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 작가의 <방금 떠나온 세계>
“사랑하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신에게도 있지 않나요.”
p.126, <로라> 중
<방금 떠나온 세계>의 매력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과학적 상상력뿐 아니라 다양한 존재와 연결 지어 새로운 세계관을 열어주는 데 있다.
로라에게 세 번째 팔은 증강도 향상도 아니었다. 그것은 몸에 대한 훼손이었고, 차라리 결함을 갖기로 선택하는 것이었다. 진이 그렇게 긴 여정을 떠났던 것은, 어떤 사람들이 스스로 결함을 갖는 결정을 내리는 이유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p.125, <로라> 중
언젠가 책에서 보청기와 같은 인공 보조기구 이식이나 치료를 그들이 지닌 고유의 정체성을 지우는 말살로 받아들여 투쟁해 온 청각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주류사회에서는 청각의 손상, 기능의 결함으로 치료의 대상으로 바라보지만, 청각장애인은 음성언어가 아닐 뿐 또 다른 언어로 소통하고 있다. 다양성을 배제한 채 주류사회로의 편입만을 목적으로 한 치료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소수 정체성에 대한 말살과 탄압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자녀에게도 음성언어에 대한 훈련이 수어와 같이 그들이 지닌 소통능력과 더불어 정체성이 훼손할 것으로 생각하고 음성언어훈련을 거부한다고 했다.
아동학대가 아닐까? 장애인으로 살아가길 선택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내게 너무 급진적이라 혼란스러웠다. 이후 그들이 왜 장애인으로 살아가길 선택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봤다. 하지만 질문은 이내 다른 질문으로 옮겨갔다. 우리 사회는 그들의 삶과 권리를 있는 그대로 보장하는 대신 주류에 편입하고, ‘정상성’ 획득을 강요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일까? 장애인을 ‘비생산적’, ‘비효율적’ 존재로 규정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정상성’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의 시스템에 편입되길 강요당하면서 그들이 포기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을까? 그들이 포기해야 했던 것은 그러기에 당연했던 것일까?
활동 지원을 받기 위해 심사를 신청했다. 적격 심사는 언니의 무능력함을 평가하는 자리였다. 쏟아지는 질문들 앞에서 언니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대신 언니가 지금 혼자 걸을 수 있는지, 손과 다리를 움직이는지, 밥을 먹을 수 있는지, 배변을 하고 뒤처리를 할 수 있는지, 스스로의 신체 상태를 인지하는지, 그런 질문들을 던져지고 낱낱이 점수가 매겨졌다. 방문 심사를 하러 온 직원은 부정 수급을 방지하기 위한 절차라고 했다.
p.290, <캐빈 방정식> 중
김초엽 작가는 장애를 포함하여 우리 사회 속 다양한 소수자의 문제가 ‘결핍’ 혹은 기능이 ‘결함’이 있는 상태가 아니라 장애를 바라보는, ‘장애화’하는 혹은 ‘타자화’하고 ‘대상화’하는 사회적 시선이라고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있다. 개개인마다 지닌 고유의 정체성일 뿐이며,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결핍이 아닌 또 다른 능력일 수 있다.
“사람들이 나를 위해 대화를 멈춘 적 있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들을 서로 주고받는 걸 중단한 적이 있어? 공기가 침묵으로 가득 찬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 그런 적이 없다면, 나는 여기 속한 적이 없는 거야.”
p.174, <숨그림자> 중
<방금 떠나온 세계>의 각각 이야기에 등장하는 마리, 로라, 조안, 이브 등 낯선 존재들의 삶이 지극히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멸망 이후 또 다른 시대, 지구를 너머 또 다른 가상세계의 인물 혹은 존재이지만, SF 소설 속 그들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방금 떠나온 세계>의 각각 이야기는 다양한 존재의 삶을 비추고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소설을 읽는 내내 소설 속 배경과 존재들을 상상하는 재미로 즐거웠다면 책장을 덮고 나자 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마주한 질문과 생각들을 그들의 언어로 나눠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