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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PLS 이혜령 Oct 20. 2022

제주도민 학살을 거부하다

여순항쟁 답사기 2 여수, 항쟁의 길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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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여순항쟁 답사기 1 : 여순항쟁의 시작)


낭만포차, 해상 케이블카, 선상 불꽃놀이. 2022년의 여수는 낭만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여수 세계박람회 개최 이후 여수까지 KTX가 개통되고 관광 인프라가 생기면서 여수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여수 밤바다의 낭만을 찾아 여수를 방문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 화려한 밤바다 야경 뒤 숨겨진 여수의 아픈 역사를 아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일제강점기, 여수는 호남 곡창지대에서 수탈한 쌀과 면화를 일본으로 실어가는 항구였다. 그러다 중일전쟁(1937년)과 태평양전쟁(1941년)이 터지자 일본 해군부대와 군수품 공장이 들어서면서 식량 수탈지뿐 아니라 태평양 전쟁의 전초기지로 활용되었다. 빼어난 자연 풍광의 여수 곳곳에는 이러한 일제강점기와 태평양 전쟁 그리고 여순사건 등 다양한 근현대사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난 6월 여수와 순천을 찾았다. 작년 10월에 이어 여순사건의 흔적을 따라나선 두 번째 답사다. 여순사건의 유적지뿐 아니라 일본군의 수상 활주로, 군사 진지, 마래터널 등 일제강점기 시절의 흔적도 함께 살폈다. 여수의 답사는 14연대 주둔지이자 일제강점기 시절 군사 진지였던 신월동을 시작으로 인구부 전투지를 방문하고 천일고무공장터에서부터 서정지서가 있던 충무동로터리, 큰샘골, 근처에서 인민대회장이 열렸던 진남관까지 도보로 이동했다. 이후 종산초등학교, 마래터널,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를 차례로 방문하고 여수의 답사는 형제묘에서 마무리되었다. 여수 답사에서는 두 차례 모두 주철희 역사학자로부터 길 안내받았다.


14연대 연병장이자 일제강점기의 수상활주로, 일제강점기 군수품 공장의 굴뚝
14연대 주둔지 → 벅수골(봉강동) → 서국민학교 → 인구부전투지 → 천일고무공장(서교동공영주차장) → 서정지서(충무동로터리) → 큰샘골 → 인민대회장/진남관 → 종산초등학교 → 마래터널 → 여순사건희생자위령비 → 형제묘


신월동 제14연대 주둔지 (여수시 신월동 805)

14연대 주둔지는 14연대가 들어서기 전에는 일본 해군부대가 주둔했으며,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군수품 공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일본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군수품을 원활하게 공급하고 일본 본토 직전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제주, 여수, 인천 등 한반도 곳곳에 거대한 군수기지를 건설했다. 여수 가막만으로 이어지는 수상 활주로와 구봉산 산자락에 남아 있는 격납고, 무기고 등이 바로 그 흔적이다. 특히 이곳의 수상 활주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일제강점기 수상 활주로로, 근대 문화유적지로 가치가 충분하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을 대비해 구봉산 산자락에 만들어진 격납고(벙커). 격납고 및 군수품 공장 건설에는 전남지역의 학생들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1948년 10월 19일, 14연대는 제주도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같은 날 저녁 9시경 14연대 병사위원회는 ‘동포의 학살’이라며 제주 토벌 출동을 거부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이때 이들은 <애국인민에게 호소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해 출동거부의 이유를 밝혔다.  


14연대와 <애국인민에게 호소함> 성명서 (탐미협 기획전 <불이행> 중)

14연대의 봉기 주도세력은 부대를 장악하고 지리산으로 입산을 결정했다.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킨 이상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일부 자료에서는 남로당의 지령을 받아 국가 전복을 꾀해 반란을 일으켰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왜곡된 내용이다. 제주 진압 명령으로 급작스럽게 봉기를 일으킨 것이라 당시 남로당도 봉기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여수를 벗어나기 위해 기차를 이용해야 했던 14연대의 다음 목적지는 여수역이었다. 14연대는 여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 동쪽 끝에 위치한 여수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여수 시내를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서정지서 (충무동로터리)

20일 새벽 14연대가 여수시내로 향하던 중 서정지서의 경찰과 첫 번째 교전이 있었다. 서정지서는 여수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경찰이 저지에 나섰지만, 14연대의 병력을 이길 수 없었다. 여수경찰서에서 한 차례 교전 후에 14연대는 여수역에서 열차를 타고 20일 아침 순천에 도착한다.

