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콩쥐 생활

보츠와나에서 자취를 한다는 것

by 다온

사람들이 가끔씩 청소나 빨래 일을 맡겨달라고 우리 집을 찾아오면 나는 "미안하지만 집안일은 내가 다 한다”며 그들을 돌려보내게 되었다.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시간도 많은 내가 집안일까지 안 하면 나 홀로 라이프가 더 무료해질 것도 같고 얼마 안 되는 수고비도 모으면 많을 테고, 내가 원래 일을 남에게 못 맡기는 성격이라 더 그랬다. 결론적으로 나는 아프리카에서 콩쥐가 되었다. 굳이 팥쥐를 설정하자면 수돗물 공급을 안 해주는 그 무엇이라고나 할까. 학교 갔다 와서 빨래하고 청소하고 주방 일을 하는 일상은 다른 파견자들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물이 안 나오는 동네에 당첨된 바, 물 긷기가 추가되었다. 그중 장 봐서 요리하는 것이 제일 나았고, 물 긷기는 악소리가 나는 고역이었다. 먹는 게 가장 재밌고 힘쓰는 게 가장 고통스러웠다는 얘기다.


* 물 긷기 : 우리 집에는 20~25L 물통이 6개 있었다. 나는 물을 채워서 주로 욕실에 2개, 주방에 3개, 비상용으로 화장실에 1개를 두고 썼다. 다 마신 5L 생수통도 생활용수를 담는데 이용했는데, 변기 물탱크를 채우는데 정확히 5L가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이것을 모두 화장실용으로 썼다. 그러니까 내가 하루에 비우는 생수통 숫자는 내가 하루 동안 화장실에 가는 횟수와 같았다. 생수를 계속 사 먹으니 통이 많아졌고, 이웃에서 달라고 하면 나눠주면서 집안에 항상 20개 정도는 유지했다. 이 통이 가볍고 사이즈가 작아서 물 길을 때 편리한데 동네 사람들은 생수를 사 먹지 않기 때문에 내가 빈 통을 주면 좋아했다. 처음에는 물탱크에서 물을 채워서 집 안까지 들고 나르느라 허리와 팔이 너무 아팠는데, 몇 개월 후부터는 학교에서 빌려온 호스로 물탱크에서 현관까지 물을 끌어다 썼다. 이 30보 내외의 걸음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삶의 질은 수직 상승했다. 물 긷기만큼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싶었지만 물은 마을에서 워낙 예민한 사항이라 물에 관해 어떠한 것으로도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아서 끝까지 내가 다 했다.

5L 생수통은 화장실, 큰 통은 욕실과 주방에서 사용해요

* 빨래 : 중고 세탁기를 사려던 애초의 계획은 이 곳이 단수 지역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무산되었고,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손빨래를 해야 했다. 감사하게도 수도에 사시는 파견 동료분이 빨랫감을 모아 와서 세탁기를 이용하라고 하셔서 그렇게 할 때도 많았다. 집 안에는 배수구가 주방의 싱크대와 욕실의 욕조밖에 없기 때문에 실내에서 빨래를 하려면 욕조에 물통을 놓고 내가 욕조 바깥에 서서 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물통에 가루세제를 풀어 빨랫감을 충분히 담가놨다가 주물러 헹구는 방식으로 했는데, 옷에 때가 묻을 일도 없고 먼지와 냄새 제거가 주목적이라 빡빡 문지를 필요가 없었다. 물기를 짜내느라 손목을 많이 써서 찌릿하긴 했다.


이웃들의 뒷마당에 세탁기가 많이 보이기는 했지만 일반 서민에겐 손빨래가 일반적이라 거품이 잘 나는 손빨래용 세제(Hand Washing Power)가 따로 나왔고, 향수를 많이 쓰는 문화라서 그런지 섬유 유연제의 향기도 다양했다. 거품을 헹궈내는데 물이 많이 필요하다 보니 빨래도 부담이 됐는데, 마당에서 빨래를 하는 이웃들을 보면 거품이 많은데도 그대로 물기를 짜고 끝내버렸다. 이는 설거지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헹군다고는 하지만, 아무튼 우리가 봐선 헹구다 마는 식이었다. 교민들은 대부분 가정부를 고용하는데 현지인들과 자주 마찰을 빚는 게 바로 이 헹굼 문제라고 했다. 빨래는 세탁기로 하니 상관없지만, 설거지의 경우 거품을 다 씻어내야 한다고 옆에서 말해주지 않는 한 본인들 방식대로 해버린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빨래를 마당의 빨랫대와 펜스에 널었다. 형형색색의 옷들은 주변의 칙칙한 사막색을 환히 밝혀주었다. 매일 모래 바람이 일기 때문에 빨래한 게 도루묵 될 것 같지만, 그게 그들의 방식이었다. 어느 날 윗집 남자는 나에게 빨래를 어디에 너는지 물었다. 내 빨래가 밖에 걸린 것을 본 적이 없어서 궁금했던 것이다. 밖에는 먼지도 많고 널 곳도 없어서 건조대를 구입해 거실에서 말린다고 했더니, 그제야 그는 "아!" 하며 돌아섰다.

