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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PLS 이혜령 Oct 17. 2022

여순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여순항쟁 답사기 1 여순사건의 시작

지난 6월 여수와 순천을 찾았다. 작년 10월에 이어 여순사건의 흔적을 따라나선 두 번째 답사다. 지난해 답사 이후 마음 한쪽에는 묵직한 부채감이 자리 잡았다. 그동안 왜 이렇게 무관심했을까? 제주 4.3을 제대로 알자고 목소리 내던 나였지만 제주 4.3과 여순사건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에도 정작 여순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얼마 되지 않았다. 2022년 우리는 얼마나 여순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까?



74년 만에…

답사 이후 보고 들은 것이라도 제대로 정리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조심스러웠고 그러다 보니 다짐 또한 점점 희미해졌다. 그렇게 미루다 보니 10월이 됐다. 10월이 되자마자 나를 보채기라도 하듯 여순사건의 소식이 들려왔다. 6일 정부가 여순사건 당시 사망한 민간인들을 처음으로 희생자로 인정한 것이다. 여순사건이 발생한 지 74년 만에 말이다. <여순특별법> 제정 또한 2000년 제정된 <제주4.3특별법>에 비해 한참 지난 지난해에야 제정되었으니 생각해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제주도민 학살 명령을 거부로 시작된 사건이지만, 제주에서조차 여순사건을 제대로 알거나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관심을 가지는 이가 없으니 이리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 이후, 늦게나마 여순사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여순사건은 왜 일어났으며, 또 여순사건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 제대로 질문하지 않았다. 여순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제주 4.3에 대해 다시 공부하고, 해방 전후의 자료를 다시 찾아 읽으며 우리의 현대사를 다시 들여다봐야 했다. 여순사건만 떼어놓고 여순사건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순사건 특별법(여수ㆍ순천 10ㆍ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여수ㆍ순천 10ㆍ19사건을 "정부 수립의 초기 단계에 여수에서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4ㆍ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인하여, 1948년 10월 19일부터 지리산 입산 금지가 해제된 1955년 4월 1일까지 여수ㆍ순천지역을 비롯하여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혼란과 무력 충돌 및 이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명시하고 있다.


1945년, 혼돈의 해방정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급작스럽게 해방이 찾아왔다. 일제가 패망하던 그날,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1945년 9월 6일, 인민위원회로 변경)를 결성하여 해방정국의 치안과 행정의 공백을 메우며 안정을 만들어갔다. 하지만 9월 9일 들어선 미군정은 이 조직을 용인하지 않았다. 상해 임시정부 또한 인정하지 않았다. 일장기가 내려진 조선총독부 중앙청에는 미국 성조기가 게양됐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미군정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토록 원하던 해방이었지만, 이미 오랜 식민지배와 전쟁으로 인한 수탈로 비참했던 민중의 삶은 기대와 달리 더욱 궁핍한 상황으로 몰렸다. 해방이 되자 강제 징용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해외에 있던 사람들이 조국으로 돌아왔다. 미군정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에서 귀국한 동포만 100만여 명, 이북에서 월남한 동포가 60만 명에 육박했고, 중국에서도 1만여 명이 돌아왔다. 하루 인구 증가폭이 3,500여 명에 달했다. 급격한 인구 급증으로 인해 식량과 일자리 문제, 생필품 부족 등으로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콜레라 유행, 태풍, 극심한 흉년과 기근 등의 악재가 겹쳤다. 이와 같은 극심한 식량난 상황에서도 미군정은 미곡 강제공출정책을 강행해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때보다 더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쌀을 달라, 쌀을 주는 우리 정부를 세우자'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자 전국적으로 굶주림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 식량을 요구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1946년 10월, 대구에서 미군정의 미곡 강제공출정책에 항의하는 총파업 시위를 미군정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식량정책 실패, 친일경찰과 관료의 재등용, 친일경찰을 앞세운 수탈과 억압으로 미군정에 대한 민심은 갈수록 나빠졌다.


해방 이후 친일을 청산하고자 했던 우리와는 달리 미군정의 목표는 소련의 팽창을 차단하고 미국에 우호적인 반공국가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미군정에 의해 정권을 잡은 이승만 정부 역시 민생은 뒷전이었고, 반공을 내세워 반대세력을 잡는데 혈안이 되었다. 이런 이승만에게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일어난 제주4.3은 조속히 진압해야 할 최대의 과제였을 것이다. 미군의 비호 아래 정권을 잡은 이승만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해 있던 국군 14연대에 제주를 진압하기 위한 출동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14연대는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이라며 제주토벌출동을 거부했다.


여순사건은 14연대의 군인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민중이 지지하고 참여하면서 항쟁으로 발전해 여수와 순천, 광양, 구례, 보성 등으로 빠르게 번져갔다. 하지만 이제 막 정권을 잡은 이승만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한국 역사상 최초로 계엄령을 발의하고 무차별적인 유혈 진압에 나서면서 수만 명의 국민을 학살했다. 여순사건을 겪은 이승만 정부는 반공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학교마다 일제강점기 학도호국단을 부활시키고 국가보안법을 탄생시킨다. 이 법에 따라 '보도연맹'을 결성하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보도연맹원 집단 학살로 이어졌다. 이때 최소 10만 명에서 3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국가보안법은 이후에도 오랜 세월 희생자와 유가족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옥죄어왔다.


여순사건은 해방 직후 올바르게 탄생하지 못한 국가권력이 만들어낸 큰 비극으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지만, 오랜 시간 우리는 알지 못했고 애써 외면해왔다. 잘못된 국가의 명령을 거부하고 인간의 존엄을 선택한 사람들, 말 한마디와 손가락질 한 번에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사람들. 우리가 기억해온 역사는 그들을 제대로 기록하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질문할 때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여순사건의 흔적을 찾아 나선 여수와 순천 답사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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