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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승언 Sep 09. 2019

하나님은 선하신데, 왜 고통이 존재하나요?



하나님은 악을 없애고 싶어도 능력이 없거나, 능력은 있어도 그럴 마음이 없거나, 능력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거나 셋 중 하나일 것이다. 원하는데 능력이 없다면 그는 무능하다. 능력은 있는데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악하다. 하나님이 능력도 있고 악을 없앨 마음도 있다면 이 세상에 악이 존재했겠는가? 
_ 에피크루스, 그리스 철학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악과 고통의 존재를 꼽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인간이 고통 당하는 것을 왜 보고만 있느냐는 것이다.. 분명 악과 고통은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만큼 악과 고통은 파괴적이며, 개인과 사회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이자,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다. 그럼 악과 고통의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거나, 하나님이 존재하셔도 선하지 않거나 전능하지 않기 때문일까?


첫째로 악과 고통의 문제는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로 우리를 인도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믿는 진화론은 적자생존과 자연도태에 기초를 두고 있다. 자연세계가 끊임없는 생존 경쟁의 결과, 환경에 적응하는 개체는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면 도태되어 멸망해 왔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진화론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과 파멸, 고통과 좌절, 약육강식과 같은 약자에 대한 강자의 폭력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달리 말하면 고통은 세상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유독 인간은 악과 고통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것일까? 왜 인간만은 고통을 당하거나 소외되거나 굶어 죽거나 억압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결국 악과 고통에 회의를 품는 것은 자연세계를 지배하는 원리를 벗어난 질서(혹은 존재)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신론적 세계관과 종교들에서는 악과 고통의 원인을 다양한 신들의 존재와 이들 사이의 갈등에서 찾는다. 신들 중의 일부는 항상 악하고 대부분의 신들은 때때로 악하기 때문에, 이 땅에 악과 고통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힌두교나 불교와 같은 일원론적 세계관과 종교들에서는 모든 실재가 궁극적으로 하나라고 본다. 물질적인 세상과 영적인 세상, 창조주와 피조물, 선과 악, 기쁨과 고통 역시 구별되지 않는다. 즉 악과 고통은 궁극적으로 하나인 세상의 일부분일 뿐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계관과 종교에서는 악과 고통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결국 악과 고통에 대한 회의는 전능하고 선하신 신적 존재를 전제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둘째로 악과 고통은 파괴적이지만, 무의미하지는 않다.


비록 힘들었지만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이 땅을 사는데 꼭 필요한 것들을 배웠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많다. 비극적인 일 자체를 고마워하지는 않지만, 이를 통해 얻은 통찰과 성품, 용기는 소중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생의 가장 소중한 지혜는 고통의 시간들을 통해 얻은 것일지 모른다. 따라서 당장은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도 선한 뜻과 계획을 가지고 악과 고통을 임시로 허락하실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부모는 누구나 자녀를 사랑한다. 어린 자녀를 둔 부모는 자녀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자녀가 성장하면 밖에 나가서 놀도록 허락한다. 물론 아이는 밖에서 놀다가 다칠 수도 있다. 하지만 부모는 자녀가 스스로 돌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자녀가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질까봐 자전거를 배우지 못하게 한다면 어떨까? 부모는 자녀에게 자전거를 타는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는 넘어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는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허락하는 것이다.


 작가이자 삶이 영화화되기도 한 조니 에릭슨 타다는 17살 때 해변에서 다이빙을 하다가 목뼈가 부러지는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 사고로 평생을 전신마비로 살아가야만 했다. 훗날 기자가 "돌아갈 수만 있다면 사고 이전으로 돌아가겠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아니요. 그 사건으로 인해 내 인생의 많은 것을 잃어버렸지만, 동시에 그 날의 사고가 없었다면 결코 누릴 수 없는 것들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밀폐된 방에서 오로지 램프에만 의지해서 사는 사람을 만났다고 합시다. 만일 그에게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하고 싶다면, 그의 램프를 끄고 창문을 열어 햇빛이 들도록 할 것입니다." 램프가 꺼지는 아픔을 경험했지만, 이로 인해서 햇빛이 주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는 고백이다.


셋째로 하나님은 악과 고통 가운데 계신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했다. 인간이 처한 비참한 현실에 뛰어들어 극심한 고통을 직접 경험한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은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 준다.


"고통의 가치는 알겠어요. 하지만 고통 당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라고 항변할 수 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무엇일까? 그것은 "안다."다. 십자가 위에서 직접 경험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지 안다. 심지어 예수님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쳤다. 비를 맞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비를 피할 우산일까? 물론 우산도 필요하다. 하지만 비를 맞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어쩌면 함께 비를 맞아주는 사람일지 모른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인 니체는 "십자가 위의 하나님"이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당하는, 십자가 위에서 고뇌하고 번민하는 그런 나약한 신이 어디 있냐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고통과 무관한 신을 경배할 수 있을까?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아름다운 자태로 온화한 미소를 띄우며 이 세상 모든 것을 초월해 있는 분이 아니다. 십자가 위에 매달려 외로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분이다. 인간이 당하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살과 피, 눈물과 죽음이 흘러내리는 인간의 세상에 들어오셔서 함께 고통을 당하는 분이다.


