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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 Studio Bleu Aug 12. 2020

예술이 너를 자유롭게 할거야

앙리 툴루즈 로트렉, 붓을 들다

'니콜 키드먼' 과 '이완 맥그리거' 가 나온 영화,  <물랭루즈>  입니다. 오늘 이야기와 관련이 많이 있죠~^^


'신은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는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조금 납득하긴 힘든 말이기도 합니다. 젊음도 사고, 외모도 고칠 수 있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으니깐요.


이 남자가 있던 시대가

오늘날 같았다면 어땠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위대한 화가 한 명을

잃어버리지 않았을까요?


오늘의 주인공은 몽마르트를 사랑한 작은 기사.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Henri de Toulouse-Lautrec, 1864 ~ 1901)'  


의 이야기 입니다.



화가 로트렉 (좌), 신비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에서도 그의 모습이 보입니다~^^


남프랑스 알비의 한 성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납니다.

모두가 기다리던 툴루즈(Toulouse) 가문의 남자아이.


사내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그 누구보다도

아버지가 기뻐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아이가 성장하면,

같이 말을 타고 사냥을 하기 위해 벌써부터 모든 준비를 하고 이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으니깐요.


아버지의 이름은 '알퐁스 샤를 드 툴루즈 로트렉' 백작, 프랑스 제6 창기병대 소속 장교로 복무할 정도로 말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사촌이었던

아델 드 툴루즈 로트렉' 백작부인 이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아버지 알퐁스 백작의 고모뻘 이었지만, 귀족 사회에서는 근친혼은 대세였으니까요)


사실 앙리는 탄생부터

금수저 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음.... 이 가문, 얼마나 대단한지...

'툴루즈' 가문에 대해 조금만 더 알아볼까요?



<< 작은 보석 >>


레몽 4세 드 툴루즈, 툴루즈가를 유럽 귀족들에게 각인시킨 인물입니다.


툴루즈 가문의 이야기는 먼 선조 때로 올라갑니다.

프랑스의 유력한 명문가문 이였던 툴루즈 가문.


전성기의 툴루즈 가문은 남프랑스 지역의 1/3 을 영지로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끝내주게 잘나가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리고 레몽 4세 때, 툴루즈 가문은 유럽 전역에 그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제1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게 된 것이죠.


신앙심 넘치고 싸움 좋아하던 조상님은 가장 먼저 '예루살렘으로' 를 외치며 십자군에 참가하였고,(심지어) 연장자였던 관계로 남프랑스 귀족들의 대표가 되어 원정을 성공시킵니다.


이런 어마무시한 조상님을 둔 탓에,

툴루즈가의 집안 어른들은 기사나 군인에 대한 로망이 가득한 마초들이 많았습니다.

(앙리 역시, 프랑스 사교계에서 가문 프리미엄을 상당히 누립니다)


아델 백작부인은 어린 앙리를 얻고 나서는

행복한 나날을 보냅니다.


나의 '작은 보석(Petit Bijou)' 이라는 애칭으로

성장해가는 아들을 부르며 무한한 애정을 보내었죠.


말과 사냥을 좋아하고, 격정적이며 전사의 피를 가진 아버지와 조용하고 상냥한 어머니는 앙리의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둘의 보호와 남프랑스의 온화한 기후 아래

앙리는 잘생긴 귀공자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즈음,

작은 보석의 아름다운 빛을 잃게 만드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 불행의 시작 >>


아델 백작부인, 기품 있고 상냥하던 그녀는 아들의 평생 조력자가 됩니다


먼저 어린 여동생 이었던 '리샤르' 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죽게 됩니다.


딸의 죽음에도 여전히

사냥과 외유에만 열을 올리던 남편,


따듯하게 아내의 슬픔을 감싸주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아델 백작부인은 크게 실망합니다.


결국 어린 앙리를 데리고 나온 백작부인은

남편과 별거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사춘기로 접어든 앙리를 바라보며 아델 부인은 다시금 고민에 빠집니다.


갖은 병치래로 가뜩이나 걱정을 안겨주던

아들의 키가 다른 또래들에 비해 너무나 작았습니다.

병약한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자주 산책을 하곤 했습니다. 말을 타고 예루살렘 성벽을 기어오르던 조상들의 강건함이 아들에게도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말이죠.


