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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승언 Nov 21. 2019

하나님은 왜 악을 만드셨나요?

이 글은 기독교인과 기독교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분들을 위해 쓴 글입니다. 읽기 전에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세상 모든 것을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잖아요. 그러면 결국 악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 아닌가요? 만약 악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면, 결국 하나님도 악하신 분인 것 아닌가요? 악으로 인해 인류사회가 당하고 있는 고통을 보세요. 하나님은 도대체 왜 악을 만드신 것이죠.


기독교는 하나님을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믿습니다. 모든 작품은 작가의 생각과 성품을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반영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하나님이 악한 분이라서 악을 만드신 것일까요? 


첫째로 악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것입니다. 


어둠이란 무엇일까요? 뉴튼의 프리즘을 이용하면 흰 불빛을 여러 가지 색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각 빛깔의 다양한 파장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둠은 측정할 수 없는 방법은 없습니다. 즉 어둠이란 빛이 없는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우리는 추위를 느낍니다. 그럼 추위란 무엇일까요? 열은 측정이 가능하지만, 추위는 측정이 불가능합니다. 온도의 최저점인 절대 0도(섭씨 -2730도)는 열이 완전히 부재한 상태, 즉 어떤 에너지도 전달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추위 역시 열이 부재한 상태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서로에 대한 미움, 부당하게 행해지는 폭력, 탐심이 만들어낸 독점, 권력욕이 낳은 억압 등. 따라서 악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어둠과 추위가 빛과 열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처럼, 악도 결국에는 선이 없는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실 때 선이 가득한 세상으로 지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서,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인간은 선의 부재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악이란 선의 부재로 인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악이란 선의 부재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부재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 자체이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선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즉 악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서 선의 부재인 악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악이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 없는 인간사회의 현실은 어떨까요? 일본의 한 원로 철학자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프랑스에 가서 전쟁의 비극을 목격한 뒤에,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인류에게 희망이 있다고, 즉 평화가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그러자 베르그송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인류가 구원하지 못하면 구원받을 길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을 겪고 보니 인간은 이보다도 더 무서운 비극과 파멸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제3자, 인류보다 더 높은 존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받아들이지 앟으면 인류에겐 희망이 없습니다."


둘째로 악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또다른 문제는 하나님이 왜 인간을 악을 행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냐는 의문입니다. 


애초에 인간을 악을 행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드셨다면, 인간이 악을 범하지 않았으리라는 주장입니다. 결국 인간이 범하는 악의 원인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에게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보였던 반응과 같습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자신의 행위의 배경에는 하와와 하와를 주신 하나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다양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중에는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성품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전능한 분입니다. 또한 과거와 현재, 미래에 일어나는 모든 일과 보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까지 다 아시는 전지한 분입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데, 왜 수많은 비극들을 막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지만 모든 일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성품과 어긋나는 일은 행하실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악과 거짓을 행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거짓을 말하거나 공정하지 않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요? 만약 하나님이 자기멋대로이며 아무 일이든지 맘대로 행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이 세상은 무질서와 무질서가 낳은 고통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함은 하나님의 선함을 전제했을 때만 참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감옥에 보냅니다. 감옥이란 사회와 격리된 공간을 말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감옥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곳입니다. 감옥에서 잘못을 하면 독방에 가둡니다. 더 많은 자유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그만큼 인간에게 소중한 가치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해서 될까요? 강제로 자기 말만 듣고 행하도록 만들어도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오해 때문입니다. 그럼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으면서 인간을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가능할까요? 그것은 마치 휘어지지 않는 선으로 원을 만드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셋째로 그렇다면 인간은 왜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자기중심성 때문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도록 지음받았습니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과 다른 사람보다 앞 자리에 두고자 했습니다. 순서를 바꾼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고 악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성은 악의 본질적인 특성이기도 합니다. 전쟁, 폭력, 기아 등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과 악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들의 이면을 살펴보십시오. 그 이면에는 자기중심성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인간이 진심으로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사랑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악과 고통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죄인에 대한 정의로 "자기 자신을 향해 굽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선호했던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악이란 자아를 위한 마음이며, 선이란 자아로부터의 자유라고 명명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인간은 말콤 머거리지의 표현처럼 "작고 어두운 감옥같은 내 자아"에 갇혀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로마의 간수가 바울에게 던졌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행 16:31)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로 돌아가 하나님이 주는 선의 충만함 가운데 거할 때, 우리는 악을 더 이상 경험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_ 애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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