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승언 Sep 10. 2019

의학드라마를 통해 본 열정

요즘 의학드라마가 한창 인기다. 그 동안 여러 드라마에서 의사들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의사들의 삶이나 의료행위에 대해 자세히 다룬 의학드라마는 흔하지 않았다. 미국의 경우, <닥터하우스>, <그레이아나토미>, <CSI 시리즈> 등 전문직에 대해 다루는 드라마가 보편적인 장르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아직 우리나라 드라마의 경우 남녀간의 애정 문제나 다른 주제들로 인해 원래 취지가 희석되는 경우가 많지만, 앞으로 전문적인 내용들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점점 많아질 것은 분명하다. 

오래 전에 본 의학드라마 중 <외과의사 봉달희>가 있었다. 초보의사의 성장기를 다루었던 이 드라마는 여러 실수와 어려움 속에서 진정한 의사로 거듭나는 과정을 비교적 잘 그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에피소드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전문의 VS 전공의 

이 드라마에서는 1차 항암치료까지 받은 어린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환자의 경우, 다른 문제로 인해 항암치료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였다. 게다가 2차 항암치료를 받아 회복될 확률은 20%밖에 되지 않았고, 오히려 항암치료를 받다가 죽을 확률은 50%에 가까웠다. 따라서 더 이상의 항암치료를 받는 것보다는 그냥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이 환자에게는 바람직해 보였다.   

그런데 1년차 전공의의 권유와 환자의 의지, 그리고 담당전문의의 허락으로 2차 항암치료를 실시하게 되지만, 환자가 치료의 부작용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망자 컨퍼런스에서 담당의사는 자신이 그런 선택을 했던 이유는 1년차 전공의의 모습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자신도 전공의 시절, 환자 한 명 한 명의 생명을 귀히 여기고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그들을 고치기 위해 어떤 모험도 불사할 용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러한 마음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전공의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전공의 시절 가졌던 열정이 생각나서 어려운 줄 알면서 시도해 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환자의 목숨을 담보로 열정만 가지고 덤빈 꼴이 되어 버렸다고, 순간 자신이 냉정한 판단을 해야만 하는 전문의라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말했다.

이 의사의 말에 공감이 많이 되었다. 한 때 나도 거칠것없는 열정으로 앞만 보고 달리던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 가졌던 열정이 종종 그리워지곤 한다. 특히 오늘과 같이 비오는 날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세월을 통해 열정만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음을 배웠고, 이제는 현실이라는 벽 앞에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살지 모른다. 물론 열정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순 없지만, 열정 없이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진 않을까. 현실에 대한 냉정한 판단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 시절 가졌던 열정을 회복할 순 없을까. "전공의의 열정을 가진 전문의", "전문의의 냉정함을 가진 전공의"가 되는 것은 너무나 큰 기대일까.

 

죽인 사람 VS 살린 사람 

이 드라마에서 다루고 있는 또 다른 에피소드 중 하나는 실수로 환자를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한 1년차 전공의의 이야기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여러 가지 일을 하느라 피곤에 젖어있던 이 의사는 실수로 자신의 환자를 퇴원시키게 된다. 그런데 이 환자가 몇 시간 후에 다시 병원으로 실려왔는데, 잘못된 퇴원조치로 인해 소장을 다 제거해야 하고 생명까지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자책감과 더불어 앞으로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들로 인해 두려움에 빠져있던 이 의사에게 선배의사가 찾아온다. 외과의사치고 자신의 실수로 귀한 생명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전제한 후, 자신의 친구 의사 이야기를 들려 준다. 그 친구 의사는 저녁에 잠만 자려고 하면 이 때까지 자신이 죽인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고 한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살린 사람의 이름을 떠올려 보라고 권면했지만, 이상하게 살린 사람의 얼굴은 안 떠오르더라는 것이다. 이 선배의사는 친구의사의 이야기를 하면서, 나중에 정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자신에게 맡겨진 환자 한 명 한 명을 전심으로 대하고 살리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을 남긴다. 

나 역시 참 실수가 많은 사람이다. 그로 인해 누군가에게 상처도 주고, 내 자신에게 실망도 하고, 일도 많이 망쳐보았다. 물론 잘한 일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실수를 후회한다고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도 배웠다. 하지만 때로는 실수에 너무 둔감해진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도 된다. 아파한다고 상처가 낫지도 않지만, 아파하지 않으면 상처가 보이지도 않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눈을 감으면 자신이 죽인 사람들이 떠오른다는 순수함이 내게 남아 있을까. 언젠가 후회하지 않기 위해 힘들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야겠다는 의지가 내게도 있을까. 어쩌면 순수함도 원숙함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영화 <관상>, 존재와 시선을 생각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