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동생은 가끔씩 연애프로그램(연프)을 본다. 남이 썸 타고 연애하는 걸 보는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은 아니고, 서로 실시간 코멘터리를 주고받는 재미만을 위한 취미다.
어느 연프의 모 회차, 다 같이 모여 야외 바비큐 파티를 하는 장면이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다들 열심히 고기만 먹는다. 첫인상에 기반한 호감의 기류나, 스몰 토크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거늘.
"짝 찾으러 나온 사람들인데 왜 이렇게 다들 소극적이래."
"그러게 재미 하나도 없다."
역시 나와 동생은 한 마디씩 했다. 그리고 동생이 아주 초심자 같은 질문을 했다.
"근데 눈치만 보고 아무도 분위기를 안 띄워? 누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바보야 당연히 가만히 있어야지."
"왜?"
쯧쯧, 나는 혀를 찼다.
"아무도 안 살리는 분위기를 내가 왜 살리냐? 저기서 내가 주도하면 난 MC 되는 거야. 연애 상대 찾으러 나왔다가 유재석 돼서 돌아간다. 그냥 가만히 있어야, 중간이라도 간단다."
"오."
두 번째 초심자 같은 질문이 들어왔다.
"근데 만약에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 그러면?"
"바보야! 성립이 안 되는 말이잖아. 예쁘고 잘생기면 더 아무것도 안 하지. 그냥 가만있어도 옆에서 다 액션이 오는데."
"... 오!"
나는 이렇게 또 한 번 동생에게 인생의 진리를 가르쳐주었다.
겪어보지 않았다면 절대 모를.
언니, 누나, 오빠, 형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인생 1회 차] 족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족보를 전승해 주냐의 문제는 그다음이지만. 내가 겪은 인생의 크고 작은 던전을 열심히 헤쳐 나간 후, 선뜻 그 공략집을 준다.
이유는 단 하나, 너는 좀 덜 쪽팔리라는 의미로.
그리고 이야기를 나눠보면 내 동생은 그 족보를 잘 활용하고 있는 것 같다.
언젠가 동생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소위 썸을 타거나, 누군가를 소개받을 때 본인이 팍 식는 포인트가 있는데, 그게 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말에 나는 띠용? 했다.
"어딜 가자, 뭘 먹자 이런 얘기하는 게 너무 싫어."
"뭔 소리야 얘기 안 하면 어떻게 알아."
"아니 그게 아니고."
우리는 여행이나 나들이도 둘이서 자주 간다. 특히 해외여행에서는, 특별히 부딪히는 것 없이 잘 놀다 온다. 그러면 나는 계획했든 즉흥적이든 우리 둘의 취향이 맞는 것(혹은 곳)을 알게 되면 꼭 들른다. 동생은 그런 포인트를 얘기하는 것이었다.
가령, 일본 여행에서 아사쿠사에 갔을 때는 거리에서 파는 온갖 맛의 당고를 다 사줬다.(당고 노래를 부르길래)
홍콩에 갔을 때는 질릴 때까지 망고 주스와 홍콩식 와플을 사줬다.(동생은 간식을 좋아한다.)
영화를 보러 가면 둘이 워낙 군것질을 좋아해서 편하게 먹으려고 커플 좌석으로만 갔었다.(팔걸이가 없고 자리가 조금 더 쾌적하다.)
놀러 갈 때는 웬만하면 대중교통이 아닌 차를 이용하는 편이다.(동생은 면허가 없다. 운전은 늘 내 몫이다.)
예시가 거진 먹을 것 뿐이지만 이런 초코파이 정 같은 상황에 익숙해지다 보니 동생은 어디 가자, 이거 먹자, 저거 하자, 이렇게 말하는 것도 눈치를 주는 것도 싫어졌다고 한다. 철 지난 유행어지만 알잘딱깔센(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의 기준이 높은 편이라고.
가끔씩 내가 농담처럼 말했던 '내가 너한테 해주는 것보다는 더 대접해 주는 사람을 만나렴.'의 영향일 수도 있겠다.
인터넷에서 종종 보는 썰이다.
누나가 동생을 데리고 패밀리레스토랑에 가서 이것저것 음식을 시켜주며 '너는 친구들이랑 이런 데 왔을 때 당황해하지 마.' 했다는 이야기. 비슷한 입장에서, 동생에 대한 대단한 사랑과 애틋함이라기보다는 내가 겪은 쪽팔림을 너는 겪지 말라는 의미가 더 클 것이다. 사실 나도 처음 아웃백에 갔을 때는 주문하는 법을 몰라서 전날 열심히 공부를 했던 기억이 있다...(근데 막상 가보니 친구들도 다 헤매긴 했다)
-언니 이번 주에 집 내려와라.
"왜?"
-초코 퐁당 요거꿀떡 먹자.
"오."
SNS에서 아주 핫한, 먹방 유튜버가 만든 간식이 있다. 전부터 사 먹어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남자친구가 선물로 이 간식을 보내줬다는 것이다(!).
나의 족보를 바탕으로 행복한 연애를 하고 있구나.
다만, 이 족보의 한 가지 단점은
알잘딱깔센의 역할이 나에게 치우쳐졌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