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혐오 없는 삶>
When given the choice between being right or being kind, choose kind.(올바름과 친절함 중 하나를 선택할 땐 친절함을 선택해)
- 영화 <원더> 중
내가 좋아하는 영화 <원더>에는 명대사가 많다. 그중에서도 이 문장은 오랫동안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올바름과 친절함 중에 친절함을 택하라고? 멋진 말 같지만,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시 나는 혼란스러웠다.
“문제는 어떤 사람을 진짜 알게 되면, 더는 그를 증오하지 못한다는 거죠.”
p.37
국적을 막론하고 대화에서 금기시되는 주제들이 있다. 종교, 정치, 젠더 이슈를 포함한 다양한 인권 이슈 그리고 최근에는 기후 위기 등의 환경 이슈와 백신 이슈까지…. 이 주제들은 양쪽이 있고 그 둘은 절대 만날 수 없는 대화를 만들어간다. 우리는 ‘틀리다’와 ‘다르다’를 동의어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존재(정치, 종교, 성별, 인종, 출신 등이 다른)와 대화를 할 기회도 많지 않거니와, 하더라도 단발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커뮤니티 테두리 안에서만 정보를 공유하거나 나와 비슷한 의견만을 취하며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고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가치판단에 의해 ‘다르다’는 말 대신 종종 ‘틀리다’는 말을 혼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르비아 가족도 헤르메스 부부가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삶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 주었다. 헤르메스 부부는 자신들의 삶이 쓰임새가 있기를 갈망했었다. 만약 크리스타가 그날 2층으로 항의하러 올라가지 않았더라면 자신들의 삶이 어떠했을까 하고 하랄트는 가끔 자문한다. 만약 시 당국에 의해 이 집으로 이송된 이들이 몸에 걸치고 있는 옷 말고는 다른 의복이 거의 없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만약 그 이웃이 게으르거나 멍청해서 혹은 악의로 빨래를 베란다 위에 너는 게 아니라,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p.24
나도 역시 다르지 않다. 최근 뉴스를 뒤덮는 정치 이슈에 대해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보며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을 수 있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라며 종종 고개를 저으곤 한다.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나와 같은 의견, 공감할 수 있는 정보들만 취하며 공감하고 있는 꼴인지도 모른다. 여러 차례 끝이 없는 논쟁 끝에 알게 된 사실은 ‘내가 믿는 사실과 그들이 믿는 사실은 다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함께 식사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던가! 동시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제대로 보고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로라는 자신의 증오를 따르지 않고, 이 증오가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만큼 충분히 영리하고 성찰적이었다. 대학에서 듣고 있던 수업 하나가 로라를 도와주었다. 그 덕에 로라는 반대편과 마주할 용기를 냈다.
p.256
책을 읽으며 <원더>의 대사를 여러 번 곱씹었다.
내 주변에는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있는가? 그 사람들과 얼마나 자주 의견을 나고 있는가? 내가 나와 다른 사람들의 올바름과 나의 올바름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계기는 결국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들의 의견에 동의할 수는 없어도 그들의 입장에서 상상해볼 수는 있게 되었다. 이 역시 그들의 입장을 대비하여 상상할 수 있던 것은 상상 가능한 구체적인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공감은 경험 그리고 상상력의 문제일지 모른다. 경험의 폭만큼 공감할 수 있고 상대방의 입장을 상상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공감이 아닐까.
공감은 우리가 이전에 멀리서 붙여 두었던 라벨을 상대의 육체에서 떼 내 버린다. 적, 롬족, 난민, 외노자놈, 이 모든 것이 단 하나, 사람만 남을 때까지 그 의미를 잃는다.
p.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