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물고기에게 물에 관해 묻는 일>
‘더 나은 세상으로 바꿀 방법’을 생각해 오라는 숙제에 트레버는 `pay it forward’ 프로젝트를 생각한다. 이 프로젝트는 트레버의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 트레버가 3명에게 도움을 주고 이를 돌려받는 것(pay it back)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람 3명에게 그 친절을 전달하도록(pay it forward) 한다. 트레버는 엄마와 선생님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트레버의 순수한 생각만큼 세상사는 그리 만만하지 않고, 그의 노력은 번번이 좌절되고 만다. 과연 그의 세상 바꾸기는 성공할 수 있을까?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가 나온 지 20년이나 지났지만, 이 영화의 감동과 메시지는 여전히 내게 남아 있다. 트레버의 pay it forward 프로젝트는 세상이 더 나은 세상으로 변하길 원한다면, 그 변화는 바로 ‘나로부터’ 시작될 수 있으며, 나의 ‘작은 친절’이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고기에게 물에 관해 묻는 일>은 바로 이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의 원작자인 캐서린 라이언 하이드가 쓴 장편소설이다. 원래 수사물, 법정 드라마, 스릴러, SF가 취향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피가 나는 장면들이 보기가 힘들어졌다. OTT 서비스의 콘텐츠들이 늘어나면서 마치 어디까지 잔인함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경쟁하는 듯했다. 입소문에 찾아보기는 하면서도 그런 장면이 나오면 점프를 했다. 잔뜩 긴장하고 보는 탓에 보고 나면 근육통과 악몽을 동반하는 장르물보다는 점점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메시지를 담은 <원더>와 같은 휴먼 드라마나 픽사의 <코코>, <루카> 애니메이션으로 취향이 옮겨갔다. 친구들은 그런 휴먼 드라마야말로 판타지며, 현실 도피라고 했다. 그럼에도 ‘이웃에게 먼저 말을 걸고 낯선 사람들을 알고자 할 때 우리는 서로를 돌볼 수 있으며, 우리 모두의 삶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작가의 믿음에 감염되고 작품을 통해 조금이나마 친절해지는 용기를 얻기 위해 책을 들었다. 서론이 길었다.
그들은 백인이고, 그 때문에 저절로 뒤따르는 많은 특권들을 누리고 있어. 그렇지만 그게 특권이란 걸 자신들은 모르지. 왜냐하면 특권을 누리지 않은 날이 그들 삶에는 없었거든. 그들한테 상대의 인종에 따라 다르게 처신하는지 물어봐. 그럼 아니라고 대답해. 많은 경우 그 사람들은 자기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건 마치 물고기한테 물에 관해 묻는 것하고 같은 거야. 물고기는 물에 둘러싸여 있어. 매 순간 그 속에서 헤엄치지. 하지만 물고기는 이렇게 말할걸. ‘물이라뇨? 당신이 말하는 물이란 뭔가요?’ 아주 종종 그게 진실이야. p.140
<물고기에게 물에 관해 묻는 일>이라는 제목은 책의 내용을 상상하기에는 엄청난 상상력을 요구받는다. 읽고 나니 머리가 끄덕여지는 제목이지만, 처음 책 제목만 제목으로만 봐서는 솔직히 문학책보다는 자연과학이나 종교 분야의 책 제목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좋겠는데, 여러모로 한국어 번역본의 책 제목이 아쉽다. 참고로 원제는 'HAVE YOU SEEN LUIS VELEZ?'다. 한국어판의 제목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담고 있다면, 원제는 작품 줄거리의 줄기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은 16살 흑인 소년, 레이몬드와 그의 이웃인 밀리 할머니다. 흑인 아빠와 백인 엄마 사이에 태어난 레이몬드는 엄마의 재혼으로 가족 중 혼자만 유일하게 흑인이다. 연애나 이성에도 관심이 없고, 가족과 학교 어느 곳에서도 소속감을 못 느끼던 레이먼드는 여러모로 자신의 존재가 유별난 외톨이 같다. 밀리 할머니는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고 나이는 무려 92살!! 성별, 나이, 인종... 두 사람의 공통점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너는 이렇게 와주었잖니.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아. 대부분은 서둘러 지나가지. 내가 가까이 다가가려 할수록 더 바삐 지나쳐 가. ‘아 몰라요’라고 말해. 입술로 말하지 않고 서두르는 행동으로 보여 주지. 그들은 ‘당신은 내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에요. 당신은 내 공동체가 아니랍니다. 당신은 그들이지요. 우리가 아니라.’라고 해. 그리고 내가 누구나 알고 있는 경계선을 넘어 그들에게 말을 건 행동 자체가 두려움을 안겨줬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아. 그게 요즘 사람들 모습이야.’
