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핸드폰 암호설정을 위해 손가락 지문이 빈번히 사용된다. 타인과 지문이 같을 확률은 10억 분의 1로, 같은 지문을 가진 사람을 만날 확률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게다가 비밀번호처럼 잊어버릴 위험도 없고 신체의 일부를 활용하다는 점에서 편의성도 갖췄다. 이런 점에서 지문은 개인을 식별하는 탁월한 수단이 된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될 때가 있다. 이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위해 곳곳에 자신의 지문을 남겨 두셨다. 이 지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
우주적 지문
20세기 초반까지 해도 영원한 우주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영원 전부터 존재해 왔고, 앞으로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우주는 언제나 존재해 왔기 때문에, 우주가 창조되었다는 기독교의 주장은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우주에 시작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세계적인 물리학자이자 무신론자인 스티븐 호킹은 "이제는 누구나 다 믿다시피 하는 일이지만, 우주와 시간 자체가 빅뱅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빅뱅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수백억 년 전 아주 작은 한 점에서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밝은 에너지 섬광이 쏟아져 나오면서 시작되었다. 우주의 시작점이 있다는 사실은 그동안 영원한 우주를 지지해 왔던 무신론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물론 우주는 정기적으로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며, 여전히 영원한 우주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는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다. 다만 빅뱅이론은 우주의 시작점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만, 어떻게 우주가 시작되었는지는 여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무신론 사상가였던 칼 세이건은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빅뱅이 일어난 과정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폭발한 물질들은 어디서 온 거죠?" 프로그램 진행자자의 질문에 세이건은 "바로 그 부분이 과학의 한계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우연히 우주가 생겨났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우주를 창조한 것일까? 무엇을 믿는 것이 더 합리적일까?
예를 들어 아기는 부모라는 원인이 있어야 태어날 수 있다. 나무는 누군가 씨앗을 심거나 씨앗이 날아와야만 생길 수 있다. 자동차는 그것을 만든 사람이 있어야 한다. 시작점이 있는 모든 것에는 원인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시작점이 있는 우주 역시 저절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다른 원인에 의해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목적론적 지문
오늘날 우주 탐사가 한창 진행 중이며, 각종 별들을 탐사하면서 생명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행성에 생명이 존재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왜일까? 생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환경들이 조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목성의 경우 중력이 매우 강하다. 만약 인간이 목성에 가서 우주선 밖을 걸어 다닌다면, 아마도 팬케이크처럼 납작해져 버리고 말 것이다.
지구의 경우에도 공기 중 산소 농도가 6퍼센트만 떨어져도 인간은 질식해서 죽는다고 한다. 반대로 산소 농도가 4퍼센트만 올라가도 지구는 거대한 불덩이로 변해 우리 모두는 화염 속에서 죽게 될 것이다. 지구에서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것은 공기 중 적정량의 산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주학자들은 지구가 태양에 2퍼센트만 가까워져도 너무 뜨거워서 물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지구가 정확히 23.5도로 기울어 있지 않으면 온도가 너무 극단적이 되어 우리 모두는 죽게 된다.
이는 우주도 마찬가지다. 스티븐 호킹은 빅뱅이 일어난 직후 우주의 팽창 속도가 10의 19제곱분의 1만이라도 늦었다면, 우주는 불덩이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리학자인 로빈 콜린스 역시 이렇게 말한다. "우주에는 중력상수를 비롯해서 정확한 값을 가진 상수들이 15개나 작용한다. 이들 상수들 중 어느 하나가 백만 분의 일이라도 틀어지면 우리가 보는 우주는 사실상 존재할 수 없다. 물질은 융합되지 못하고 은하계와 별, 인간은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많은 요소들이 정교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밀하게 조정되어 있는 우주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연의 일치로 정밀한 우주가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설계하고 만든 것일까? 무엇이라고 믿는 것이 더 합리적일까? 물론 빅뱅으로 인해 수십 억 개의 우주가 생겨났는데 운 좋게 적합한 우주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 하지만 우주 내부에는 이런 것들을 조정할 힘이 있어. 이 내적 힘에 의해서 이렇게 만들어진 거야."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카드놀이를 하는데, 상대방이 에이스 네 장이 연속해서 12번이 나왔다고 가정해 보라. 상대방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속임수를 썼다고 생각할까? 당연히 후자가 아닐까! 천문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앨런 샌디지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휠씬 복잡하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알려준 것이 바로 과학이었다. 나는 초자연적인 것을 통해서만 존재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과학혁명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아이작 뉴턴도 "다른 증거가 없더라도, 엄지손가락 하나만 가지고도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너무나 정교한 우주와 인간은 누군가의 설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적 지문
