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여도 혼자이지 않았습니다

고마웠던 사람들

by 다온

2019년은 보츠와나로의 교사 파견 3년 차를 맞은 해였고, 파견된 인원은 초등교사 7명, 중등교사 6명으로 총 13명이었다. 우리는 보츠와나의 각 지역으로 초등교사 1명과 중등교사 1명이 짝을 이루어 파견되었고 수도권에는 1명씩 파견되었다. 파견지를 북쪽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내려오면서 나열해 보자면 카사네(Kasane), 마운(Maun), 간지(Ghanzi), 깡(Kang), 카니에(Kanye), 몰레뽈롤레(Molepolole), 가보로네(Gaborone), 모추디(Mochudi)였고 마지막 세 지역이 수도권에 해당했다. 같은 ODA 사업을 수행하지만 현지 생활에 있어 우리가 코이카와 가장 다른 점은 한국에서 파견되는 관리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각자의 발령지에서 각개전투를 하는 것이었다. 파견기관인 국립국제교육원은 현지 사정에 대해서 전혀 몰랐고, 각 지역별로 담당자들이 있는데 보츠와나를 담당하는 사람은 무슨 이유인지 몇 달에 한 번씩 교체되었다. 파견 기관과의 의사소통은 전적으로 이메일로 하는데 분기별 파견 보고서 제출 외에는 교류할 일도 거의 없고 그것도 담당부서가 따로 있기 때문에 사실상 보츠와나 담당자와는 메일을 주고받을 일이 더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잦은 교체가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업무 인계의 착오인지 몰라도 몇 번 불편함을 느끼긴 했지만 말이다.


파견 기관은 대신, 보츠와나 교민 중 관리 요원이라 하여 북부에 한 명, 남부에 한 명을 섭외해 파견 교사들이 현지 생활에서 도움받을 수 있도록 했다. 두 분 다 크게 사업을 하시는 사장님들로 보츠와나에서 영향력이 있는 분들이셨다. 우리는 각 지역별로 학기당 한 번 정도 모임을 했고, 나는 남부지역이라 여기에 속한 깡, 몰레뽈롤레, 가보로네, 모추디에 사는 동료들은 최소 두 번은 만날 수 있었다. 북부의 교사들은 9월 4일에 수도에서 열린 교육부와의 파견 성과 보고회에서야 재회를 하게 되었다. 같은 지역에 파견된 선생님과는 간간이 만날 일이 있고, 수도에 사시는 선생님은 내가 댁에 자주 찾아가 속도 빠른 무제한 와이파이, 따뜻한 물, 세탁기 등 많은 신세를 졌지만 그 외 다른 동료들은 보츠와나에 일 년을 살면서 만나기 어려웠다. 교사들이 파견된 지역으로 서로 놀러 다니면 좋겠다 싶었지만 우선 거리가 너무 멀어서 학기 중 주말에 다녀올 수준이 아니었고, 관광지인 카사네와 마운 외에는 전국이 똑같은 사막 풍경이라 내 집 앞에서 맨날 보는 황무지와 부시를 굳이 열 시간을 차로 이동해서 볼 것도 아니었다. 방학 때는 각자 계획이 있으므로 같이 여행을 떠나지 않는 한 만남이 불가능했다.


나와 한국에서 같이 온 파견 동료들과는 보츠와나에서 어울릴 일이 거의 없었지만, 한인 교회를 통해 교민들을 알게 되면서 정도 나누고 유용한 정보도 얻으며 새로운 삶의 장이 열렸다. 늘 반겨 주시는 따스함과 더불어, 보츠와나에서 살 수 없는 고춧가루도 얻고 김치도 얻고 귀국할 때는 남아공 조벅 공항 라운지 이용 티켓도 얻었다. 특히 내가 아팠을 때 안방을 내어주시고 죽을 끓여주시고 응급실에 데려가 주시는 등 목사님 내외분께서 베풀어주신 것들을 잊을 수 없다. 아이폰을 고치러 들렀던 쇼핑몰에서 태극기가 붙어 있는 사진관을 우연히 보고 반가운 마음에 들어갔다가 처음 뵙게 된 한국인 사장님과의 만남도 따뜻하게 남아있다. 내 일상에는 한국인이 없었지만, 이처럼 손 내밀면 잡아줄 한국인이 그리 많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주어 참 다행이고 감사했다.


