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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성이 Jun 25. 2020

반짝이는 영혼으로 시대를 넘다

[제인 에어], 샬롯 브론테

중학 시절,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갓 부임한 젊디 젊은 담임 선생님은 도시에서 나고 곱게 자란 교장선생님 댁 막내딸이었다.

또래 여학생들에게는 낯선 외부자였고, 남학생들에게는 당돌한 침략자였다.

여리여리한 외양과 달리 강단 있는 모습으로 남학생들 기선제압을 했기 때문이었다.


새 학기가 지나고 얼마 안 되어 친구들과 선생님 숙소에 놀러 간 날.

작은 방 한편에 빼곡히 꽂혀있는 짙은 고동색 양장본의 세계문학전집,

아이들이 선생님 방을 둘러보는 사이에 난 그 앉은뱅이 책상에 꽂혀있는 책들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책을 좋아하는구나?, 여기 있는 책 언제든지 빌려서 읽어도 좋아”하셨다.


그 후로 선생님 방은 명작동화에서 세계 고전문학으로 갈아타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정거장이었다.

큰 세상과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고 꿈꾸게 한 시공간이었다.


그 무렵 읽은 책들의 내용은 희미해졌지만, 책을 읽었을 그때의 감동과 정서는 세월 속에 더욱 또렷해져만 간다.

밝고 명랑한 23살의 담임 선생님이 처음 골라주신 책은 “제인 에어”였다.

제법 길었는데 다 읽고 나서 제인 에어처럼 나도 이 답답한 시골을 벗어나야겠다 하는 다짐과

로체스터는 너무 나이가 많은데 정말 사랑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은 연애소설로 기억하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그때 읽었던 책들을 다시금 읽어보고 싶었다.

세월과 인생의 흔적이 가슴에 훈장처럼 새겨진 지금 그 책들은 내게 어떻게 다가올까 궁금했다.

제인 에어를 다시 만난 이후로 지난 수 십 년 동안 제인 에어를 잊고 살아온 것이 미안해서 마음이 무겁기도 했고, 한편으로 다시 찾은 친구처럼 반가움에 읽는 내내 가슴이 쿵쾅거렸다.


열 살 나이로 친척 집에서 천덕꾸러기로 지내는 모습에서는 어린 막내딸과 같이 느껴서 당장이라도 소설 속에 뛰어들어가 한번 안아주고 싶었다. 로우드에서의 참담한 시간들을 버텨내는 모습 속에서는 내 젊은 시절의 고단함과 닮아있어 눈물과 함께 응원의 박수를 내내 멈출 수 없었다.

자신을 고용한 주인님이자 귀족인 로체스터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지켜내는 담백한 솔직함이 부럽기도 했다.

열악한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신념과 열정과 성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모습 속에 숨어있는 외로움과 슬픔과 고민들이 못내 떨쳐지지 않았다.


중세 시대의 엄격함과 뿌리 깊은 관습들이 강건하게 자리 잡았을 1800년대 영국 사회에서 철저히 배척된 환경에서 한 인간이 아니 여성이 살아낸 시간들을 소설에서 다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작가 샬럿 브론테 역시 여성 작가로서의 차별과 편견을 피하기 위해 남성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작품은 독자에게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고백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 몰입하여 읽다가도 “독자여”하는 문구에서 흠칫 정신을 차리게 되기도 한다.

젊은 여성 작가의 필력은 대단해서 작품 속의 인물은 그 디테일이 너무나 섬세해서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인물들의 모습이 연상이 되었다.


당시의 풍경과 의상은 물론 저택의 내부 분위기까지 충분히 그려낼 수 있을 만큼 묘사와 서술의 디테일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그려져 긴 분량의 소설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15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생생한 느낌은 작가 샬럿 브론테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라 그런지 천재적인 작가의 실력인지 마냥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아무에게도, 아무것에도 기댈 수 없는 제인 에어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간다.

그 과정 중에서 좌절하지도, 실망하지도 않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며 배우고 성장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내가 나 자신을 아껴야 해
외로울수록 친구나 의지할 사람이 없을수록
그리고 더 버티기 힘들수록
나는 더욱 스스로를 존중해야 해


제인 에어의 적극적인 삶의 자세는 그녀의 타고난 환경과 외모와 사회적인 제약 그 무엇도 그녀의 삶을 방해하지 못한다.

제인 에어의 당당한 태도는 신분도, 나이도, 재산이 주는 차이에서도 휩쓸리지 않을뿐더러 까칠한 중년의 주인 로체스터의 사랑을 얻기도 충분했다.


물론, 제인 에어의 보석 같은 매력을 알아본 로체스터 역시 당시엔 보기 드문 사람이었을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사랑을 위해 인습과 관습의 망토를 벗어버린 멋진 사람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밖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지금 현재에서도 쉬이 목격되는 인물 군상들로 세대와 국적을 불문하고 인간의 본성은 방심할 때 어김없이 드러나는 것임이 증명되기도 한다.

연약한 인간들은 종교와 사랑과 신념을 핑계로 운명을 외면하거나, 운명 앞에 무릎을 꿇게 마련이다.

인간이 끊임없이 성장하고 반성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인 에어의 마지막 여정까지 함께 하면서 아쉬웠던 점은 하루아침에 상속녀가 되어 버린 설정 때문에 그 당돌하고 당찬 지난 삶의 항로가 자칫 한낱 고생담으로 묻혀버리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잠시 들었던 점이다.


강인하고도 연약한, 날카롭고도 때론 부드러운 모습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간 제인 에어는 앞으로 내 가슴에 가장 매력적인 여성으로 그 왕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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