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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성이 Jun 04. 2020

피아노와 맹장 수술

얼마 전, 이사를 하면서 큰 마음을 먹고 피아노를 처분했다. 

헐값에 팔려나가는 피아노를 보고 난 그 자리에 앉아 한동안 먹먹해진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피아노를 직접 연주하지는 못했지만 피아노가 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린 시절의 허기를 달랠 수 있었던 든든한 버팀목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학년, 툭하면 배앓이를 했다. 

이상하게 꼭 식사 시간이 되면 배가 아팠다.

배가 아프단 소리에 엄마는 평소 입이 짧았던 것을 구실 삼아

 "입에 맞는 게 없으니 먹기 싫어서 그런 거지?"

라며 야단을 치셨다.

그러면 아빠는 아무 말없이 여섯 식구가 빙 둘러앉은 둥근 밥상을 살짝 밀어내고 아빠의 뒷자리를 내어주셨다. 

아빠의 등 뒤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으면 신기하게도 배 아픈 것이 가라앉곤 했다. 그것은 잦은 배앓이의 임시방편 처방이었다. 


1년 가까운 배앓이의 원인은 만성 맹장염이었다.

당시 동네에서는 수술이라는 것이 참 드문 일이라 인근 도시의 큰 병원에서 수술과 입원을 하는 일은 온 동네의 관심사였다. 

우리 집에서도 수술은 내가 처음이었다. 

엄마와 나, 단 둘만의 일주일 간의 병원생활은 둘 모두에게 호사였다. 

남동생이 셋인 집의 맏딸이었던 내가 엄마를 온전히 1주일 동안 차지할 수 있었고, 일상과 가사를 벗어난 시간이 엄마에게는 낯설고도 반가운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맹장염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그 기간이 집안의 모든 것이 내게 맞춰졌던 유일한 시기였다.

비록 짧디 짧은 시간이었지만.


퇴원을 하고 난 후 절친이었던 친구가 내가 병원에 있던 동안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맞벌이를 하시는 친구 엄마는 선뜻선뜻 용돈을 거침없이 내어주시는가 하면,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새 옷을 사다 입히는 등 아낌없는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던 터라 나는 그 친구가 늘 부러웠었다.

 

그 시절 마땅한 학원도 없었을 때였다. 

남동생들은 새로 생긴 태권도장에 주르륵 다니기 시작했다.

나도 보내달라고 하니 “여자가 무슨 태권도냐며 주산이나 배워라” 하셨다. 주산보다는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피아노는 우리 집에서는 언감생심, 피아노를 왜 배워야 하는지도 모르실 부모님이라 더 이상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맹장수술을 받은 직후라 부모님의 보살핌이 극진할 그 틈을 빌어 용기 내어 

"나도 피아노 배우고 싶어, 누구도 피아노 배운단 말이야!!"

그러자,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네 수술비가 얼마인 줄 아니? 
갑자기 병원 다니느라 돈이 얼마나 들었는데 가뜩이나 돈이 없는데 이럴 때 아파가지고... 
그런데 넌 피아노 타령이냐?”

얘기하는 내내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어 터질 것만 같았는데 한순간 맥이 빠지니 갑자기 설움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엄마의 원망 어린 눈길과 냉랭한 말투를 피해 내 방으로 도망쳤다. 아직 아물지 않은 수술 흉터를 부여잡고 참 많이 울었다. 

‘내가 아픈 것이 내 탓이야? 내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가?
 자식이 아프면 치료를 해 주는 것이 당연하지 돈 계산한다는 게 말이 되는 거야?
 tv 속의 아픈 아이 부모들은 너무나 가슴 아파하는데 울 엄마는 어쩜 저러지?

원망이 화산처럼 솟구쳐 올랐다.

사춘기를 마악 시작할 때라 그 날의 상처로 인해 엄마와의 거리가 더 멀어졌다.


하루는 친구 피아노 레슨을 보러 따라나섰다. 

낮에는 병원에서 접수를 받는 일을 하며 부업으로 레슨을 한다는 선생님 방에는 작은 화장대와 까만 피아노가 한 대 있었다. 쭈뼛쭈뼛 방바닥에 앉아 두 무릎을 곧추 세우고 피아노를 치는 친구와 옆에서 박자와 건반을 짚어주시는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한 시간 내내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던 친구의 뒷모습과 알 수 없는 피아노 선율이 아득히 멀어졌다 가까워지곤 했다. 

그 아린 마음속에 "돈을 벌면 제일 먼저 피아노를 배울 거야" 하는 다짐이 새겨졌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피아노 학원이 지척에 널려 있어도 피아노를 배우게 되지 않았다. 

피아노 학원을 지나칠 때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쓴웃음을 지으며 길을 재촉할 뿐.


결혼을 하고 큰 아이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은행에 가서 적금 통장을 하나 만들고 피아노 적금이라고 꾹꾹 눌러 적었다. 

아이가 아직 피아노를 배우기도 전에 우리 집에는 밀크색 뽀얀 피아노가 먼저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그러나, 세 딸들은 피아노에 관심이 없었다. 

위로 두 아이들은 피아노를 한동안 배우긴 했지만 흥미가 없었다. 

막내 아이는 피아노가 싫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바람에 밀크색 피아노는 제 자리에서 먼지만 이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절친과는 소식이 끊어졌고 늘 무심했다고 따져 묻기에는 엄마 인생이 가엽고

내 배움의 열망보다는 아이들의 학원이 우선이 되었을 유년의 허기를 달래주었던 피아노와 이별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뽀얀 피아노가 트럭에 실려 갈 때 어린 시절의 설움도 함께 실어 보냈다.

그 시절 아득히 들려오던 피아노 선율만이 또렷이 남아 피아노곡을 좋아하게 된 것으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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