마당에 가지런히 널어진 이웃집 빨래들
열심히 손빨래를 하고 거실에 널어 말려요

* 청소 : 도구는 대빗자루와 밀걸레였고 나는 이 두 가지를 항상 현관 앞에 비치했다. 밀걸레는 마르기 쉽도록 줄에 걸어놓고 대빗자루는 문 옆에 세워뒀었는데, 외출하다 돌아오는 길에 멀리서 이게 보이면 '우리 집이구나' 싶었다. 실내에서 신발을 신고 다니기 때문에 우리나라 방바닥 청소하듯 깨끗하게 쓸고 닦을 필요도 없고, 문 틈으로 항상 모래나 벌레가 들어오기 때문에 바닥에 먼지도 많고 살충제도 바닥에 마구 뿌리게 됐다. 빗자루질은 항상 가능했지만, 물걸레질은 빨래하는 날에 맞춰 그 헹굼물로 했고 물이 나오는 날에는 무조건 대청소를 했다.


나는 처음에 이곳의 청소 방법을 배우려고 교육청 청소 용역 직원을 소개받아 같이 입주 청소를 했다. 이 분은 나와 함께 가게에 들러 청소 용품들도 골라주고 가격 흥정도 해주었다. 우리 집 바닥을 쓸고 닦는 데는 1시간이 덜 걸렸고, 수고비는 50 뿔라(약 5500원)였다. 댁이 교육청 근처라서 차로 모셔다 드리는 20분 동안 개인적인 얘기를 나누게 됐는데, 결혼하지 않은 채로 자식 네 명을 낳고 같이 살던 남자가 바람이 나서 2년 전에 떠났다고 하며 4살짜리 막내까지 키우려면 부업을 많이 해야 한다며 나에게 자주 불러달라고 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30대 후반의 이 엄마가 안쓰러웠지만, 이후로 청소는 내 몫이 되어 또 모시지는 않게 되었다.

