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를 믿지 않는 이방인의 오로빌 산책

09 타밀나두, 오로빌 |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공동체

by DAPLS 이혜령

인류가 꿈꿀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실험실, 오로빌 방문은 설렘보다 씁쓸한 확인에 가까웠다. 한때는 이곳이 제안하는 대안적 삶에 매력을 느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건, 꿈꾸는 법보다 의심하는 법에 더 능숙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제 내게 유토피아는 동경의 대상이라기보다 거리를 두고 지켜보게 되는 낯선 풍경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함께 사는 새로운 방식’을 꿈꾸며 모인 이들의 신성한 실험실 앞에서 끝내 냉소를 내려놓지 못한 불경한 이방인들이었다.


이번 여정의 중심은 폰디체리였고, 오로빌은 차를 빌린 김에 잠시 들른 경유지였다. 오로빌은 1968년 ‘마더’ 미라 알파사와 스리 아우로빈도의 비전을 바탕으로 거대한 사회적 실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공동체다. 이 거대한 실험에 유네스코의 지원을 비롯한 국제적 관심도 꾸준히 이어져 왔다. 남인도 타밀나두의 황량한 땅에서 출발해 지난 55년간 3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고, 메마른 황무지를 숲으로 바꿔왔다. 현재는 전 세계 60개국에서 모인 3,000여 명의 거주자가 교육, 의료, 폐기물 처리 등 도시 시스템을 자체적으로 운영한다. 국적과 종교를 넘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험하는, 말 그대로 거대한 ‘살아있는 실험실’이다. 이곳은 하나의 고정된 정의로 설명되기 어렵다. 오히려 각자가 실천하는 다양한 삶의 방식 속에서 그 의미가 형성된다.


오로빌의 중심에는 황금빛 돔 형태의 명상 공간, 마트리만딜(Matrimandir)이 있다. 외형만으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오로빌의 상징적 건축물이다. 하지만 막상 그 공간을 마주했을 때 느낀 감정은 경외감보다는 묘한 이질감에 가까웠다. 황무지 한가운데서 불쑥 솟아오른 황금빛 돔을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은 어딘가 비현실적이고 기이하게 느껴졌다.


종교를 초월한 명상의 공간을 표방하지만, 공동체 곳곳에 걸린 창립자의 초상화는 북한의 지도자 사진을 볼 때와 같은 묘한 권위의 기운을 연상시켰다. 이상과 상징 구조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느껴졌다. 이것이 곧 모순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상이 현실 속에서 구현되는 과정은 언제나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처럼 보였다.


이 이질감은 경제 구조를 마주하면서 더 또렷해졌다. 탈자본주의적 가치를 지향한다는 공동체의 관문에는 역설적이게도 기념품숍들과 카페가 자리해 있었다. 방문객은 자연스럽게 소비 동선을 따라 이동한다. 오로빌 근교 유명한 관광지인 폰디체리 시내 곳곳에서 판매되는 오로빌산 제품들은 이미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자본주의를 벗어난 자급자족의 삶을 지향한 이 공동체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결국 현실의 자본 시스템과 연결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이상을 유지하기 위해 세속의 자본을 끌어와야 하는 이 역설은 씁쓸하지만, 이 또한 현실이었다. 이상과 자본은 서로를 부정하면서도 결국 서로의 그림자가 되어 공존하고 있던 것이다.


공동체의 이상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곳은 다름 아닌 노동의 현장이었다. 마트리만딜 주변으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인근 마을에서 온 노동자들이 뙤약볕 아래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철학과 공동체의 비전을 논하는 공간 바로 곁에서, 누군가는 묵묵히 몸을 쓰고 있었다. 자본을 가진 거주자와 생계를 위해 일하는 노동자. 이상과 현실의 대비는 한 화면 안에서 선명하게 겹쳐졌다. 황금빛 구조물과 그 기반을 다지는 이름 없는 노동의 손길 사이의 간극은 오로빌이라는 실험이 아직 진행 중임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수많은 발길이 이곳으로 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오로빌이 완벽한 정답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곳이 우리가 외면해 온 질문을 끈질기게 붙들고 있기 때문 아닐까. ‘함께 사는 법’은 가능한가, 인간은 경쟁 없이 공존할 수 있는가, 이상은 현실 속에서 어떻게 타협해야 하는가.

한때 미디어에서는 오로빌을 지상낙원으로 소개하기도 했지만 오로빌은 그런 곳은 아니었다. 대신 이상과 현실이 끊임없이 부딪히는 거대한 실험에 가깝다. 짧은 방문과 피상적인 시선으로 이곳을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냉소를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 우리의 태도 또한 솔직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유토피아를 쉽게 믿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어쩌면 오로빌의 진짜 의미는 완벽한 이상이 아니라 ‘과정’에 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긴장과 질문, 그리고 그 사이에서 계속해서 조정되고 재해석되는 가치들 속에 있을 것이다. 또한 사막 같은 황무지를 숲으로 일궈냈고 50년 넘게 ‘함께 사는 법’에 대한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사막 위에 세워진 이 공동체는 오늘도 모순과 긴장을 끌어안은 채 진화하고 있다.

오로빌은 낙원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