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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PLS 이혜령 Jan 22. 2022

좀 더 자유분방하게, 좀 더 부드럽게

화가 강요배의 글과 그림, 사유 모음집 <풍경의 깊이>

이 책을 사두고 바로 읽지 못하고 2년이나 묵혀두다 새해가 되어서야 읽기 시작했다. 강요배 작가의 이전 책인 <동백꽃 지다>(1992)를 먼저 읽고 싶어 책을 구하려 이리저리 들쑤셔 보았지만, 절판되어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책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여전히 많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폭낭은 모든 걸 알고 있다.
만 리에서 날아온 바람이 여기 와서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폭낭과 대화하다 간다.
겨울이면 만주에서, 여름이면 남태평양에서 날아온 소식들을 여기 가만히 앉아서 다 듣는다.
그렇게 바람이 폭낭을 만들고 또 폭낭은 바람의 존재를 기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존재시키는 관계다. 저 작은 가지들은 그런 바람의 소리를 들으며 자라고 기억한다. 바람의 기록이 저 가지다. 그래서 ‘바람이 폭낭이다’라고 할 수 있다. 또, ‘폭낭이 바람이다’라고도 할 수 있다. 둘은 하이픈으로 강렬하게 연결되어 있다. (p.134)


제주4.3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을 모르더라도 아마 적어도 한 번 이상 강요배의 그림을 보았을 것이다. 현기영 작가가 <순이 삼촌>(1978)으로 4.3의 금기를 깼다면, 강요배 작가는 ‘제주 4ㆍ3 역사화’ <동백꽃 지다>를 통해 4.3을 알렸다. 그는 박경훈 작가와 함께 30년 가까이 4.3을 주제로 그림으로 그려 4.3을 알려오고 있는 4.3미술제의 시작을 열었던 4.3 예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다. 나는 그들을 통해 4.3을 배웠다.

강요배, 젖먹이, 2007 (p.141)


예술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답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예술은 사회에 꼭 기여해야 한다’라든가 이런 것보다도. 오히려 자기 혼자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확인하고, 그걸 제대로 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그것도 어렵다, 사람한테는. 그런데 나를 알려면 나의 의식을 사로 잡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게 나에게는 고향의 역사였다. p.27

<풍경의 깊이> 그가 단지 4·3 화가만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한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고향의 역사를 탐구하는 일은 ‘내가 누구인가 스스로 답하는 과정이었다. 작품을 그리는 시간만큼이나 사유하는 시간도 길었을 ,  책에는 제주4.3 아니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해, 사회적 통념에 대한 반론, 작가로서의 태도, 예술에 대한 생각, 미술시장과 미술의 가치  미술 전반에  작가의 오랜 고민과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미술이란 그 자체가 생생한 삶이며, 나아가 바람직한 삶을 위한 소통의 장을 실현하는 일이 된다.
미술이란 세계의 표현이기 전에 세계의 실현이다. 미술은 삶의 추상화가 아니라 삶의 구체화다. 미술은 세계의 그림자가 아니라 세계 그 자체인 역동체다. 미술은 삶이란 사건들이며 또 그것들이 일어나는 장이지, 그 구성 물건이거나 표현물이거나 그 구조만도 아니다. 미술은 세계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세계와의 통합이며 나아가 조화의 실현이다. p.260-1


다년간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며, 그림만으로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자신을 더 확실히 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미술을 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강요배를 알았건 몰랐건 작가가 던지는 질문에 함께 고민하며 작가의 깊은 사유를 나누는 것이 모두에게 의미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림이 눈 앞에 펼쳐진 듯 자연과 현상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적은 그의 글은 읽는 재미도 좋다. 그의 그림은 제주의 땅과 바다처럼 거칠고 깊지만 그의 글은 맛이 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한 탁월한 비평가의 비유대로 아직은 모호한 어떤 마음을 낚는 일인지 모른다. 이 낚음질에는 먼저 평정한 상태와 미끼가 필수적이다. 미끼란 외부 사물, 생각거리 등 이른바 소재다. 미끼는 목표물이 아니다. 그것을 다루는 방식, 낚아 올리는 방식, 요리해 내는 방식을 통하여 마음은 드러날 것이다. p.3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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