앙리가 14살이 되던 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산책하던 어린 아들은

한 웅덩이에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연약한 허벅지 뼈는 바로 부러져 버렸습니다.


놀란 어머니는 사람들을 부르러 뛰어갔고,

사람들에 의해 앙리는 병원으로 옮겨집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허약한 아들의 병명은 잦은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병이었습니다. 그리고, 앙리의 키는 더 이상 크지 못하였죠).


할말을 잃고 흐느끼는 아델 부인을 어린 앙리는 다독입니다. 마치 그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말이죠.



<< 예술이 너를 자유롭게 할거야 >>


화실에서 작업을 하는 앙리 드 로트렉 (1882년)


말타기를 동경하며 영웅담을 꿈꾸던

어린 소년은 이제 더 이상, 햇살을 맞으며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의 키는 152 센티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았고,

한쪽 다리는 지팡이에 의지하며 다녀야 할 정도였죠.


무골 기질을 타고났던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유년 시절이 절망으로 바뀌었던 시기,

'작은 보석' 은 점점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를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죠.


그녀는 어린 아들의 발을 대신할

눈과 손에 집중을 했습니다.


다리를 다친 이후로,

그림을 즐겨 그리던 아들에게 좋은 선생님을

소개해 주기로 합니다.


아버지의 친구' 르네 프랭스토' 는

그런 아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스승이었습니다.


앙리를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기도 했지만,

프랭스토 자신도 잘 들을 수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창 밖을 바라보며 우울해 하는 앙리에게

콩테를 쥐어주며, 프랭스토는 이야기합니다.


"캔버스를 보렴,

 예술이 너를 자유롭게 할거야."


콩테를 들고 캔버스를 채색하는 앙리,

이제 그는 세상에서 자유로워지는 법을 알게 됩니다 바로 그림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말이죠.


로트렉 가문의 난쟁이 도련님,

그가 그림을 그린다는 이야기는 집안사람들에게 알려집니다.


기사와 백작 가문에서 칼을 들진 못할망정,

'환쟁이' 라니요!!!


삼촌들과 고모들은 아델 부인과 앙리를 비난합니다.


그런 집안사람들의 비난으로부터 어린 아들을 지키기 위해, 아델 부인은 파리의 몽마르트로 이사를 합니다.


그리고,

1882년에 앙리는 당대 유명한 '페르낭 코르몽'  아틀리에 에서 그림 공부를 하게 되죠.


당시 코르몽의 아틀리에는

반란의 불씨가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앙리가 사사받던 반듯하고 아름답던 선과 색감이 한 편으로 밀려나고, '인상파' 라고 자신들을 부르던 강렬한 색을 쓰는 무리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 미술계의 움직임을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던 앙리,


어느 날 화실에 처음 보는

키 큰 꺽다리 연습생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붉은빛 도는 머리칼,

약간은 너저분한 수염에 조금은 모자라 보이는 한 화가.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지만,

사람들과의 소통에는 능하지 못한 그를 보며

앙리는 묘한 호감을 느낍니다.


그렇게 코르몽의 화실에 난쟁이와 꺽다리 화가는

같이 몽마르트 언덕으로 달려가 술잔을 기울일

정도로 친해집니다.


키 큰 화가는 네덜란드 억양이 물씬 풍기는 프랑스어로 어눌하게, 자기 이름은 '빈센트 반 고흐' 라고 소개했습니다.

앙리가 그린 빈센트 반 고흐의 초상, 1887년. 앙리의 좋은 친구였던 그는, 아를에서 머물 무렵 앙리를 고갱과 함께 데려가려 무지하게(?) 노력합니다



<< 툴루즈가의 작은 기사 >>


앙리의 그림은 분명 독특했습니다.


파스텔과 유화로 그려진 그림들은 화려하고,

살아 숨 쉬는 듯한 거친 선들로 가득했죠.


코르몽 화실의 악동들은 이제

합심하여 사람들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불쌍한(?) 스승님은 악동들을 견디다 못해 화실 문을 닫아버리고 말죠)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갔던 그들에게

아직 미술 평단은 냉담했습니다.