우리 안에는 옳고 그름에 대한 나름의 기준이 있다. 이는 단순히 특정 시대, 특정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이 아니다. 지구 상의 모든 인간 문화 속에서 이런 도적적 기준을 발견할 수 있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전장에서 도망쳤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찬양 받는 나라가 있다고 상상해 보라. 아니면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모든 사람들을 감쪽같이 배신한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나라가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런 나라보다는 차라리 둘 더하기 둘이 다섯이 되는 나라를 상상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전쟁터에서 도망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살고 싶다는 자연스러운 본능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본능이 잘못되고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이는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특징이기도 하다. 쥐를 잔인하게 죽인 후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아야지."라며 후회하는 고양이를 본 적이 없을 것이다.즉 모든 인간에게는 본능과 무관한 옳고 그름에 대한 개념이 실재한다. 그렇다면 이런 개념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독일 나치의 지도자였던 아돌프 히틀러는 이런 주장을 펼쳤다. "만일 자연이 더 약한 개체들이 더 강한 개체들과 짝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우월한 한 민족이 열등한 한 민족과 뒤섞이는 것은 더더욱 원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뒤섞이게 되면 수십만 년에 걸친, 고등 단계로 진화된 존재를 형성시키려는 자연의 모든 수고가 허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강한 자와 최고만이 승리하며 생존할 권리가 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싸워야 한다. 영원한 투쟁이 생존의 법칙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 세계에서 싸우기를 바라지 않는 자는 존재할 권리가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진화론은 적자생존의 원리에 기반한다. 자연세계가 끊임없는 생존 경쟁의 결과 환경에 적응한 강한 개체는 생존하고 그렇지 못한 개체는 도태되고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진화론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과 파멸, 고통과 좌절, 약육강식과 같은 약자에 대한 강자의 폭력은 당연한 것이다. 히틀러가 주장한 내용도 이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일까? 왜 우리는 히틀러보다는 테레사 수녀를 더 존경하는 것일까?
무신론자들의 주장처럼 오직 물질만이 존재한다면, 도덕의 개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도덕의 개념이 담겨진 물질이 과연 있을까? 만약 물질이 선과 악의 원인이 된다면, 히틀러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이유가 그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나쁜 화학물질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생존과 진보라는 본능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면, 인간은 왜 자살을 비롯하여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행하는 것일까? 영국의 저널리스트 A. N. 윌슨은 이렇게 말한다. "무신론은 (우연히 발생한 화학물질의 움직이는 덩어리, 곧 당신과 내게) 어떻게 사랑이나 영웅적 행동, 시적 표현의 능력이 있는지에 답해 주지 못한다." 우리에게 옭고 그름에 대한 관념이 있는 것은 도덕관념이 있는 누군가를 닮았기 때문은 아닐까?
갈망의 지문
애플의 공동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말한다. "가끔 하나님의 존재가 믿겨 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해요. 50 대 50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암에 걸린 뒤로 더 많이 생각하게 되네요. 그리고 좀 더 믿어져요. 아무래도 내세를 믿고 싶기 때문인 것 같아요. 죽으면 존재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네요. 우리가 쌓은 지혜가 어떤 식으로든 살아 남았으면 좋겠어요."
우리에게는 잡스가 가졌던 영원에 대한 갈망이 있다. 우리의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 안에 이런 갈망이 있을까?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아기가 굶주림을 느낀다. 그것은 음식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새끼 오리는 헤엄치기를 원한다. 그것은 물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영원에 대한 갈망과 죽음 너머에도 삶이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는 것은 실제로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일 지 모른다.
하나님이 남겨놓은 많은 지문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이것들은 지문이다. 지문만으로는 우리는 확신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우주의 시작점은 있지만 여전히 우연히 시작되었다고 믿을 수도 있고, 우주가 아름답고 정교하게 설게 되었지만 이는 자연 내부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한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또한 도덕 본능을 관장하는 세포가 있거나 다른 동물들에 비해 유독 발달된 뇌의 산물로 도덕 개념이 생겼다고 믿을 수도 있다. 영원에 대한 갈망 역시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만들어 낸 허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무엇을 믿을 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다만 우리에게 선택을 도와주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으로 인도해 줄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예수님에 대해 배워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_ 롬 1: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