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뒤러, 그를 고발하다
우리 주변에는 범상치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보통의 사람들이 무언가를 도전하지 못할 때,
앞정서서 과감하게 저지르는(?) 이들이 그런 사람들이죠.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서 역사는 그들을
멋진 일을 처음 해치운 '개척자' 또는 '선구자'로
그렇지 않으면 시대를 앞서간 '미친X(?)'로 정의하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긴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신비한 남자,
'알브레히트 뒤러 (1471~1528)' 는 에고가 강한 선구자였습니다.
뒤러의 고향은 독일의 뉘른베르크 였습니다.
유럽 남부의 이탈리아에 '르네상스' 의 물결이 충만했던 시절, SNS 가 없던 관계로 아직 이 곳은 신예술의 불모지였죠.
아버지의 공방에서 판금 조각을 만지며 금세공 일을 베우던 뒤러는 다른 곳에서 자신의 재능을 찾게 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미술' 이었습니다.
열다섯의 나이에 '미카엘 볼케무트' 의 공방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미술을 베우게 된 뒤러는 이후 많은 신기록 들을 만들어가게 됩니다.
우선 서양미술사 '최연소 자화상'
아버지의 공방에서 열심히 일을 하던 뒤러는 남는 시간에 실버 포인터로 자화상을 그립니다.
자신의 얼굴을 남겼을 때, 뒤러의 나이는 13살..!
어쩌면 어린 화공의 솜씨를 눈여겨본 아버지가
아들을 영재교육 코스로 집어넣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2살의 뒤러의 모습입니다.
1493년 뒤러는 유럽 남자들의 유행에 따라 성인이 되기 위한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죠.
수 년의 시간을 남유럽의 공방들을 돌며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당시 유행하던 르네상스 미술의 기법들을 연마하였습니다.
그런 뒤러를 위해 부모님들은(얼굴도 모르는) 여성과 혼사를 정해버렸고...(응?)
그런 아내 될 사람을 위해 (카톡 프로필 사진이 없던 시절이라)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보내게 됩니다.
(푸른 엉겅퀴를 든 모습, 남자의 충성스런 마음을 나타낸다고 하는군요~오우)
그리고 이 자화상은 또 하나의 기록이 됩니다.
북유럽 화가가 그린 첫 '회화 자화상' 이라고 하네요.
40대를 앞둔 뒤러는 이제
성숙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는 뒤러.
항상 자신만만하던 성공한 그는 이제 늙어가는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듯 합니다.
멋진 장신구들은 없고
늙어가는 한 남자의 얼굴만 자화상에 있습니다.
이 자화상은 서양화의
'첫 누드 자화상' 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럼 이 그림은 어떨까요?
그림 속의 뒤러는 이제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셀카의 정석 같은 구도이기도 하지만,
휴대폰이 나오려면 아직 너무나 오래 전인 시대.
이 당시에 그림이 나오자 사람들은 충격에 빠집니다.다름 아닌 뒤러가 '앞' 을 보고 있었거든요~!
무슨 말인지 하겠지만(저도 그랬지만)
그때는 그랬다고 합니다.
모델이 정면을 보는 것은 감히
'사람' 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일개 사람이 정면을 보고 있다니요~!
이런 이미지로 인해 뒤러는
'예수님' 과 같은 충격을 사람들에게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뒤러가 이런 효과를 노렸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북유럽 르네상스를 이끌던 자신을 그리스도와 같은 혁명적 이미지로 보이고 싶어 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1500 년에 발표된 이 작품,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 으로 뒤러는 세상 사람들의 머릿속에 기억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브레히트 뒤러' 라는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아, 그 예수님 닮은 그림 그린 사람' 이라는 인상을 가지게 되었으니까요.
(물론 뒤러는 이 이전에도 유럽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성공한 화가였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은 '최초로 정면을 응시한 자화상' 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됩니다.
자신의 얼굴을 그리며 세상에 충격을 던지던 뒤러.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게 되었으나....이 작품은 또 다른 분쟁을 낳게 되었습니다.
1799년 뉘른베르크,
한 장발의 남자가 길길이 날뛰고 있었습니다.
