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서노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PLS 이혜령 May 18. 2022

인종이라는 위선적 신분제

책 <카스트>

p.469-70

“신이 아무것도 구별하지 않은 곳에서 카스트는 인간을 차별한다.”
p.45


<카스트>는 오랜 세월에 걸쳐 고착화된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실상을 샅샅이 파헤친 보고서다. 개인의 편견으로 비치기 쉬운 ‘인종차별’이 사실은 오랜 세월 견고하게 다져지고 이어진 미국의 시스템이며, 지금의 미국 사회ㆍ정치ㆍ경제 체제의 근간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카스트 체제는 조상, 신체적 특징 등 변하지 않는 특징을 기준으로 삼아 사회 구성원 일부를 ‘열등한 족속’으로 분류하고 소수의 이윤 독점과 권력 세습이 가능하도록 도왔다.


인류는 잘못된 카스트 때문에 불가해한 손실을 너무 많이 겪었다. 나치의 손에 살해된 1100만 명의 사람들, 인간을 노예로 삼을 권리를 두고 벌인 내전으로 죽은 75만 명의 미국인들, 인도와 미국 남부의 농장에서 천천히 죽어가며 재능을 썩힌 수백만 명의 군상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창의성이나 명민함은 영원히 사라졌다. 그들이 꿈을 실현할 권리, 어떻게든 살아갈 권리를 허락받았다면 하나의 종으로서 우리는 어디쯤 가고 있었을까? 그들로 인해 수혜를 받았다고 추정되는 자들이 스스로 갇혀 있던 환상에서 벗어나 그들 자신의 에너지를 분열보다 인류애를 실천에 쓰거나 암과 굶주림을 해결하거나 기후변화의 실존적 위협을 막는 데 썼다면, 이 행성은 지금 어디를 돌고 있을까?
p.456-7


다소 어렵다고 느껴질 수 있는 주제일 수 있으나, 나치의 인종주의, 연극의 배역, 그릇 라벨, 오래된 집, 탄저균과 에볼라 등에 미국의 카스트 체제를 비유하며 다양한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며 쉽고 흡입력 있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혐오와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요즘, 이 문제를 근원부터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시의적절한 책이라고 생각되지만, 한편으로는 팬데믹 이후 심각하게 늘어나고 있는 아시아계 혐오범죄 문제에 대한 사례와 진단이 아주 부족해 보인다. ‘인종 문제가 아니라 카스트의 문제’라고 강조한 것에 비해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차별 문제를 중심으로만 이야기되고 있는 점은 아쉬움에 남는다.  


알고 지내는 모든 이로부터 미움받고, 배척받고, 추방당할 각오까지 되어 있지 않다면, 모두가 그 란트 메서처럼 되는 것은 불가능할 듯하다. 시대를 막론한 란트메서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지금 이 시대의 란트메서에겐 무엇이 요구되는가?  p.11


책의 처음을 장식했던 아우구스트 란트메서의 이야기가 이미 이 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고 생각된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시절에 찍힌 한 흑백 사진 속 아우구스트 란트메서가 보인다. 그는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표시로 오른팔을 뻗어 경례하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 속에 홀로 팔짱을 끼고 경례를 거부했다. 란트메서는 유대인을 직접 만나봤고 관계도 맺고 있었기에, 지배 카스트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의 방식으로 그에 맞선 행동을 한 것이다. 삼엄했던 그 시절, 그의 행동은 무모한 짓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소신을 꺾지 않았다. 결국 란트메서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치 정권도 무너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프리카에는 흑인이 없어요.” (...) “아프리카인들은 흑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그보우이고 요루바이고 에웨이고 아칸이고 은데벨레입니다. 그들은 흑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냥 그들일 뿐이에요. 그들은 그 땅에 사는 인간입니다. 그게 그들이 자기 자신을 보는 방식이고 그게 그들의 정체성입니다.” (...) “그들은 미국이나 영국에 와서 흑인이 되었습니다. 흑인이 된 건 그때부터예요.”  p.79         



시스템에 젖어 있다 보면 내가 가진 것은 마땅히 내가 가질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이는 오랜 세월에 걸쳐 일어났던 일들이 모여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발판이 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무지와 잘못된 세상에 대해 침묵해온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인종문제가 단순히 소수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불공정한 사회 시스템으로 인한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각성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팬데믹 시대를 지나오며 우리가 깨달은 사실들, '우리 인간이 실제로 하나의 종으로 연결되어 있고, 모두 비슷한 존재이며, 우리가 믿고 싶은 것 이상으로 서로에게 의존하는 존재라는 사실'(p.256)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처럼 생긴 사람들이 수백 년 전에 했던 일에 대해 우리는 개인적으로 책임이 없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못된 짓을 할지는 우리가 책임질 문제다.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해를 끼치고 상처 주게 만든 모든 판단에 대해서는 우리 각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처럼 생긴 사람들이 저지르거나, 우리처럼 생긴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모여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발판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이는 우리 책임이다. 우리 이전에 일어난 일로 인해 우리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도 유리한 입장에 선 것과, 아무런 잘못 없이 부담을 갖게 됐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우리와 다르게 생긴 사람들이 이익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우리가 책임질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무지에 책임을 져야 하며, 시간을 가지고 마음을 열고 각성한 뒤 우리의 지혜에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 시대와 공간에서 우리가 한 행위나 악행에 책임을 져야 하며, 그에 따라 다음 세대의 판단을 기다려야 한다. p.469-70



<카스트>

- 이저벨 윌커슨 지음 | 이경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 2022

- 분야/페이지 | 사회과학 > 인권문제 / 500쪽

매거진의 이전글 불의를 향한 분노의 연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