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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승언 Sep 11. 2019

하나님은 왜 심판을 좋아하나요?


하나님은 꼭 누군가가 죽어야 죄를 용서한다고 얘기 하잖아요? 그냥 용서해 주면 안되나요? 꼭 누군가 심판을 받아야 하나요? 하나님은 왜 그렇게 심판을 좋아하세요? 인간의 잘못을 기다렸다가 벌하길 좋아하는 분 같이 보여요. 이는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하나님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 아닌가요? 


<밀양>이라는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었다. 이 영화는 죄와 용서의 문제를, 특히 기독교인의 용서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영화에서 여자주인공은 어린 딸이 흉악범에게 살해를 당하고, 살인범은 종신형을 구형 받아 감옥에 간다. 딸이 죽은 후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여주인공은 어렵게 살인범을 용서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살인범에게 면회를 가서 용서하기로 했다는 말을 힘들게 전한다. 그런데 살인범은 이미 자신은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게 되고, 이 말에 여주인공은 큰 충격과 분노에 휩싸이게 된다. 


우선 기억해야 할 점은 기독교가 말하는 죄는 이중적이라는 사실이다. 


누군가 예술작품을 의도적으로 손상시켰다고 가정해 보라. 이는 작품을 소유한 사람은 물론, 작품을 만든 작가 모두에 대한 모욕이다. 마찬가지로 범죄는 직접적 대상인 사람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범죄한 인간은 사람과 하나님 모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이 중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은 죄와 용서를 바라보는 바른 태도가 결코 아니다.

  

둘째로 죄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용서해 줄 수는 없다. 


<밀양>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살인자의 뻔뻔한 태도에 대해 분노했다. 그럼 왜 분노 했을까? 이런 분노의 이면에는 죄인을 무작정 용서하는 것에 대한 불쾌감이, 죄인은 죄값을 지불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의식이 잠재되어 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죄인을 그냥 용서해 주면 안되나요?"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불공정하게 누군가를 용서해서는 안된다는 의식이 인간 내면에는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어느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용서란 인간에게는 가장 명백한 의무지만, 하나님에게는 가장 심각한 문제다." 그럼 왜 용서가 하나님에게 문제일까? 죄인을 그냥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죄인을 아무런 대가지불 없이 용서하는 것은 자신이 정의롭지 않은 분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다. 그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길 원하신다. 하지만 대가지불 없이 죄를 용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직면한 딜레마다.

 

그럼 하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훼손하지 않고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을까? 결국 하나님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르게 하셨다. 죄인인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을 무죄하신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이다. 이를 통해 용서와 구원의 길을 열어 놓았다. 인간이 죄를 지었지만, 죄의 대가는 하나님이 대신 받기로 결정하고 십자가를 선택하신 것이다.

 

선물의 가치는 그것을 주는 사람이 얼마나 큰 비용을 치렀느냐와, 받는 자가 얼마나 그 선물에 합당한가 두 가지 측면에서 평가된다. 사랑에 빠진 청년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비싼 선물을 준다. 이는 그 여성이 선물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하셨다. 그만큼 큰 비용을 치르신 것이다. 그럼 인간은 이런 선물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을까? 성경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고 말한다. 자신을 외면하고 조롱하고 대적하는 인간을 위해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아낌없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놀라운 것도 이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은 외면하고 조롱하며 등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로 죄에 대한 심판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만히 있어야 할까? 작가인 베키 피퍼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이가 슬기롭지 못한 행동과 관계들로 참담하게 망가져 가는 것을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지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진노는 자신의 전부를 던져 사랑한 인간의 내면을 갉아먹는 암덩어리에 대한 확고한 반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감상적인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다. 그래서 죄와 악으로부터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분노하는 것이다.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다.

 

물론 사랑과 분노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죄와 악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폭력적인지 직접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70~80년대 유명한 연예인이었던 이주일씨의 일화다. 이주일 씨가 운영하던 술집 앞에서 경찰들이 자주 음주운전 단속을 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음주운전 단속을 하다보니 손님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주일 씨는 왜 쓸데없이 음주단속을 하느냐고 투덜거리며 원망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28살 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음주운전 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그 후 그가 절규하듯 던진 말이 "우리 아들이 죽던 날 음주단속을 하던 경찰들은 어디 있었냐"는 것이었다.

  

넷째로 공의의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 사회를 더욱 선하게 만드는 동기가 된다. 


공산주의 혁명가인 마르크스는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불렀다. 그 배경에는 내세에 대한 약속은 가난한 노동자 계급으로 하여금 현세의 부당한 사회적 조건들을 참고 견디게 만든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럴까? 하나님의 존재가, 내세에 대한 약속이 세상을 악하게 만들까? 그렇지 않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누가 더 죄를 멀리할까?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면 반드시 열매가 맺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 중 누가 더 사랑을 실천하게 될까?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죄악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정의를 이루기 위해 더욱 노력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진정한 아편은 "한 번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일 지 모른다. 왜냐하면 죄악에 대한 어떤 심판도 없을 것이라는 위안은 우리 사회를 더욱 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심판과 보복을 좋아하는 분으로 오해한다. 만약 하나님이 심판과 보복을 좋아하셨다면, 범죄한 인간을 당장이라도 벌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인간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게 하셨다. 인간을 대신해서 심판받고 죄값을 치르신 것이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_ 로마서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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