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동안 우리 동네에는 몇 번 비가 왔을까요?
나는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 보츠와나는 국토의 70%가 칼라하리 사막(Kalahari Desert)인데, 우리 지역이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는 해도 사는 환경은 비슷했다. 그 쪽이 기온은 높아도 물은 잘 나온다고 하니 여기가 칼라하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더 살만하다고 할 순 없었다. 나는 그동안 '사막'이라 하면 낙타 타고 모랫길을 횡단하는 탐험가나 터번 두른 상인들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이미지는 관광할 때나 떠올리는 거지 아프리카 실제 생활과는 무관했다. 실상은 선인장의 잎이 가시로 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체감되고, 주위의 삭막함과 황량함에 가끔씩 정신이 멍해질 뿐이었다. 3년 전 우리나라 예능에 등장한 이후 한국 관광객이 급증한 나미비아는 내가 보츠와나에 가면 ‘당연히’ 여행할 나라였다. 하지만 결국 나는 가지 않았다. 보츠와나에서 비행기로 가면 두 시간이고, 앞서 다녀온 동료들도 적극 추천하고, 한국이 사전 비자 국가에서 올 9월 말에 도착 비자 국가로 바뀌며 입국이 간편해지는 등 여행의 당위성이 커져갔지만 나는 사막을 피하고 싶다는 감정이 더 컸다. 내가 겪어내야 하는 사막도 극한데 또 다른 황무지를 찾아 헤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비용까지 많이 드는 일이었다.
보츠와나 사막의 겨울이 끝을 향해가던 8월 14일, 내게 판타지 같은 순간이 있었다. 집 안에 길어다 놓은 물을 다 써서 물통을 들고 밖에 나가려는데, 갑자기 싱크대에서 물소리가 났다. 물은 항상 예고 없이 잠깐 나왔다 끊기기 때문에 나는 그 타이밍을 최대한 빨리 알아채기 위해 항상 수도꼭지를 열어두었다. 야호! 오늘 물 긷는 노동은 패스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빨래를 하고, 배불리 밥도 먹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 창문으로 쏟아지는 겨울 볕을 쬐다가 스르륵 낮잠에 빠졌다. 잠에서 깨보니 아직 햇살 팔팔한 대낮이었다. 그런데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렸다. 이리도 완벽한 ASMR이라니! 나는 침대에 누운 채 고개를 돌려 투명한 창문을 바라보았다. 오후 풍경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티 없이 파란 하늘과 뜨거운 태양의 하모니였다. 그런데 도대체 이 소리는 뭘까. 밖에 비가 오고 있을 리도 없고, 여우비라 하기엔 소리가 지나치게 우렁찼다. 창문을 열고 팔을 쭉 뻗어 손바닥에 비가 떨어지는지 몇 초 기다려봤는데, 손에는 바싹 마른 대기만 느껴졌다. 물소리가 왼쪽에서 크게 나서 고개를 그쪽으로 돌려보니 소리의 근원지가 거기 있었다. 윗집 배수관이었다. 윗집은 배수 시설이 고장 나서 물이 건물 바깥으로 물이 떨어지는데, 오늘 물이 나온다는 걸 이렇게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 따뜻한 오후 햇살과 낙수 소리를 한참 더 즐겼다. 눈을 감으니 세찬 소나기처럼 들렸고, 이 행복한 착각은 내 나른한 오후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아직 물이 끊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나의 엔돌핀은 마구 샘솟았다.
시간이 흘러 다시 한여름이던 11월 1일 밤 9시 반, 판타지는 현실이 되었다. 진짜 비가 온 것이다. 나는 귀와 눈을 의심했다. 지난 6개월 동안은 정말 황폐 그 자체였고 온 하늘에 짙은 구름이 두텁게 깔리더라도 가랑비도, 소나기도 없던 사막생활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무슨 일인지 바람이 거세게 불다가 정전이 되더니 비, 천둥, 번개가 동시에 휘몰아쳤다. 거실에 노트북과 핸드폰을 켜놓은 상태라 우선 앞은 보였지만, 커튼을 열어 밖을 보니 온 세상이 까맸다. 번개가 칠 때마다 앞집 건물과 우리 집 옆 부시들이 한 번씩 반짝 보이면서 이곳을 귀곡산장 으로 만들었지만 나는 무섭기는커녕 비가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사람들이 봤으면 '저 외국인 유난이네' 했을 텐데 사방 어디에도 인기척이 없으니 나는 자유롭게 내 집 현관을 드나들며 비가 오는 이 '희귀한' 풍경을 동영상에 담았다. 검은 화면에 빗소리만 들리다가 번갯불이 번쩍일 때마다 주위가 환해지는 모습이었는데, ‘끈질기게 안 오던 비가 소리 소문없이 찾아온 날, 호들갑을 떨면서 이걸 찍었었지’하고 회상에 잠길 미래 언젠가가 그려져 홀로 뿌듯했다. 나는 생생한 빗소리를 듣고 싶어서 노트북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을 껐다. 인간의 그 어떤 아름다운 연주도 자연의 소리를 따라올 수는 없다. 우리 동네는 바람만 불면 정전이 됐는데 그래도 집 나간 전기는 금방 돌아오는 편이었다. 그 날은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내가 일 년 동안 발령지에서 비를 본 날은 열흘도 안 됐다. 비에 대한 갈증이 얼마나 심했는지 나는 비 오는 날마다 달력에 표시를 하고, 사진과 동영상으로 증거도 남겼다. 교육청에 사는 동안 소나기 두 번(1월 14일, 1월 16일), 관사에 사는 동안 소나기 네 번(1월 27일, 2월 5일, 2월 26일, 4월 24일), 그리고 11월 1일 밤부터 2일 이른 아침까지 그동안 안 왔던 것까지 소급 정산된 듯 보슬보슬 긴 비가 왔다. 마당에 물이 고였고, 앞집 건물은 그 물에 비쳐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의 메마른 감정도 빗소리에 리듬감을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