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공감은 지능이다>
<공감은 지능이다>
- 친절함을 얻기 위한 투쟁
- 자밀 자키 | 정지인 옮김 | #심심, 2021
- 분야/페이지 | 인문 > #심리학 / 476쪽
공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친절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친절함이란 대가를 치르면서도 타인을 도우려는 성향을 말한다. 친절함은 호사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이 경직된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기술이라고 말이다.
p.13
<공감은 지능이다>라는 제목은 매력적임과 동시에 미묘하게 거부 반응이 들기도 한다. 자칫 ‘똑똑한 사람이 공감도 잘한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똑똑한 사람이 공감을 잘했었나? 내 섣부른 생각을 쏟아내지 않아도 다행히 책은 그 간지러움을 긁어준다. 많은 사람이 공감을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는 하나의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그보다 더 복잡하다. 그보다 공감은 사람들 간의 상호 반응의 방식이며, 이는 다른 사람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인지하는 ‘인지적 공감’, 그들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정서적 공감’, 그들의 경험을 개선하고 싶은 마음인 ‘공감적 배려’로 나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똑똑한 사람이 타인의 감정을 인지할 수 있으나 그 감정을 함께 느끼는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공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떼어두고 공감을 타인의 감정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은 공감을 지나지게 과소평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똑똑한 사람이 타인의 감정을 잘 인지한다고 일반화하여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 compassion’는 타인의 고통을 떠안지 않으면서 그들을 염려하는 일이 포함된다. “그런 분리가 필요해요. 너무 멀리 떨어지면 그건 ‘그 사람의 일이지 내 문제가 아닌 게’ 되고, 분리가 일어나지 않으면 주변의 고통에 너무 심하게 동일시하게 되기 때문이죠.”
p.242
가장 와닿은 부분은 ‘지나친 공감의 위험’을 다룬 5장이다. 공감이 좋은 것은 알겠다. 공감의 중요성을 누누이 이야기해왔지만 최근 들어 공감에 대해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공감에는 좋은 점만 있을까?’ 이런 의문 들게 된 것은 타인에게만 좋은 공감이지, 나 스스로는 타인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점점 끝을 알 수 없는 코로나 사태 이후, 어느 순간부터 주변에 코로나 블루를 호소하는 지인들이 많아졌고, 난 그들의 대나무 숲이 되었다. 카톡은 우울감과 분노의 대화들이 오갔고 그들을 위로하다 나 역시 번아웃 상태가 되고 말았다. (물론 그들만의 탓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나의 방식에서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공감이 반드시 번아웃을 초래하지는 않지만, 어떤 방식의 공감인지에 따라 괴로움에 빠질 수도 있고 괴로움 대신 염려하게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저자의 경우, 결국 타인의 고통을 회피하게 된다고 한다. 그동안 내가 어떤 방식의 공감을 해왔는지 되돌아볼 시점임이 분명하다. 명상 등과 같은 방법을 통해 지나친 공감으로 인한 부작용을 줄인 사례들도 소개됐는데, 책을 읽었다고 해서 당장 상황이 나아지지 않겠지만, 적어도 내 상황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계기를 마련해줬다. 아무튼 제대로 된 공감을 한다면 실제로 번아웃을 예방한다고 한다!!!
이야기는 공감의 풍경을 평평하게 만들어, 멀리 떨어진 타인이 그 거리를 더 가깝게 느끼도록, 그리고 서로를 염려하기 쉽도록 만든다.
p.167
코로나 블루와 번아웃으로 나는 종종 책으로 피신했는데, 전에는 자주 읽지 않았던 문학을 지난 2년간 정말 많이 읽었다. 문학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말에서 위로를 받곤 했는데 나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4장 문학과 예술이 공감에 미치는 영향’에 나온다. 4장과 5장은 그간 진행해 오던 활동들과 교차점이 많아 개인적으로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장이었다.
