾아가 수도 연결을 신청할 때 보증금으로 200 뿔라(약 22000원)를 냈었는데 귀국 전에 수도를 해지하러 갔더니 보증금은 한 달 뒤에 받을 수 있다길래, 교장선생님께 나중에 이걸 찾아다 학교 기금으로 써달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본인이 아닌 사람이 수령하려면 진술서(Affidavit)가 필요하다고 해서 경찰서에 가서 선서하고 서류에 도장을 받아왔다. 오른손을 들고 선서를 하기 전 경찰은 나에게 "Do you believe in God?"이라고 물었고 "Yes"라고 답하자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보츠와나가 기독교 국가이기도 하고 선서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절차일 텐데, 만약 신념이 강한 타 종교인이 "No"라고 답한다면 진술서를 못 받아가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엄중한 분위기라 물어볼 수 없었다.
(좌) 2019. 1. 16 수도 연결 서류 (우) 2019.11.28. AFFIDAVIT 서류 돈은 월급날 로그인했다 로그아웃해 사라지는 것이라는 뭇사람들의 표현에 위안을 삼고 싶지만, 직장 생활을 해오는 동안 나의 경제생활은 슬기로웠다 그리 자신할 수 없다. 나는 직장 생활 애초부터 '공무원 월급으로 뭘 하겠냐'며 재테크에 관심이 없었고 여행이나 배우고 싶은 클래스를 찾아다니는데 시간과 돈을 꽤 들이며 살아왔다. 모두 보이지 않는 나의 자산이 되었으리라 믿지만, 사실 시간이 흐르다 보니 일부러 꺼내어 보지 않는 한 그때의 기억들은 마음에 켜켜이 쌓여 잘 생각나지 않게 된다. 그러다 통장 잔고가 아쉬워지기도 하고 멀리 떠나버린 내 돈의 행방이 궁금해지기도 하고. 그래도 물질이 주는 환상은 유한하며 인생에 남겨진 추억은 무한하므로, 지난날의 선택들에 나만은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무엇보다 보츠와나 파견 생활은 내 버킷리스트 한 줄을 지우는 경험이었으니, 내 인생에 특별히 새겨진 경제 활동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보츠와나의 동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