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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승언 Dec 07. 2019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지옥에 보내는 신이 어디 있나요?

이 글은 기독교인과 기독교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분들을 위해 쓴 글입니다. 읽기 전에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잖아요. 어떻게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지옥에 보내나요? 그건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닌가요? 그런 신이라면 존재한다고 해도 믿고 싶지 않네요. 그리고 자신을 믿든 그렇지 않든 구원해 주시면 안되나요?


"예수 천국, 불신 지옥"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 되심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벌하기 위해 지옥에 보내는 분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 것일까요?


성경에는 탕자의 비유라고 알려진 이야기 하나가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것입니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찾아와서 유산을 물려달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유산상속은 아버지의 사후에 이루어졌으며, 살았을 때 유산상속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무례하고 모욕적인 요구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고, 결국 아들은 물려받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나게 됩니다. 


먼 나라로 떠난 아들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가지고 인생을 즐기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재산은 곧 탕진되었고 온갖 고생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홀로 살고자 했지만, 그 결과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들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길을 나섭니다. 아들을 떠난 뒤 마을 어귀에 나가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던 아버지는 아들을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의 모든 권리를 회복시켜 주고, 아들은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것을 누리게 됩니다.


탕자의 이야기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지내도록 지음받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지낼 때,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지내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위의 이야기의 둘째 아들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물론 둘째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직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산물을 누릴 수 있지만,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이야기에 거부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든 그렇지 않든 천국에 가도록 하면 안되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옥이란 어떤 곳일까요? 각자가 가진 지옥과 천국에 대한 이미지는 다를 것입니다. 막연히 좋은 곳과 나쁜 곳으로, 지루한 곳과 인간다운 곳으로, 기쁨이 넘치는 곳과 고통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다양한 이미지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거하는 곳,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곳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지옥이란 하나님이 없는 곳, 더이상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 없는 곳을 말합니다.


결국 지옥이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대로 하나님 없이 살도록 하는 곳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자신의 뜻대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무엇을 믿든지 천국에 가게 하면 안되냐고 묻지만, 하나님 없이 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도록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물론 사랑의 하나님과 지옥이라는 개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지옥을 선택하지 못하도록 막으면 안되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에게 원하지 않는 삶을 강요한다면 어떨까요? 원하지도 않는 사람과 영원토록 매여서 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지옥같은 삶"이라고 불평할 것입니다. 그럼 사랑의 하나님이 지옥같은 삶을 인간에게 강요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삶을 선택할 자유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인간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이들과 하나님이 끝내 '네 뜻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부류입니다. 지옥에 있는 이들은 어김없이 후자를 택한 쪽입니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는 지옥에 있을 리가 없습니다. 진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즐거움을 갈망하는 영혼은 절대로 그것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죄를 지으면 형벌로서 감옥에 보내는데, 감옥이란 사회로부터 격리된 곳을 말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죄에 대한 형벌의 본질은 분리에 있는 것입니다. 지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옥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분리입니다. 그런데 이는 형벌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지옥에서 경험하는 나머지 것들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분리가 낳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없이 살기를 원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스스로 가장 큰 형벌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어두운 방에서 오랫동안 생활해 왔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어느 날 창문 너머로 햇빛이 비추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어두움이 좋다면 여전히 방안에서 창문을 닫고 햇빛을 등진 채 지낼 것입니다. 반대로 빛이 좋다면, 문을 열고 햇빛을 향해 밖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햇빛을 향한 태도가 빛과 어둠 중 무엇을 원하는지 기준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태도는 우리가 선을 원하는지, 악을 원하는지 보여주는 기준이 됩니다. 만약 선을 진심으로 원한다면, 참된 선이신 하나님을 향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선을 원하지 않는다면, 참된 선이신 하나님을 외면한 채 지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향한 태도는 우리의 선악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탕자 이야기에는 숨겨진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탕자의 형이자 첫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은 집을 나갔던 탕자를 받아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버지에게 유산상속을 요구하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던 동생을 그냥 용서해 준 아버지에게 불만을 표출합니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반응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쁘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만큼 아버지의 사랑은 놀라운 것입니다.


탕자의 이야기처럼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로 돌아가 그분과 함께 살 것인지, 아니며 여전히 하나님 없이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다만 전제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라는 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무자비한 분이었다면, 결코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에게서 떠난 인간을 받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비로운 우리의 아버지 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면, 그분은 따스하게 우리를 맞이해 주시고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_ 누가복음 15: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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