토니는 증오 단체 회원에게 공감하는 것이 그들의 신념을 인정하는 것과는 다른 일임을 분명히 했다. “그 이데올로기와 증오는 반드시 비판해야 하지만, 그 사람은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 그때까지 에밀과 누 르와 나는 사람들이 외부인에 대해 갖고 있는 마음을 바꿔주는 것이 접촉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직접 경험해 본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달랐다. 접촉을 통해 바뀐 것은 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p.155
또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증오 범죄를 일삼던 토니와 그가 설립한 ‘증오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3장이다. 평생에 걸쳐 혐오와 증오로 가득한 삶을 살아왔지만, 아름다운 변화를 사람들, 르완다 집단 학살 이후 용서를 향해 나아가는 후투족과 투치족 등 한 사람 한 사람이 만들어가는 드라마틱한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뿐만 아니라 공감을 방해하는 편견에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나누고, 공감으로 인해 더 나은 세상으로 변해가는 순간의 목격자로 독자를 초대한다.
우리는 왜 지금 ‘공감’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걸까? 왜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걸까? 이 책은 단순히 사람들의 윤리나 감성에 기대어 공감이 세상이 아름답게 만든다고 호소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타인을 돕느라 자신의 안전이 위협에 빠지기도 한다. 그걸 알면서도 그러한 선택을 한다.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설에 따르면 다른 무엇보다 자신을 보호해야 함에도 말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은 흩어진 개인일 때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함께 뭉치면 굉장한 존재가 되며, 협력할 수 있어 결국 지구를 차지한 생명체가 되었다고 말이다. 결국 인간의 공감이 진화상의 급진적인 도약을 이루게 했고, 현재의 인간의 존재 자체가 공감이 인간에게 유리하다는 증거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너무도 다른 개개인이 연결되어 더불어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감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현대사회에서 수많은 사람이 마치 고립된 섬처럼 고립되고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단절된 삶에서 공감 역시 자리가 없다. 그래서 공감을 잃은 시대라고 말한다. 과학이 인간의 삶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과학은 모든 것을 대체할 수는 없다. 여전히 우리는 서로에게 의존해 살 수밖에 없으며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얼굴도 모르는 타인의 친절함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파괴’와 ‘회복’, ‘고립’과 ‘친절(공감)’ 지금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고, 우리의 선택이 미래를 만들어갈 것이다. 다행히도 공감은 연습과 경험을 통해 키울 수 있고, 우리는 더 친절해질 수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도 있다.
5년 뒤, 어쩌면 1년 뒤라도, 세상은 더 야박한 곳이 될 수도 있고 더 친절한 곳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사회는 더 파괴될 수도 있고 회복을 시작할 수도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공감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그들이 우리를 잔인하거나 냉담하게 대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게으른 감정적 본능에 굴복한다면 우리는 모두 더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아주 현실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택하는 방향과 우리의 집단적 운명은 각자가 어떤 감정을 느끼기로 결단하는가에 달려 있다.
p.38
두툼한 책이지만, 쉬운 언어와 공감 가는 내용으로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어느덧 책의 마지막까지 이르게 된다. 이 책을 손에서 놓자마자 ‘캐서린 라이언 하이드’의 소설 <물고기에게 물에 관해 묻는 일>을 읽었는데, 마치 한 묶음의 책처럼 책의 내용이 연결된다. (친구는 반대로 소설을 먼저 읽었다.) 함께 읽길 추천드린다.
“우리는 대개 친절을 자신을 희생하여 타인을 이롭게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도움을 주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상처를 덜 입게 하려고 스스로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타인에게 도움을 주면서 혜택을 입는 경우도 있다. 너그러움은 베푸는 이를 충만하게 하고 스트레스를 줄여주며, 노인 자원봉사자들의 경우 심지어 수명도 늘어난다. 나와 동료들은 베푸는 사람이 선의의 대상에게 공감할 때 특히 더 이로운 효과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p.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