불의의 사고 후 상심이 컸던 조니는 결국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스스로 죽을 수조차 없었다. 결국 친구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하자,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조니, 예수님은 너의 심정을 알아. 너는 혼자가 아니야. 왜냐하면 그분도 너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때가 있었거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생각해 봐. 예수님은 채찍을 맞으셔서 등에도 상처가 계셨어. 예수님은 자세를 바꾸거나 편하게 하고 싶었어. 그러나 그러지 못했어. 십자가에 못박혀 계셨거든." 조니는 그 순간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시간이 되었다고 회상한다.


알베르 카뮈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자 인간이었던 분도 고난을 견뎌냈습니다. 고통과 죽음을 당했기에 악과 죽음을 두고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골고다의 그 밤은 인간사에 너무나 중요합니다. 신성을 가진 이가 어둠 속에서 자신이 가진 특권을 포기하고 절망과 죽음의 고통을 끝까지 견뎌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뇌에 잠긴 그리스도의 "라마 사박다니!"라는 외침과 끔찍한 회의는 그렇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넷째로 하나님은 악과 고통을 영원히 없앨 것이다.


고통을 당하는 이에게 기독교는 십자가의 죽음과 더불어 부활의 소망을 제공한다. 병에 걸렸다고 가정해 보라. 완치가 가능한 병과 그렇지 못한 병에 걸린 사람은 병을 바라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병이 나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더욱 열심히 병과 싸우게 된다. 예수님이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반드시 이 땅의 모든 악과 고통을 없앨 것이라고 약속한다(죽음마저도 이기신 분이 없애지 못할 고통은 없다). 그리고 더 이상 고통과 아픔, 슬픔과 눈물이 없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이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고통과 맞서 싸우며, 어떤 상황에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진화론에서 고통을 진화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본다. 따라서 파멸과 죽음, 고통과 아픔은 진화가 계속되는 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진화가 고도로 이루어지고 인간사회가 발달하면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는 낙관론이 제기 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이런 낙관론에는 근본적인 회의가 일어났다. 인간이 개발한 최첨단 과학기술이 오히려 인간에게 엄청난 고통과 파멸을 가져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신론적 세계관과 종교들에서도 다양한 신의 존재 자체가 악과 고통의 원인이다. 따라서 다양한 신이 존재하는 한 고통은 계속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악한 신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 한 고통은 지속되게 된다. 일원론적 세계관 역시 선과 악, 고통과 기쁨이 궁극적으로 하나이기에, 고통은 착각일 뿐이라고 본다. 결국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 반면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고통이라는 실재를 완전히 없애실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고 있다.


조니는 자신이 가진 소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불구가 된 이 몸 어딘가에는 앞으로 내가 변화될 모습을 담은 씨앗이 숨어 있습니다. 근육위축증으로 쓸모 없어진 다리를 찬란하게 부활한 몸에 있을 다리와 비교해 보십시오. 현재의 마비상태는 변화될 나를 더욱 멋진 존재로 부각시켜 줄 것입니다. 내가 거울을 통해 보는 모습은 틀림없는 조니일 것입니다. 휠씬 더 좋아 보이고, 밝은 모습이겠죠. 지금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모습일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형상을 그대로 지닌,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일 것입니다” 이 소망이 있기에 그녀는 낙심하지 않고 고통 가운데 고통을 이겨내며 고통과 더불어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현실이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기다릴 수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다만 하나님 역시 그 날을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원하신다면 당장이라도 이 땅의 악과 고통을 없앨 수 있다. 그럼 왜 하나님은 악과 고통을 없애지 않으실까? 왜 무능하다는 오해와 사랑이 없다는 모욕을 당하고 계실까? 기독교작가인 폴 리틀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하나님이 당장 악을 완전히 없애 버리기 원하신다면,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거짓말이나 순결치 못함, 사랑 없음, 선을 행치 않음 등도 제거되어야 할 악에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만약 하나님이 오늘 자정에 우주에 있는 모든 악을 제거하기로 정하신다면, 우리 중 누가 오늘밤을 무사히 넘기고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이들이 죄와 악을 떠나 하나님에게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지금의 기다림의 시간들이 헛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고통을 두고 흔히들 '나중에 큰 복을 받으면 뭐해. 지금 이렇게 힘든데'라고 말하지. 일단 천국을 품으면 그게 뒤에서 작용해서 괴로움을 영광으로 바꾼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네.
_ C. S. 루이스, 캠브리지 대학 철학과 르네상스 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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