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H마트에서 울다>
“나는 지난 5년 사이 이모와 엄마를 모두 암으로 잃었다. 그러니 내가 H마트에 가는 것은 갑오징어나 세 단에 1달러짜리 파를 사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두 분에 대한 추억을 찾으려고 가는 것이기도 하다. 두 분이 돌아가셨어도, 내 정체성의 절반인 한국인이 죽어버린 건 아니라는 증거를 찾으려는 것이다.” p.22
<H마트에서 울다>를 읽다가 한 번이라도 울컥거리지 않은 딸이 있을까?
물론 섣부른 일반화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엄마와 딸의 관계는 참 이상하다. (물론 모든 엄마와 딸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자우너의 유년 시절, 엄마와의 기억을 되짚어보면 절대 아름답지만은 않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드라마틱하게 관계가 변하는 일은 없었다. 그 관계는 어느 때는 물과 기름 같아 조화롭게 섞이는 법이 없었지만,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없는 게 아니다. 세상 이렇게 서로 솔직한 엄마와 딸의 관계가 있을까? 서로를 이해할 여유를 가진 순간 엄마는 그녀 곁을 떠난다.
“너 중국인이니?”
“아니.”
“그럼 일본인이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음, 넌 그럼 뭐야?”
나는 그 아이에게 아시아 대륙에는 두 나라만 있는 게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무 대답도 못했다. 내 얼굴에, 원래 살던 곳에서 추방된 존재로 읽어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마치 내가 무슨 외계인이나 이국적인 과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넌 그럼 뭐야?”는 열두 살인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왜냐하면 그 말은 내가 눈에 띄는 사람이고, 존재를 식별할 수 없는 사람이고, 집단에 속하지 않는 사람임을 기정 사실화하기 때문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늘 내 절반이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했지만, 이젠 갑자기 그것이 내 본질적 특징이 될까 봐 두려워져 그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p.164-5
<H마트에서 울다>는 이민 2세대이자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안고 살아온 작가의 성장기이자 일찍 떠나보낸 엄마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담은 추도사이기도 하다. 작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국적이 다른 한국계 미국인으로 어린 시절부터 미국에서든 엄마의 고향인 한국에서든 항상 낯선 타인으로 외롭게 성장해왔다. 그럼에도 작가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의 가족을 만나러 들렀던 한국의 기억으로 채워져 있고, 한국을 고향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엄마가 떠난 후, 작가는 ‘엄마가 없는데, 내가 여전히 한국인이긴 할까?‘라며 다시금 방황한다.
버스가 도시를 빠져나가면서 불현듯 서울이 낯설게 느껴졌다. 내 어린 시절의 목가적인 유토피아가 뭔가 다른 곳으로 변해버린 것처럼. 이제 더는 할머니와 은미 이모가 없는 그곳은 내가 속한 곳이라는 느낌이 조금 희미해졌다. p.194
H마트는 한국 식재료를 전문으로 파는 식료품 가게로, H는 ‘한아름’의 줄임말이다. 그녀에게 H마트는 엄마 생각에 눈물부터 나오는 곳으로 엄마의 흔적이 찾을 수 있는 곳이자, 고향의 향수를 채워주는 곳이다. 엄마와 함께 먹던 음식을 기억하고 요리법을 찾는 과정에서 엄마와의 시간을 추억하고 엄마를 조금씩 이해해간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위안을 얻고 회복해나간다.
“괜찮아, 괜찮아.” 엄마가 말했다.
내게 너무도 익숙한 한국말. 내가 평생 들어온 그 다정한 속삭임. 어떤 아픔도 결국은 다 지나갈 거라고 내게 장담하는 말.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나를 위로했다. 엄마의 모성이, 엄마가 느꼈을 테지만 능숙하게 숨겼을 무진장한 공포를 제압해버린 것이다. 엄마는 무슨 일이든 어찌어찌 잘 풀릴 거라고 내게 말해줄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난파선이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담담히 지켜보고 있는 태풍의 눈과도 같았다. p.203
- 미셸 자우너 지음 |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2022
- 분야/페이지 | 문학 > 영미에세이 / 4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