시의회가 소유하였던 뒤러의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 의 원본이 손에 손을 거쳐 뮌핸의 선재후 손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시의회에서
작품의 사본 제작을 의뢰했던 한 화가가
뒤러의 그림 원본을 몰래 때어내곤 자신의 사본을 끼워놓은 다음, 그 원본을 비싼 값에 멀리 팔아버린 것이죠.
가뜩이나 자신의 작품들을 복제하고 유통하던 화가들에게 ‘딥빡(심하게 빡침)’ 해 있던 뒤러는 폭발해 버리고 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복제품을 만드는 화가들은
그가 명성을 얻고 난 후에 항상 그를 괴롭히곤 했었으니깐요.
동판화 제작에도 소질이 있었던 뒤러가
1505년 베네치아를 방문했을 때 쓴 편지에도 이런 마음이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이탈리아 화가들은
나의 적이라 할 수 있지.
그들은 교회건 어디건 내 작품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그것들을 모사하곤,
내 작품이 고전적인 양식으로
그려지지 않아 좋지 않다고 비난을 한다네...."
모든 것에 신기록을 세우던 이 남자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생소한 이미지이던 '저작권' 이란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거죠.
그의 이름을 본뜬 마크까지 작품에 넣어보지만,
이제 위작 작가들은 보란 듯이 그의 모노그램까지 위조합니다.
(이젠 모노그램이 있는 복제화가 더 비싼 값에 팔리게 됩니다)
거기다 뒤러가 잘 만들던 판화들은
인쇄하기 너무나도 편한(?) 신기술이었습니다.
현대판 프린트기 같은 인쇄기는
뒤러의 모작들을 마구마구 만들어 냅니다.
모노그램까지 동원해도
근절되지 않는 불법복제!
뒤러는 이제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가뜩이나 맘에 들지 않던 이탈리아 화가들,
그중 가장 눈에 가시 같았던 한 남자를 잡아 본보기를 보이기로 한 것이죠.
그의 눈에 걸려든 것은
이탈리아에서 열심히 그의 작품을 판매하던 화가,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드 (Marcantonio Raimondi) 였습니다.
물의 도시, 이탈리아 베네치아.
곤돌라에서 내린 한 남자가 공소장을 들곤
산 마르코 광장을 가로질러 법원으로 들어갑니다.
원고의 이름은
당대 독일의 유명화가 '알브레히트 뒤러'
소장을 받아본 법원 서기는
문구를 유심히 훑어봅니다.
'지적 재산권 침해'
이게 무슨 말인지 고민하던 서기는
주변 동료들과 소장의 내용을 읽어봅니다.
피고는 이탈리아에서 판화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드'.
소장의 작성인은 멀리
북유럽의 뉘른베르크에 사는 유명 화가입니다.
이 신기록을 세우기로 유명한 남자가
또 하나의 기록을 세운 거죠.
다름 아닌 서양 역사상 최초의
'지식 재산권' 관련 재판 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도 무려 국제 재판으로 말이죠.
본인은 피고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드) 가
본인만이 사용하는 모노그램을 허락 없이 포함한 그림들을
모방하여 상업적으로 유통시킨 혐의에 대한 고발을 하고자 함
- 알브레히트 뒤러 -
소장을 받아 든 시정부 판사들은 고민합니다.
당최 '지적 재산권' 이란 게 뭐란 말인가?
판화면 그냥 찍어내면 되는 거 아닌가?
망할 독일 놈, 그냥 모른 척 넘어가면 될 것을 굳이 여기까지 와서 고발을 하다니...!
하지만 원고가
당대 워낙 잘 나가는 화가 중 하나였는지라,
시정부의 어르신들은 이 사건을 그냥 넘어갈 순 없었습니다.
아쉽게도 이 사건의 판결 진행에 대하여는 남아있진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는 것은
당대 살았던 화가이자 수필가,' 조르지오 바자리' 의 작품, ‘가장 탁월한 화가, 조각가, 건축가 열전(Le Vita de, 1568년)’ 에 일화가 남아있기 때문이지요.
논란을 거듭하던 그들에게 법원은
하나의 제안을 내놓습니다.
일단 라이몬드 에게는 작품 유통 시에 뒤러의
'모노그램을 허락 없이 사용하지 말 것' 을 명합니다
그리고 뒤러 에게는 '고발의 사유가 인정되지 않음' 이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복제품이 나올 만큼 (원고의 실력이 뛰어남을) 인정받았으니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라는 조금은 우스운 격려(?)를 덧붙여서 말이죠.
