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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에게도 친절해야해

남아프리카공화국 - 케이프타운(Cape Town)

by 다온

저는 질문이든 답이든 명쾌한 걸 선호하는데

누가 '가장 좋았던 여행지가 어디였냐'고 물을 땐

'이상형이 어떻게 되냐'는 물음 때만큼이나

참으로 모호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개인의 인격과 감수성으로부터 조합되는 그런 감상을

어떻게 이유를 곁들여 남에게 설명할 수 있는 거죠?

무엇에 호감을 느끼면 내 마음이 왜 이런가를 분석해보려는 특이함이 제게 있긴 합니다만

대놓고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긴 힘들어요.

그만큼 평소 그런 것들이 머릿속에 가지런히 정렬되어있지 않은 사람이죠.

그런데 뭔가를 얘기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뇌는 아무래도 가장 최근 정보부터 뒤지고

그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장면을 입 밖에 내놓더라고요.

그 결과, 2020년부터 저는 케이프타운(Cape Town)부터 언급하고 있답니다


왜 너는 내게 이리 아름답게 남아있는가!


저는 보츠와나 현지 학교에서 근무를 했는데,

제 발령지는 그해 내내 물이 안 나왔어요.

부임지는 현지 교육부가 결정하는데

저희 동네는 보츠와나 유일의 단수 지역이었어요.

정부의 ODA 사업차 아프리카에 자진 파견을 온 것이니 편리한 환경을 기대한 적은 없으나

같이 온 동료들 누구도 겪지 않는 고통이 나에게만 주어진다는 건

상대적 박탈감을 얹어주었죠.

제가 위생에 예민하고 지저분한 걸 못 참고 비위도 약하다 보니

괴로움의 디폴트 값은 애초부터 높게 책정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그래도 저는 당당히! 임수를 완수했습니다.

나도 '의지의' 한국인이고

'정 있는' 한국인들이 곁에서 도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겐 치트키가 있었어요.

바로, 방학이었습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제 아무리 봉사정신으로 똘똘 뭉친 누구였더라도 제 상황에

아마 중도 귀국을 한 번쯤은 떠올지 않았을까 싶어요.


보츠와나는 3학기제로 방학도 세 번이고 총일수는 우리와 비슷합니다.

삼사 개월마다 휴가가 주어지는 건데

더 이상은 못살겠다 싶으면 방학을 하고 방학이 끝나면 다시 힘이 좀 생기다 보니

저에게 방학은 산소호흡기였죠.


일단 방학이 시작되면 저는 동네를 떠났어요.

한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고 거창하게 말하고 싶군요.

일 년에 비가 열 번도 안 온 것에 대해선 기후적인 것이라 별 유감이 없습니다만

여기서 조금만 벗어나면 수도꼭지에서 물이 펑펑 나온다는 사실은

저를 누구보다 빨리 어딘가로 직이게 했어요.


안타까운 건

한국을 출국할 때까지만 해도 계획에 있던 장거리 비행들은 다 포기했다는 거예요.

시간과 비용이 타이트하기 했지만

그만한 체력이 안된다는 판단에서였죠.

내 기력은 어쩌다 그리 되었던 건지..

결과적으로 저는 보츠와나 주변국으로 레이더를 집중하게 되었답니다.


저의 첫 여행지는 케이프타운었어요.

원래부터 가려고 했었고, 보츠와나에서 직항이 있고, 두 시간밖에 안 걸리니

바람 쐬러 가기에 최고의 목적지였죠.

일주일을 있었고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제게 별천지였습니다.

케이프타운도 치안이 안 좋은 도시 중 하나인데

구글에서 찾은 안전지도(Safety Map)상에 초록색으로 표시된 지역만 가면 괜찮다길래 그렇게 했더니

노프라블럼이었어요.

그런데 그 구역 거주민들은 대부분 누구일까요?

네, 백인입니다.

이 도시의 실상인 거죠.


저는 거대한 대서양을 접한 씨포인트(Sea Point)에 머물렀는데

여기가 세계에서 아름다운 조깅길 중 하나래요.

조깅하는 사람들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볼 수 있다는 게 매우 인상적이었요.

저는 허구한 날 여기 나가서 바다를 보고 산책을 했어요.

제가 이렇게 바다에 진심인 사람인 줄 여기서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게

여기가 아프리카라고 느껴지던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거예요.

구글맵에서 현재 위치를 새로고침 해보지 않은 이상

여긴 그냥 유럽었어요.

실제, 개를 산책시키러 나온 가정 도우미 분들 말고는 이 길에서 흑인을 본 적이 없고

아시아인을 본 것도 두세 번이 전부입니다.

이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주욱 더 내려가면

유럽인들이 은퇴 후 정착하고 싶어 한다는 '더 비싼' 동네들이 이어진답니다.


저는 세 번의 방학 동안 세 번 모두 케이프타운에 갔어요.

첫 번째는 구경삼아 갔고,

두 번째는 그리워 갔고,

세 번째는 마지막이라 아쉬워서 갔어요.


저는 여권에 이미 도장을 받아본 나라에 또 가는 걸 기피하는데

여긴 무슨 연유로 이리도 특별한 예외가 되었던 걸까요.

가본 도시를 가고 또 가다니요!

심지어 갈 때마다 같은 동네에서 지내고, 같은 숙소를 선택하다니요!

이쯤 되면 고향 아닌가요?

적어도 남아프리카에 살던 시절엔 거기가 제 마음 둘 곳이었던 것 같네요.


"살고 싶을 만큼 이 동네 너무 좋아요"

"그 정도는 아닌데요? 집 앞도 맘대로 못 돌아다니잖아요"


케이프타운 모처들을 동행했던 이에게 이 도시의 인상을 물었더니 저와 다른 게 아니겠어요?

처음엔 확 반감이 들었는데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더라고요.

안전하단 곳만 다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무탈했지만

제가 모든 활동을 낮에만 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상기되더군요.

해가 지면 지도의 색깔 구분도 무의미하거든요.

나중에 돈 벌어서 저 바닷가에 집을 사고 싶다는 바람은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했지만

그런 미래를 동경하는 마음까지도 어마무시한 파도소리에 실려 점점 사라져 가던걸요.


물에 대한 갈급함에서 시작된 나의 욕구 불만족은

도시 생활, 문화와 예술, 풍요로운 자연을 갈망하는 나의 욕구를 수면 위로 드러내

나로 하여금 이를 똑똑히 자각하게 했요.

그리고 이것들이 여기서 한꺼번에 충족되면서

나의 감성과 이성은 서로 의기투합하여

그 모든 것들에 파스텔톤 필터를 씌워버렸죠.

그러니 다 좋을 수밖에요.


욕구는 적절히 충족시키며 살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예기치 못한 강렬함에 시달릴 우려가 높으니까요.

참고 참다 부메랑으로 돌아오면 그 기회비용을 다 어떡하려고요.


한 도시 한 달 살기가 붐이던 때가 있었는데

거기에 있었던 날들을 세어보니 딱 한 달이네요.

네, 저는 남아공 케이프타운 씨포인트에서 그 꿈을 이뤘습니다.


거기 참 마음에 들었어요.

넘치도록 행복했거든요.

이젠 거기에 더 안 가도 될 것 같아요.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후 한국에서 충분히 편리하고 평화롭게 누리는 중이거든요.

새로운 정신적 채움이 서서히 필요해지고 있는데

그 한계치에 도달하기 전에 어서 이 코로나가 어떻게 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 목마름에 지치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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