 

당시 인민대회의 모습을 그린 박금만 작가의 그림(ⓒ박금만), 진남관에서 바라본 진남마취통증의학과의원(당시 소산상회)


인민대회장 (현 진남마취통증의학과의원)

여순사건은 14연대의 군인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민중이 지지하고 참여하면서 항쟁으로 발전했다. 그 시작점이 바로 여수군 인민대회다. 14연대의 봉기 이후 관공서 비자, 20일 오전 여수군 인민위원회는 조직을 정비하고 활동을 시작한다. 같은 날 오후 3시 여순군 인민위원회는 진남관 앞 대판통에서 인민대회를 개최하여 인민대회 결의안 6개 항을 발표한다.


여수군 인민위원회 결의안 6개 항
1. 오늘부터 인민위원회가 모든 행정기구를 접수한다.
2. 우리는 유일하며 통일된 민족 정부인 조선인민공화국을 보위하고 충성을 맹세한다.
3. 우리는 조국을 미 제국주의에 팔고 있는 이승만 정부를 분쇄할 것을 맹세한다.
4. 무상몰수ㆍ무상분배의 민주주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5.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모든 비민주적인 법령을 무효로 한다.
6. 모든 친일 민족 반역자와 악질 경찰관 등을 철저히 처단한다.


인민대회 연설장소는 소산상회로, 현재 진남통증의학과 의원에 위치한 자리인데, 그보다 더 아래에 위치한 중앙로 로터리 이순신 광장에 ‘중앙동 인민대회 장소’라는 안내판이 잘못 세워져 있다. 이순신 광장은 1948년 당시 바다였고 1960년대에 매립되었다가 2012년 세계박람회를 준비하며 조성된 곳이다.



천일직물공장과 천일고무공장 (서교동공영주차장 일대)

21일, 인민위원회는 여수 식량영단창고의 문을 여는 것으로 정책을 실천했다. 당시 창고에는 쌀이 없어 배급할 수 없다는 관료들의 말과는 달리 쌀이 가득했고 밑으로는 관리가 안돼 썩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민위원회는 천일고무공장의 운영권을 노동자에게 돌려주고, 신발을 시민에게 나누어줬다.


천일직물공장과 천일고무공장은 태평양 전쟁 시기에 일제에 군용기를 헌납한, 대표적인 우익인사였던 김영준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23일, 김영준은 그간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여수군 인민위원회 내 강경파에게 처형되었다.  

 

인구부 전투지

인구부 전투지 (종고산 산복도로, 연등1길 74-2인근 지역)

10월 21일, 정부는 광주에 반군토벌전투 사령부를 설치하고 22일, 여수와 순천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사령부가 22일 먼저 순천 진압에 나서게 되고 하루만에 순천 진압을 완료한다. 그리고 같은 날 해군과 육군이 여수 상륙잔전을 시도했지만, 여수 시민군의 맹렬한 대응으로 실패한다.

10월 24일 오후 여수로 진격한 진압군과 시민군이 여수 초입지역인 종고산 인근 인구부(잉구부)에서 첫 전투를 벌인다. 지형을 이용하여 매복해있던 시민군의 기습으로 시민군이 승리하지만, 이 전투에서 진압군 사령관이 큰 부상을 입고 미국 종군기자 AP통신의 램버트가 사망하면서 이틀 후 7개 연대라는 대규모 병력이 투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인구부 전투로 진압군의 포위망이 무너진 틈을 타 여수군인민위원회 주력부대는 여수를 빠져나가 지리산과 백운산으로 입산했다.


여수 충무동 큰샘골(라이프 1948년 11월호), 현재의 큰샘골 모습

서 국민학교 (현 서초등학교), 종산국민학교 (현 중앙초등학교)

25일, 진압군은 여수 상륙작전을 다시 시도했지만, 또 실패헀다. 다음 날 26일 토벌사령부가 여수 총공격에 나서 이 날 오후부터 구봉산, 장군산, 종고산, 덕충동, 신항 등 여수 외곽 지역을 장악하고 서국민학교에 사령부 본부를 설치한다. 27일 대대적인 공격으로 여수 전역을 탈환한다. 이때의 총공격으로 여수 시내는 큰 화재가 발생한다. 사령부 본부가 설치된 서국민학교에서는 불에 탄 여수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10월 27일, 여순사건이 진압되자 진압군은 시민들을 서국민학교, 동국민학교, 종산국민학교 등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게 해 부역혐의자를 가려냈다. 당시 천일고무공장에서 생산한 ‘찌까다비’(신발)를 신은 사람, 군인처럼 머리가 짧은 사람, 군용 속옷을 입은 사람,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반란군’ 또는 부역혐의자로 분류됐다. 뿐만 아니라 우익청년단원과 경찰이 줄을 선 사람 중에 손가락으로 사람들을 가려내면 '부역혐의자'로 분류되기도 했다. 이를 일명 '손가락총'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분류된 사람들은 학교 뒤의 구덩이로 끌려가 즉결 총살을 당하거나 종산국민학교로 압송되어 군부회의에 회부됐다. 하지만 이 압송된 사람들 역시 군부회의 결과에 의해 현장에서 처형되거나 징역형을 받은 사람들은 형무소로 수감되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예비검속'으로 인해 대부분 학살됐다.