판결문을 받아 든 뒤러는 이제 경련을 일으킵니다.
고함을 치기도 하고, 판결문을 던져보기도 하지만,
이 시간에도 팔려나가고 있는 짝퉁 그림들을 막을 길이 없었죠.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이 선구자는 새로운 작품 앞에 섭니다.
그리고 그림 한 구석에 분노를 담아
글귀를 새겨 넣습니다.
"멈추어라!
그대, 교활한 자들이여.
노력을 모르는 자들이여.
남의 두뇌를 날치기하는 자들이여!
감히 내 작품에 그 흉악한 손을 대려는 생각은 하지도 말지어다!"
- 뒤러의 <성모의 일생> , <그리스도의 수난> 판본 장식 삽화 중 -
선택받은 소수의 예술가들처럼,
젊은 날에 성공한 뒤러는 많은 작품 활동을 합니다.
그가 조각했던 목판화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가장 환상적인 인체 비율을 찾기 위해 다방면에서 연구도 합니다.
그런 그에게 사람들은 환호했고,
<북유럽의 다빈치>,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자> 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말년까지 짝퉁 그림들과 싸우면서 그들을 퇴치할 방법에 골머리를 앓습니다.
마치 '파라오의 관뚜껑' 에서나
볼 수 있을 저주의 문구까지 넣었지만,
그런 그의 작품들은 오히려 모방되고 더 널리 유통됩니다.
결국 죽을 때까지 그는 이를 갈며
자신들의 모조품을 지켜보아야만 했죠.
(물론 다른 화가들도 모두 겪어야 할 기분 나쁜 경험이었습니다)
뒤러가 죽고 난 뒤 500 여 년의 시간이 지나
유명 경매회사 '크리스티(Christie's)' 에서는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우리에게 유명한 블록체인(Blockchain) 기술을 도입해 경매에 나오는 모든 작품들의 이력관리를 실시하겠다고 한 것이죠.
전문 경매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소프트웨어 회사 Artory 와 협력하여 프로젝트는 진행되었 습니다.
당일 경매에 나온
모든 경매품들은 분산 원장에 기입되었고,
총 42개의 미술품이 3억 달러의 규모로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왜 블록체인일까요?
블록체인을 사용하면 판매되는 정보가
인터넷 상에 있는 수 백 군데의 저장소로 저장되어 버리고, 더 이상의 제품의 위조나 변조가 불가능해집니다.
예전에는 이런 위조, 변조에 대한 위험을 커다란 경매 회사들이 보증해 주었죠.
그리고 챙겨간 중개수수료는 무려 40%
하지만 이 신기술을 사용하면
더 이상 전문 감정사가 필요 없게 됩니다.
인증서를 위조하려는 사람은 이제,
인터넷 수 백 곳에 있는 인증 장부를 일일이 뒤져
모두 다 고쳐야 하는데 .... 실제론 앞의 기록들까지 모두 고쳐야 하니 불가능한 것이죠.
뒤러가 500 년 전 고민하던
짝퉁 모조품에 대한 고민이
드디어 해결될 실마리를 찾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IT 기술이 있습니다.
블록체인에 대한 활용도는 너무나 높습니다.
제가 연구하고 있는 분야인 '국제통상' 분야에도
이 기술은 하나의 화두가 되어있구요.
우연히 서양 미술사를 다룬 한 책에서 '뒤러' 의 에피소드를 읽으며,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답니다.
그리고 이 신기술이
'예술' 의 분야에도 적용되고 있음을 보면서,
또 한번 기술의 진보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느낍니다.
수 백 년이 넘도록 우리가 가져왔던 고민들,
사람 간의 신뢰에 대한 문제들이 이제,
기술의 영역에서 해결점을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젠 교육을 통해
'착한 사람' 을 만드는 전통적인 방법이 아니라
'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요?
뒤러가 내었던 역사 최초의 '지적 재산권' 소송,
법과 제도에 호소해 보았던 한 선구자의 고민을
결국 사람이 아닌 기계 끝을 내는 것 같아 조금은 씁쓸(?)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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