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실⑤ 감정을 꺼내는건 어려웠고, 감정을 접는건 더 아
"요즘 다온 씨를 제일 힘들게 하는 건 뭐예요?"
선생님의 질문에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말하고 싶은 건 많았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막막했고,
상담은 이제 두 번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부터 하나씩 꺼내기 시작해도
다 말하지 못하고 끝나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요즘, 감정들을 글로 쓰고 있다고.
"글을 써보니까 어때요?"
선생님의 물음에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좋은 것 같아요. 재미있다고 해야 하나...
너무 오래돼서 흐릿하게만 남아 있는 기억들이 많은데,
일단 생각나는 단어 조각이라도 하나씩 꺼내서
그걸 시작점 삼아 조금씩 이어가 보는 중이에요."
선생님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온 씨가 평소에 표현을 잘 안 하셔서…
그런 과정이 좀 어렵진 않으셨어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표현이 익숙하지 않다 보니까,
단어 하나 꺼내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걸 문장으로 만들고,
문장을 글로 옮기는 데 시간이 꽤 많이 걸리더라고요."
그래서 지난 일주일 동안은
거의 밤낮을 바꿔가며 글을 썼다.
말 그대로, 글에 붙들려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그런데도 완성된 글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써 내려가다가 멈추고,
또 시작했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다 보니
흐름이 끊긴 채로 남겨진 글들이 많았다.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당연해요.
표현을 거의 안 하다가 처음 시작하면
초반엔 원래 시간이 오래 걸리고,
쓰다가 멈추는 일도 자주 생기거든요.
그래도… 글 쓰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다고 하니,
그게 참 다행이네요."
선생님의 말이 끝나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지난 일주일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지난 일주일, 거의 글만 쓰며 보냈다.
밥은 하루 한 끼, 그것도 겨우 저녁 무렵에야 생각났다.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밤을 넘긴 지 오래였고
배고픔도, 휴식도, 나에게는 잠깐씩만 허락된 감각이었다.
그만큼 지금 꺼내지 않으면
이 감정들을 영영 꺼내지 못할 것 같았다.
글을 쓰는 게
어쩌면 나를 살리는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나는 말을 보탰다.
"그래서인지 이번 일주일은
유독 빠르게 지나간 것 같아요.
배고픈 것도 못 느낄 정도로요."
선생님은 살짝 놀란 듯이 웃으며 말했다.
"배고픈 것도 못 느낄 정도였어요?
그만큼 몰입하신 거네요."
"네."
"근데 사실 …"
나는 조금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오늘 상담 끝나면
글쓰기도 여기까지만 하려고 했어요."
선생님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되물었다.
"왜요? 다온 씨가 마음만 먹으면
8월까지는 조금 버틸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맞아요.
글쓰기를 하면서 제 감정들을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이
저한테 꼭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실제로 좋아졌다고 느끼기도 했고요.
근데…
자꾸 현실이 마음에 걸려요.
취업 준비를 더 미뤄도 되나 싶고,
지금 이게 괜찮은 건가 싶고…"
그 말은 진심이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이 나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그런데도, 현실은 늘 더 급했고
불안은 그걸 자꾸 밀어냈다.
그럴수록 마음은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선생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나약해서가 아니에요.
다온 씨는 트라우마도 있었고,
그전부터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 견뎌오셨어요.
지금 글쓰기가 도움이 되고 있다면,
그 시간을 조금 더 가져도 괜찮아요."
선생님의 말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현실이 불안해서요."
말은 그렇게 흘러나왔다.
사실 그 순간,
내 안에서는 이미
감정이와 이성이 조용히 싸우고 있었다.
마음은 분명 감정이 쪽이었다.
"글을 더 쓰고 싶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그게 진심이었다.
그런데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결국, 현실 쪽에 더 가까운
이성이의 말이었다.
감정이가 조심스럽게 마음을 꺼내면,
이성이가 그 위에
현실의 무게를 꾹, 눌러 얹고 있었다.
대화는 몇 번이고 반복됐다.
선생님은 "도움이 된다면 계속 써보세요"라고 말했고,
나는 "그래도 취업 준비는 해야 하니까요"라고 되풀이했다.
결국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그럼, 일단 병행하세요.
취업 준비도 조금씩 하면서,
어차피 글쓰기가 좋으면 또 거기로 가게 돼요."
그제야 깨달았다.
오늘 이 대화 내내
감정이인 나의 말을
이성이가 끊임없이 눌러오고 있었단 걸.
선생님은 감정이었고,
나는 줄곧 이성이었다.
나는 또, 감정이인 나를
이성이가 말없이 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