 

여수시내

27일 진압군의 여수 총공격으로 여수 시내 일대가 화염에 휩싸인다. 이때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들도 불에 타 전소되었다. 대표적인 건물이 조선식산은행(구 제일은행 여수지점) 건물이다. 이때 불에 타서 새로 지어졌는데, 건축 양식만 보고 일제강점기의 건물이라고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화재가 난 여수 시내의 모습(라이프, 칼 마이던스 촬영), 조선식산은행 건물(현재)

마래터널

마래터널

우리 일행은 여수 시내에서 여순사건 유적지를 살피고 차를 타고 만성리 학살지로 향했다. 여수시내에서 만성리 학살지를 가기 위해서는 마래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마래터널은 일제강점기에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는 철로를 놓기 위해 만든 터널로, 조선인과 '꾸리'라고 하는 만주 노동자 등 강제 징용된 사람들이 쇠망치와 정으로 마래산을 뚫어 만들었다. 고되고 위험한 노동현장에서 열악한 처우에 시달리며 일본의 침략 전쟁을 위해 노동력을 착취당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앞서 소개한 14연대 주둔지가 있던 신월동 군사 진지와 더불어 마래터널은 일제강점기 경제적 수탈의 역사뿐 아니라, 강제징용으로 인권이 유린된 역사를 가장 직관적으로 살필 수 있는 곳이다.


박금만 작가의 <여수의 해원(만성리> ⓒ박금만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마래터널을 지나고 나면 '여순사건 위령비'가 세워져 있는 만성리 학살지가 나온다. 여수를 재탈환하고 완전히 진압을 한 후에도 사람들의 삶은 정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부역자 색출이라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감시하고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그때 학살 당한 사람들을  바로 이곳에 암매장했다.


여순사건 이후 여수 사람들은 이 지역을 지날 때면 절벽 아래 넓은 웅덩이로 돌을 던졌다고 한다. 마치 돌무덤을 쌓듯이.... 여순항쟁 역사화를 그리고 있는 여수의 박금만 작가는 <여수의 해원(만성리)>이라는 작품을 통해 자신도 빨갱이로 몰려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여수 사람들이 그렇게 돌을 던져서라도 여순사건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의 원통함을 풀어주고자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순사건희생자위령비, 형제묘


  

형제묘 (전라남도 여수시 만흥동 149-1번지 일대)

여순사건의 부역혐의자로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에 수용되었던 사람들 중 125명이 1949년 1월 13일 이곳에서 집단 학살되고 불태워졌다. 희생된 시신들을 찾지 못한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고 형제묘라 이름 붙였다. 형제묘비를 자세히 살펴보면 두 겹으로 덧씌워졌는데, 유족들이 희생자의 빨갱이 이력으로 인해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해 묘비 뒤에 적힌 글을 숨기기 위해 묘비를 다시 감싼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봉인되어 버린 묘비가 여순사건의 아픔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임을 보여주고 있다.


2020년 여순사건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수많은 책과 자료를 찾아봤다. 지난해 여수 예울마루에서 열린 박금만 작가님의 여순항쟁 역사화 전 <불꽃, 여순 희망의 역사>와 두 번의 답사를 통해 수많은 자료와 책을 봤을 때보다 여순사건을 보다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여순사건이 우리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해 준 기회가 됐다.


이번 글을 작성하며, '여순사건'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썼다. 아무런 편견 없이 이 글을 썼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처음 시작은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14연대 봉기군의 길을, 여수 시민들의 흔적을 따라가고자 했다. 누군가 비슷한 길을 떠난 사람이 있다면 묻고 싶다. '제주도를 진압하라'는 부당한 국가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 '반란'이라고 정의되고 불리는 게 맞는 것일까? 반대로 다른 의문점도 생긴다.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발생하고 있는) 광주의 5.18,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미얀마 그리고 러시아의 군인들은 시민들을 공격하라는 국가의 정당하지 못한 명령을 왜 거부하지 못했을까? 여순사건을 '사건'이라는 중립적인 시선에 머무르는 것에 만족하는 것은 맞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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