수도에서는 교민들이 도움의 손길을 주었다면, 우리 동네에서도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고마운 이웃들이 있었다. 먼저, 나를 집에 초대해준 유일한 보츠와나 사람인 루시(Lucy) 아주머니다. 교육청 회계 부서에서 일하시는데, 내가 발령지 카니에(Kanye)에 온 다음날인 토요일 오후에 집으로 초대해 저녁을 대접해 주셨다. 교장선생님 선에서 해결될 일이 아니면 나는 그보다 윗 기관에 계시는 루시 아주머니를 찾아갔고, 그분은 항상 나를 '오 마이 프렌드'하고 반기시며 심적으로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셨다.

20191021_170846.jpg

가장 친근한 이웃은 우리 집 대각선 방향에 사시는 제이콥 선생님(Mrs. Jacob)네 가족이었다. 작은 아들은 4학년이라 내 수업에 들어오고, 남편인 미스터 제이콥은 개인 스쿨버스를 운전하셔서 학교 앞에서 오가며 자주 뵙게 되어 가족 모두와 두루 친분이 쌓이게 되었다. 스쿨버스의 한 달 등하교 비용이 300 뿔라 (약 33000원)인데 이용하는 학생들이 많아 보였지만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는 못하다고 하셨다. 어떤 금요일에는 나도 이 차에 올라타 제이콥 선생님네 가족과 함께 학생들의 하굣길을 함께 하며 동네 멀리까지 나갔다 왔다. 나에겐 드라이브이자 공짜 동네 투어였고, 나는 음료와 과자로 소소하게 보답했다. 자동차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이라 내 차 배터리가 방전되었을 때 점프도 해주시고 자동차 용품점인 모토백(MOTOVAC)에도 데려가 주시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전화하라고 번호도 알려주신 그 친절을 오래 기억하겠다.


모토백에서 사 온 와이퍼는 앞집에 사시는 라롱아비 선생님(Ms.Lalongabi)의 남편과 택시 기사인 그의 친구가 함께 교체해 주셨다. 미스 라롱아비는 세 살 아들, 중학생 아들, 고등학생 딸이 있는데 부모를 잃은 자신의 유치원생 조카 4명도 다 데려와 키우고 있었다. '천사 같다'며 내가 감탄을 하자, 지금은 힘들어도 이 아이들이 크면 나중에 늙은 자신을 돌봐주지 않겠냐며 미소를 지었다. 시골 출신에 부모도 없고 도움을 받을 가족도 없어 가정 형편이 어렵다고 했지만, 마음만은 가장 뜨끈한 분 같았다. 1학기 때 결핵에 걸려 몇 달 동안 병가를 냈었는데 다행히 회복하여 학교로 돌아왔다.

2.8와이퍼교체.JPG 와이퍼를 교체하시는 중

긴 휴일을 수도에서 보내고 집에 돌아와 보니 항상 현관에서 나를 맞아주던 대걸레와 대빗자루가 사라졌길래 '내가 너무 오래 집을 비웠구나, 타이어 휠에 이어 두 번째로 도둑맞았구나'하고 기분 상해있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누가 노크를 하길래 나가보니 윗집 남자가 그 두 가지를 들고 있었다. 원숭이들이 가지고 놀다가 길가에 버리고 간 것을 주워놨다는 것이었다. 위치상으로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지만 남자이기도 하고 평소에 잘 마주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내 청소 도구를 챙겨준 건 내 위층에 사는 사람뿐이었다.


단종된지도 오래된 오리온 더브러 과자가 떠오른다. 초등학생 때 먹었던 것 같은데 왠지 그 맛도 뭐였는지 생각나는 것 같다. 더브러는 직사각형으로 가운데 선이 표시되어 있어 쌍쌍바처럼 나눠먹을 수 있게 생겼었다. '나도 90년대생이면 좋겠다'며 십 년을 되돌리고픈 마음도 있지만, 내가 배웠고 은혜 입었고 때론 베풀기도 했던 옛날의 정겨움이 그리울 때면 그것들을 공감할 수 있는 80년대생이라 좋다는 생각도 든다. 돌이켜보니 내 주변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마음을 나누어주었었다. 어차피 정해진 기간 뒤에 떠나갈 나에게 아무 대가도 없이, 바라는 바도 없이.


보츠와나에서의 매일은 혼자였지만, 나 혼자로 채워진 일 년이 아니었다. 나의 사색과 너의 등장과 우리의 추억이 담긴 시간이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너는 흥겨웠고 나는 노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