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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Jun 27. 2024

뭔가를 진득이 만들어 본 적 있나요?

‘리틀 포레스트’에서 주인공 혜원이 봄꽃 파스타를 먹는 장면.출처: 메가박스플러스엠


최근에 가벼운 어지럼증이 찾아왔다. 눈앞의 초점이 흐려지면서 이내 전원이 꺼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증상이 일주일 간 계속됐다. 잠을 못 자서 그런가? 하고 그냥 넘겼는데, 휘청대면서 계산대에 옆구리를 부딪친 뒤에야 사안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요리와 서빙은 동작이 섬세해야 한다. 동선이 짧고 통로가 비좁기 때문에 살짝만 삐끗해도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어느 병원에 가지? 몇 년 전 이석증을 겪어서 고생한 직원이 생각났다. ‘나도 이석증이려나? 피곤하면 걸리는 질환이라는데’ 쉬는 날 바로 이비인후과로 찾아갔다. 혈압은 정상이었다. 의사 선생님 역시 이석증을 의심했다. 일주일 사이에 구토를 했거나 넘어진 경험 등을 물었다. "최근에 휘청이다가 계산대에 부딪쳤어요" "한 번?" "네, 한 번"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진료용 침상에 눕혔다.      


그리고 도수가 엄청 높은 렌즈가 달린 안경을 씌웠다. 머리카락이 고무밴드에 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순간 의사 선생님이 머리를 잡고 좌우로 흔들었다. “빙빙 돌지 않아요?” “토할 거 같지 않아요?”라고 물었다. 뭔 일인지 하나도 어지럽지 않았다. 왜 가만히 있으면 어지러운데, 어지럽게 만들 때는 어지럽지 않은가. “생각보다 괜찮은데요?”라고 답했다. 바로 진료가 끝났다. 어지럼증에 대한 이비인후과적 증상은 없다는 게 의사 선생님의 소견이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전공 외적인 부분이라 조심스럽긴 한데, 수분이 부족하고 잠이 부족하면 간혹 이럴 수 있어요. 물 많이 드시고, 푹 주무시고, 핸드폰 컴퓨터 좀 자제하시고. 그리고 시선이 안정돼야 어지럼증이 빨리 줄어요. 이래도 증상이 계속되면 정신건강의학과나 신경외과, 안과로 가 보세요.”   


병원을 나와 집에 가는 길, 나는 시선의 안정이라는 말에 꽂혔다. 일할 때면 수시로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가,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돌아선다. 그 와중에도 여기저기 할 일이 생긴다. 좌에서, 우에서, 주방에서, 주방 너머에서. 한가할 때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SNS 속 무한 스크롤의 세계에 빠져 눈을 굴린다. 어지럼증으로 병원에 가고 나서야 깨달았다. 정말 쉴 틈이 없었던 건 눈이었음을(다행히 지금은 괜찮다).              


그날 이후로 시선을 편하게 두고 싶다는 갈증이 생겼다. 이는 분명 몰입이나 집중, 또는 휴식과 결부돼 있으리라. 그러던 와중에 OTT 서비스로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봤다. 거기서 주인공 해원이 막걸리를 만드는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쌀밥에 누룩을 버무려 병 안에 넣고 발효시키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잔잔해졌다. 나도 뭔가 만들고 싶었다. 천천히, 차분히! 유통기한이 하루 지난 냉장고 속 우유가 생각났다. 인터넷에 치즈 만들기를 검색해 봤더니 한 시간 정도면 리코타 치즈를 만들 수 있단다.  



먼저 우유 500ml에 생크림 250ml(허겁지겁 마트에서 사 왔다)을 냄비에 넣고 중약불에 데운다. 여기에 소금 한 티스푼을 넣고 10분 동안 아주 천천히 저어주면 표면에 유막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때 사과식초 30ml를 넣고 가장 약한 불로 낮춘다. 그러면 알아서 엉긴다. 불을 끄고 식힌 뒤 면포에 쏟아서 거른다. 그다음 꼭 짜서 냉장고에 넣으면 끝이다. 생각보다 꽤 지난한 일이다. 쉬지 않고 우유를 저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천천히. 성질 급한 사람은 좀이 쑤실 일이다. 그렇기에 굳이 수고를 자처한 것이지만.

