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목소리 순례>
진짜 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의미로 가득하다.
진짜 말은, 오래 시간을 들여서 마음 한구석에 조용히 꽃을 피운다.
진짜 말은, 보이지 않는 따뜻한 손이 되어 마음에 닿는다. p.123
언젠가 농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인 자녀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고 농인으로 키우는 농인 가족의 이야기를 읽고 충격에 빠진 적이 있다. 아동 학대가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두 부부는 그들의 상황을 결핍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축복으로 여겼다. 농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청인들은 가지지 못한 다른 감각들을 키울 수 있었고 자녀에게 그 능력을 포기시킬 수 없었다.
여전히 많은 비장애인은 장애를 ‘결핍’으로 바라보고 ‘없애고 극복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지금 사회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부부가 내린 결정에 온전히 응원과 지지를 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의 결정을 계속해서 복기하며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조금씩 의심의 싹을 내렸으면 한다.
글을 쓰다 보니 너무 ‘장애’에만 포커스가 맞춰진 것 같다. 하지만 《목소리 순례》는 누군가는 가지고 누군가는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서로 다르고 다양한 우리의 이야기고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다. 장애에 대해 다른 시선을 갖게 해주는 책일 수도 있지만, 다양하고 낯선 존재에 대한 이야기고, 사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진의 가능성을 넓혀주는 책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이 책이 전하는 목소리는 너무나도 다양하게 다가갈 것이라 믿는다.
보태기 | 이 글에서 ‘목소리’라는 표현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청인 중심의 사회에서 만들어낸 관습적인 표현이 아닌가, 염려됐기 때문이다. 차별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대체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작가 또한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책의 제목 또한 《목소리 순례》인데, 이 단어를 피해 갈 방법이 없지 않을까.
p.7
'목소리'는 전해지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실감한다.
'목소리'는 스며들어 이미 있다. 나는 그렇게도 실감한다.
나에게 사진을 찍는 것은, 잃어버린 '목소리'를 다시 한번 순례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p.14-5
아무리 열심히 말하고 들으려 해도 스스로는 확인할 길이 없는 발음을 질책당하고 교정당했다.
유년기 내내 나는 어디에 지뢰가 있는지 모를 발음훈련 선생님의 귀를 향해 두려움에 떨면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발음훈련이 무의미하다거나 나쁘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음성을 타인의 귀에 내맡기는 것, 그리고 계속해서 타인의 귀에 의해 내 목소리의 좋고 나쁨이 결정되는 것, 이런 일들은 결과적으로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힘을 죽여버렸다.
p.117
그들은 결코 강하지 않다. 그렇지만 자신의 슬픔과 약점을 얼버무리지 않고 포용하면서, 나아가 자신의 발로 일어서길 선택한 사람들이다. 약점도 슬픔도 꼴사나움도, 그 너머에 있는 기쁨도, 전부 내가 스스로 결정하겠다고 결의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홀로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아는 사람일수록 홀로 살아가는 다른 사람을 만나면 고유한 한 개인으로 대한다. 상대를 신뢰하며 그냥 놓아둘 줄 안다.
p.138
대화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 끝났어.’ ‘도저히 서로 이해할 수 없어.’ ‘공유할 수 없어.’ ‘전해지지 않아.’ 이런 고통과 괴로움에서 시작되는 것이 대화였다. 서로 다름을 통감할수록 ‘당신’이라는 타인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도 새로워진다.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빛이 더해진다. 대화란 이해할 수 없는 다름을 서로 받아들이면서 그렇게 다름에도 관계를 맺기 위해 하는 행위였다.
p.162
사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티 없는 풍경이 펼쳐지는 창으로 그 자리에 있게끔 하는 터무니없는 힘이 사진에는 있다. 그 사진 덕에 사진의 가능성을 믿을 수 있었다.
p.219
음악이란 내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는 줄 알았는데, 실은 태어난 순간부터 내 속에 있었다. 모든 생명은 한가운데에 '음악'을 품고 있다.
나는 음악과 살고 있었다.
p.227
필담과 수어 통역은 ‘쓸데없는’ 대화를 생략하고 의미만 요약하여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분명히 용건을 해결하는 데는 그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의미 있는 말만으로 마음이 통하느냐면,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가치 없어 보이는 사소하고 ‘쓸데없는’ 말에 모든 인격이 응축되기도 한다. 그처럼 ‘쓸데없는’ 대화가 대수롭지 않게 쌓인 자리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싹튼다.
사이토 하루미치 | 다다서재, 2022
분야/페이지 | 문학 > #에세이 / 2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