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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PLS 이혜령 Jan 23. 2022

기술이 우리를 구한다는 착각

2021년 문제적인 책,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수많은 과학적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이 기후 위기를 부정하거나 ‘기술’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반대로 ‘그런 사람이 트럼프 말고 있어?’라도 되묻겠지만, 일상에서 그런 사람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지구의 수많은 정보접근이 가능했던 트럼프의 기후변화에 대한 발언을 그 믿음의 근거로 댄다.


사실 이 책은 아무런 정보 없이 ‘<침묵의 봄>이래로 가장 탁월한 업적’이라는 문구 때문에 집어 들게 됐다. 그리고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이라는 책 제목 자체도 한참을 “환경”을 외치다 요즘 지쳐버린 나에게도 다시금 각오를 다질 수 있는 자극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책을 집어 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책을 그대로 덮어야 하나, 고민을 반복했다. 앞서서 말한 사람들과 대화할 때 느꼈던 답답함을 책을 읽으면서도 느꼈기 때문이었다. ‘플라스틱은 진보다’, ‘유전이 발견되고 고래는 목숨을 구했다’, ‘고기를 먹으면서 환경을 지키는 법’, ‘원자력은 자연보호의 희망이다’, ‘신재생에너지가 자연을 파괴한다’, ‘저임금 노동이 자연을 구하다’ 등… ‘정말 이렇게 마무리가 된다고!’ 각 섹션이 마무리될 때마다 몇 번이나 놓친 곳이 있었나 앞 쪽으로 되돌아가길 반복해야 했다. 그럼에도 책의 내용이 드라마틱하게 전환되길 기대하며 힘들게 책장을 넘겼지만 끝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책이 오히려 나에게 약이 될 수도 있다고 독려했지만, 책을 덮자 묵직한 답답함을 넘어 분노가 몰려왔다.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에는 공감 가는 부분도 많았지만 해석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자신의 논리를 내세우기 위해 다수의 과학자가 주장하는 과학적 팩트에 대해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근거를 선별적으로 선택하여 왜곡시키면서 편향적으로 다뤘다. 그야말로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를 공격하는 식의 전개가 많아 읽기가 쉽지 않았다.


그레타 툰베리 측에서는 비행기보다 배로 여행하는 것이 탄소 배출을 더 늘린다는 비판에 대해 “애초에 그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온실가스 배출은 훨씬 적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p.488


가장 화가 났던 부분은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만든 옷을 입자’는 주장을 펼치는 부분이었다. 기후위기 대응에 있어서 개발도상국에 대한 형평성에 대한 문제의식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작가가 풀어내는 방식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제기된 문제에 대한 요인과 환경운동가들의 메시지를 선을 넘어 왜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경운동가들은 ‘패스트패션’이라고 불리는 오늘날의 비정상적인 패션사업의 구조와 불공정한 시스템에 목소리는 내는 것이지, 단순히 방글라데시나 베트남 등지에서 만든 옷을 보이콧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공정한 시스템을 개선하여 ‘공정한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외친다. 빈곤퇴치와 기후위기 대응 중 한 가지만을 선택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또한, 기후재난의 취약성을 줄이고 대응력과 회복력을 키우기 위해서도 자본주의로부터 시작된 불평등을 해결해야 한다. 빈곤과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기후 불평등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현 시스템을 그대로 두고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만든 옷을 사 입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대처일 뿐, 결코 기후위기 대안이 될 수 없다.


저임금 노동자들이 생산한 저렴한 의류를 사 입는 것, 그리하여 가난한 개발도상국의 농업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은 우리가 인도네시아의 수파르티나 콩고의 베르나데데 같은 이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다. 동시에 우리는 그런 과정을 통해 열대우림을 비롯한 자연환경의 보호와 회복을 도울 수 있다.
p.202


저자는 마치 자본주의적 소비문화, 경제성장 위주의 사회적 시스템은 유지하면서도 우리의 기술로 기후위기를 극복할  있다는 달콤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과연 그럴까? 오늘날 과잉된 삶을 바꿀 필요 없이 기술이 기후위기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낙관론 무책임한 맹목적 믿음이 아닐까? 친환경에너지로의 전환을(저자는 친환경에너지에 회의적이지만) 성공하더라도 지금의 소비 양식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결국 친환경에너지 또한 지속가능한 대안이 되지 못할 것이다.


개발과 보호는 함께 가는 것이다. 농경과 목축을 더 효율적이고 수익성 높게 만드는 것만으로 원시림을 보호하기 위한 다른 노력은 불필요해진다. 특정 구역을 지정해 이미 존재하는 농장과 목장의 집약도를 높이기만 해도, 브라질 농부들과 목장주들은 더 좁은 땅에서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해 낼 수 있고, 따라서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p.110


우리는 ‘종말혹은 ‘멸망 대한 의미부터 다시 고민해야 정의 내려야 한다. 종말에 대한 의미를 너무 축소하여 정의 내리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전염병으로 공공의 안전이 위협받고 국경은 닫히고 거리는 비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부분이 변하면서, 그동안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세계를 휩쓴 코로나 이후로 그동안 인간이 얼마나 지구를 독식하며 이기적으로 사용해왔는지,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코로나는 지구가 보내는 경고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우리는 변했을까? 코로나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우리의 삶의 태도는 그다지 변하지 않은  같다. ‘혜성 충돌’, ‘자원고갈등과 같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극단적인 멸종의 모습은 아니지만, 상실과 단절, 고립의 코로나를 지내오면서 음모론과 가짜 뉴스, 혐오와 차별이 난무하는 지금의 상황이 ‘문명사회 종말의 모습이 아닐까, 그래서 이미 종말은 우리의 눈앞에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의지와 행동이 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꿈꾸는 모습으로 만들어 나갈  있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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