우리 집 현관 풍경. 밀걸레와 대빗자루가 항상 자리를 지키고 있죠

* 주방 : 내 주방의 가전제품은 보츠와나 교육부가 준 스토브와 냉장고, 내가 구입한 전자레인지와 전기포트가 전부였다. 그리고 내 핵심 조리 도구는 한국에서 가져온 작은 압력솥과 코펠, 여기서 산 후라이팬 두 개였다. 나는 나 먹을 정도의 요리는 어느 정도 할 수 있고, 장보기부터 설거지까지 귀찮아하는 과정은 딱히 없어 하루 세 번의 주방 일이 힘들지는 않았다. 식기에 흰 석회 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설거지 후 마른 천으로 물기를 닦아내는 과정까지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사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먹고 싶지 않아서 나는 항상 집에서 밥을 해 먹었다. 여기서 밥이란 한식을 일컫는 게 아니다. 보츠와나 내 주방에서는 한국 음식이 거의 요리되지 않았다. 베이스가 되는 고추장, 된장, 미역, 참기름, 김, 멸치를 집에서 조금씩 챙겨 왔고, 한국 사람 인증이라도 하듯 컨디션이 안 좋으면 된장국만 팔팔 끓여 먹어도 속이 가라앉긴 했지만, 평소에는 한식이 먹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한국에 갈 때가 되었는지 귀국 두 달 전부터 갑자기 한식이 당겼다. 마트에 가도 항상 똑같은 재료만 팔고 있고, 나는 그것들을 아무리 돌려가며 선택한다 해도 결국엔 똑같은 것을 사게 되고, 이제 십 개월이 지나니 똑같은 것을 해 먹는 것도 지겨워졌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중국인 식료품 가게를 찾아가게 되었다. 파견 교사들이 수도에 오면 우리 쌀이나 한국 라면 등을 사기 위해 항상 들르는 곳인데, 나는 그동안 쌀도 일반 마트에서 찰기 없는 현지식(Long-Grain Rice)을 사고 라면은 원래 안 먹기 때문에 갈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 음식으로 입맛이 돌아오자 그곳에 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중국인 가게는 매주 남아공에서 물건이 들어오는데 해당 요일에 맞춰 가면 쓸만한 채소를 좀 구할 수 있지만 시골에 사는 나는 물건이 다 떨어진 주말에만 수도에 갈 수 있기 때문에 상시 판매되는 곡물이나 가공식품만 살 수 있었다. 나는 팥을 사서 팥죽을 하고, 간장과 당면을 사서 잡채를 하고, 떡을 사서 떡볶이를 해 먹으며 식욕을 채웠고 내가 좋아하는 흑미, 현미, 검은콩을 사다가 잡곡밥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산을 기피했지만, 보츠와나에선 그 중국산 덕분에 한식에 대한 욕구를 달랠 수 있었다. 교민들은 여기서 배추나 무를 사다가 김치를 담그고 콩나물, 두부, 대파 등을 사다가 반찬을 하며 한국식 밥상을 차렸다. 나는 교민분께서 김치를 주셨던 적도 있고 한인교회에 가면 일요일 점심에 한식을 먹었기 때문에 간간히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수 있어 적어도 음식에 대한 향수병은 없었던 것 같다.

20190615_144956.jpg 붉은 것은 팥, 초록빛은 녹두, 검은 것은 검은콩과 흑미. 각 봉지는 40뿔라 (약 4400원)에요

보츠와나에서 최대한 건강한 음식으로 식탁을 꾸려보겠노라 다짐했었지만 어쩌다 보니 밀가루 위주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유튜브 레시피대로 각종 밀가루 요리도 시도해보고, 파스타도 많이 해 먹고, 식빵으로 간단히 한 끼를 해결할 때도 많았다. 개인적으로 보츠와나에서 맛있는 빵은 식빵이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가장 비싼 것이 한화로 1500원 정도인데 재료에 따라 White, Brown, Whole wheat 세 종류로 구분되어 나오고, 나는 브라운과 통밀을 번갈아 구입했다. 생활이 그리 편하진 않았는데도 보츠와나에 살면서 어째 체중이 점점 늘어났다. '먹는 낙이라도 없으면 여기서 어떻게 사냐'는 누군가의 말을 핑계 삼아 또는 공감하며 나는 이렇게 식생활 인프라가 부족한 환경 속에서도 입에 맞는 것들을 요리조리 해 먹으며 살았다.

우리 집 주방 가전

나는 혼자 하는 일, 집에 있는 시간, 조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처음에는 보츠와나 생활에 쉽게 적응했는데 시간이 꽤 흘러도 사람들과 교류할 기회도, 행동 범위를 넓혀갈 여지도 특별히 생기지 않다 보니 집에 계속 혼자 있게 되고 내가 지금 아프리카에 있다는 게 전혀 실감이 안 났다. 그럴 땐 기분 전환도 할 겸, 운전을 하고 십 분을 달려 동네에서 가장 큰 병원 근처로 갔다. 롤러코스터가 연상될 만큼의 급경사를 지나야 도착하는 곳인데, 그만큼 지대가 높아서 마을 전경이 한눈에 다 보였다. 나는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 밖으로 나와 풍경을 감상했다. 빽빽이 들어찬 부시 사이로 민가가 촘촘히 박혀 있는 모습인데 장관이었다. 이렇게 잠시 여유를 되찾고 나면, 다시 이 동네와 내 쳇바퀴 도는 일상에 대해 긍정적인 마음이 조금은 생겼다.


5G의 디지털에 살다가 갑자기 극한 아날로그의 세계로 오게 되니,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여행하는 기분이 자주 들었다. 그리고 한국의 풍요와 편리함이 몹시 그리웠다. 부디 그때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보츠와나에서 매일 반복되던 나의 콩쥐 일상이 한 편의 동화처럼 내 기억 속에 오래 예쁘게 남으면 좋겠다.

우리 동네 뷰포인트.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마을을 내려다보면 마음이 시원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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