          

하염없이 우유를 젓다 보니 지루함이 몰려왔다. 시선은 오로지 우유에 가 있었다. 하나만 우두커니 보고 있었던 게 언제였더라. 하루에 한 시간 이상은 핸드폰 보고 있지 않으냐 반문하겠지만, 수시로 화면이 바뀌니 거기서는 안정된 기분을 느끼기 힘들다. 무엇보다 한 가지를 오래 보고 있을 때의 차분함은 느낄 수 없다. 사람이 느슨해지면 자연스레 공상을 하게 된다. 의식이 알아서 나를 끌고 다닌다.


장소는 발리. 바다를 보면서 혼자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데 한 남자가 말을 건넨다. 딱 보니 그도 여행객이다. 서로의 국적과 직업을 얘기하고 여행 온 이유를 설명한다. 나는 번아웃에 빠져서 도망치듯이 이 곳에 왔다고 얘기했다. 내가 일 한지 10년째다. 15년이 돼도, 20년이 돼도 내가 할 일은 늘 똑같다. 그걸 깨달으면서 일이 더 힘들어졌다. 근데 한편으로 일이라는 건 다 그렇지 않나. 전직을 하지 않는 이상, 연차가 쌓일수록 새로워지는 일이라는 건 없잖나. 그러면 매번 자신을 매번 불안의 늪으로 던져야 하나. 아니면 매번 같은 것의 지옥 속에서 살아야 하나.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친구, 누구나 고민이란 게 있지.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해법이 있을 거고. 당연히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아. 하지만 중요한 건 거기서부터야. 답이 나올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거야. 그러려면 우선 있는 그대로 봐야 해. 오랜 시간 말이야. 우리는 그걸 관조라 말하지. 마음과 눈이 함께 머물러야 관조야. 또한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해. 계속 바라보면 답은 나와. 최소한 그 명제가 옳은지 아닌지는 알 수 있어.”  

       

순간 현실로 돌아왔다. 내 의식이 이런 멋있는 말을 했다고? 아니, 분명 누군가가 내게 해 준 말이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대학 시절 교수님께서 내게 해 준 말씀이었다. 자신을 알고 싶다면 온전히 대면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주인공 해원은 돌연 엄마가 집을 나선 뒤 서울로 올라와 임용고시에 도전한다. 편의점에서 폐기 직전의 음식과 컵밥을 먹으면서 시험에 매달렸지만 결국 실패한다. 도피하듯이 돌아온 집에서 그녀는 사계절을 겪으며 농촌에 적응한다. 하지만 친구인 재하가 어떻게 먹고살 것인지 슬슬 고민해야 하지 않냐고 말하자 해원은 깨닫는다. 자신이 도피한 건 도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질문과 답이었음을.

 

“재하의 말처럼 가장 중요한 일을 외면하고, 그때그때 열심히 사는 척. 고민을 얼버무리고 있는 것 말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해원은 답을 찾기 위해 발버둥 치지 않는다. 해원은 차분히 답을 기다린다. 엄마가 매달아 놓은 곶감처럼. 겨울을 앞두고 아주심기한 양파처럼. 시선을 자신에게 둔다는 것은, 농사와 같을지도 모른다. 할 것을 하며 차분히 자신을 바라본다. 태풍이 몰아쳐 그 결실을 헤집어놓는다 해도, 그 실패 속에서 할 일을 한다. 그리고 다시 기다린다.   


치열하게 현실과 싸워 봤다면, 이제는 기다릴 때다. 거기서 뭘 알아낼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허나 그 시간을 의연히 흘려 보내야 답을 알아낼 수 있다. 저마다의 때가 있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앞으로는 자주 치즈를 만들어야겠다. 올리브 썰어 넣고 치아바타도 구워야지. 사실 인생의 답까지 들먹이며 거창할 필요도 없다. 뭔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면 눈이 좀 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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