p.30-1
두 사람이 복도에서 처음 만난 날, 밀리는 눈에 초점이 잡혀 있지 않은 상태로, “루이스 벨레즈라고 알아요?”라고 물었다. 오싹한 느낌, 레이먼드가 느낀 밀리의 첫인상이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야 레이먼드는 밀리가 아주 나이가 많고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그동안 밀리를 돌봐온 루이스가 갑자기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되고 레이먼드는 밀리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용기를 내며 조금씩 밀리에게 다가간다.‘계단을 내려서는 것조차 목표가 될 만큼 엄청난 도전에 맞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레이먼드가 밀리에게 좀 더 다가가자,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레이먼드가 밀리에 대해 오해를 했던 것은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낯선 존재에게 다가가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레이먼드는 좀 더 나아가 용기를 더 내보기로 한다. 밀리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루이스 벨레즈를 꼭 찾아드리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레이먼드의 '루이스 벨레즈 찾기'프로젝트는 성공할 수 있을까?
“그런데 비정상이 뭐니? 정상은 규범과 같은 거고, 규범은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느끼는 거지.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느끼는 것.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그렇게 느끼지 않는 사람이 소수이긴 하지. 그런 의미에선 비정상이야. 그런데 우리는 말할 때 그런 의미로 ‘비정상’이란 말을 쓰진 않아. ‘나쁘다’는 뜻으로 쓰잖아. 그러나 그게 나쁜 건 아니지. 그냥 그런 거야. 어떤 사람은 그냥 그래. 아마 학교 친구들은 그걸 나쁘게 받아들일지도 몰라. 그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비웃어. 그래야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거든. 그렇지만 그건 잘못된 감정이야. 그들은 결코 더 안전하지 않아. 그들은 단지 그렇다고 느낄 뿐이지. 세상은 너무 어리석은 나머지 차이조차 가늠할 수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
p.119
우리는 종종 지금 자신이 누리는 것들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졌다고 착각한다.(물고기에게 물이 당연한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온 것은 아닐까?) 하지만 우리의 삶은 크든 작든 타인의 배려와 희생으로 이루어져 있다. 누군가의 작은 호의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타인을 향한 나의 친절은 상대방뿐 아니라 나의 삶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 싶던 12살 트레버가, 세상을 향해 먼저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던 16살의 레이먼드가 숨 쉬고 있다. 잠시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주위를 살펴보자. 지금 나의 작은 관심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시작이 될지 모른다.
“너 혼자의 책임은 아니지만 그래도 난 네가 그들에게 사랑을 줘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들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큰 사랑을 말이야. 왜냐하면 네가 먼저 시작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거든. 누군가는 먼저 시작해야 하는 일이야. 그게 너여야 한다는 게 공평한 건 아니지. 하지만 언제나 마찬가지야. 삶은 늘 공평하지가 않아.”
p.47-8
<물고기에게 물에 관해 묻는 일>
- 캐서린 라이언 하이드 | 이진경 옮김 | #뒤란, 2020
- 분야/페이지 | 문학 > #영미소설 / 4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