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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길벗 소로우 Oct 31. 2022

행복에 관한 아주 특별한 이야기


1.

나는 아내와 옆동네 큰 슈퍼에 장을 보러 갔다. 그날은 토요일 아침이었다. 슈퍼에 채소는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분무기로 뿌렸는지 모든 잎사귀들이 촉촉했다. 음료수 코너에는 색상별로 예쁜 병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슈퍼 복도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우아하게 끌차를 밀면서, 아내를 따라 이리저리 다녔다.

그 와중에 클래식 음악이 크게 흘러나왔다. 갑자기 다른 세상이 되었다. 나는 아이의 눈으로 색깔이 다른 음료수 병들을 쳐다 보고, 세상의 모든 야채가 있는 숲을 거닐었다. 아내가 이제 그만 나가자고 했을 때 나는 살짝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이 동네는 부자 동넨가 봐. 슈퍼에서 클래식을 틀어 주네."

아내는 답했다.

"그래. 진짜 부자 동네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동네보단 부자가 좀 많긴 하지."


토요일 아침, 남의 동네 슈퍼에서 클래식을 들으며 청과물을 사고, 나는 내가 쫌 부자스럽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2.

나는 이탈리아의 흐린 아침, 롬바르디아 지역 밀라노의 어느 호텔을 나섰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내비게이션 지도를 보며 회사의 밀라노 법인을 향해 걸었다. 밀라노 방문은 네 번째였지만, 시내를 제대로 걸어보지는 못했었다. 나는 길가에 많은 나무문들, 상점 안에 가구들을 쳐다보며 걸었다. ’저런 걸 마호가니라고 하겠지…‘20분 정도 지나, 사무실에 도착했다.

나는 다시 같은 길을 걸어서 퇴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벌써 기분이 좋았다.


3.

나는 ㅇㅇㅇㅇ역에 내렸다. 관악산으로 등산을 가시는 노, 장년층 분들이 많았다. 가지가지 색깔의 등산복들이 보였다. ㅇㅇㅇㅇ역은 학생들 이동이 많은 곳이라, 스터디 카페, 펜시점, 화장품점이 많았다. 나는 휴대폰으로, 사거리를 파노라마 모드로 찍었다. 서울의 어느 네거리에 퍽 오랜만에 온 사람 같았다.

사거리 풍경이 그리 아름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나 혼자 좋았다.

나는 구청 1층 화장실에서 옷매무새롤 고치고, 내 표정이 어떤가 살펴보았다. 그리고 두려운 맘으로 강당으로 들어갔다. 진로 문제로 고민하는 청년들과 학생들을 만나, 인사 담당자로서 해줄 수 있는 조언을 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력서도 봐주었다. 청년들은 고마워했다. 나는 청년들과 헤어지고, 근처 카페로 갔다. 그리곤 뜬금없이 4월의 인간과 나무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4.

이것들은 가장 행복했던 기억들을 적어보라는 어느 분의 말을 듣고, 내가 지난 몇 년 간 경험했던, 가장 행복했던 순간 세 개를 적어 본 것이다. 적고 보니, ’ 나는 정말 재미없는 인생을 살고 있구나 ‘라고 스스로 느껴졌다.

왜 이런 무미건조한 것들이 나의 행복한 기억 최상위권으로 부상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동안 더 다이내믹하고 짜릿한 순간, 남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거나, 재정적으로 득을 본 순간, 그런 극적인 순간도 있었지 않은가?


기억들을 다시 다 모아 순위 조정을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가족과 함께 야채를 사는 것, 기쁜 걸음으로 일터로 가서 같은 길로 되돌아오는 것, 그리고 부족하나마 나의 여력으로 약한 사람을 돕는 것.

이런 경험들만큼 묵직이, 넉넉히 이기지는 못한다.  


사실 나는 어떻게 하면, 이런 무미건조한 경험들을 앞으로 조금씩 더 늘일 수 있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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