고흐는 그런 사람들의 반응이 싫기도 하고,

자신의 분노와 열정을 화폭에 녹이기 위해,

프로방스의 아를 지방으로 떠납니다.


절친이었던 앙리에게도 물론 제안을 했지만,

앙리는 이 곳 몽마르트를 떠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장애로 인한 특이한 외모로 사람들의 놀림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기를 좋아했습니다.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야 하는 다리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가장 좋아한 것은

'말', '서커스' 그리고 '여인들' 이었습니다.


몽마르트에서 그가 모델로 선택한 이들은 낮은 계급에서 남자들을 위해 일하면서도 대접받지 못하는,

삶의 풍파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은 장애로 인해 사회에서 천대받던

자신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커피 포트> 1884년, 앙리는 작달막한 자신의 모습을 자주 '커피포트' 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포트의 표면에 앙리의 얼굴이 비치는 듯 합니다.


생각해보면 앙리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었습니다.

 

거친 세파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전쟁처럼 살아가던 그녀들이,


앙리를 만나면 스스로의 아픔을 꾸밈없이 그에게 말하였고, 그를 알게 된 이들은 기꺼이 그림 모델이 되어주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불만을 캔버스에 담아내듯,

힘있고 거친선이 가득한 그의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가끔씩, 그런 상상을 하곤 합니다.


'앙리 드 로트렉' 은 지금 말을 달리고 있다고,


캔버스란 공간을 벌판 삼아,

붓이란 칼을 들고 그렇게,

물감을 흩뿌리며 질주하는 작은 기사...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프랑스는 벨에포크(Belle Époque, 아름다운 시대) 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오지 않을 아름다운 시절,

사람들 모두가 새로 지어진 에펠탑을 바라보며,

만국박람회의 분위기에 취해 축제를 벌이고 있을 때,


몽마르트의 작은 기사의 눈에는

아름다운 시대의 이름에 가려진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시대에 환영받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들을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했을 때,


그는 어린 시절 스승님인

프랭스토의 말처럼 '자유' 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주 들이키던 독한 술인 압생트와

언제부터인지 그의 몸을 갉아먹고 있던 매독은

결국 연약한 그의 몸을 쓰러지게 만듭니다.  


그의 마지막에는

평생을 '작은 보석' 을 돌보아주던

어머니 아델이 있었고,

급히 달려온 아버지 알퐁소 백작도 있었습니다.


캔버스 위에서 자신만의 전쟁을 치러오던 아들을

아버지는 끝내 '툴루즈 가문의 기사' 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앙리는 중얼거립니다.


'바보 영감 같으니...'


1901년 어느 천둥이 치던 날,

툴루즈 가문의 앙리는 37살의 나이로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자유를 위해 캔버스 위에서

치열하게 치러왔던 그의 전쟁도 끝이 납니다.



Les Amants de Montmartre


<숙취 > 1889년,  & ( <수잔 발라동> 과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 )


인상파 화가들의 연인,

수잔 발라동 (Suzanne Valadon) 입니다


가난한 집안의 사생아로 태어난 그녀는

11살부터 일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모자 공장, 장례제품 공장, 시장 점원을 거쳐

서커스단 곡예사로 돈을 벌기 시작했지만,

이내 무대에 오르지 못할 정도의 부상을 당합니다.


15살의 어린 나이에 생계를 위해 몽마르트의 <물랭루즈> 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면서, 인상파 화가들을 위한 모델일도 병행하였습니다.

(르누아르 가 너무나 사랑한 모델로,

 실제 그의 작품에도 많이 등장합니다.

 더불어... 마담 르누아르의 질투도 함께.... )


르누아르의 아들이라 의심(?) 받는 아이는, 후에 몽마르트의 화가라 불리게 되는 <모리스 위트릴로> 입니다.


너무나 가난했던 그녀는 아이를 돌볼 여유가 없어, 아이가 울 때마다 우유에 위스키(...??????)를 타서 먹일 정도였다고 하네요.


이런 그녀의 미술적 재능을 알아봐 준 것이 바로

<앙리 드 로트렉> 입니다.


앙리는 그녀를 그가 존경하던 화가

 <에드가 드가> 에게 소개해 주었고,


그들의 후원 아래 프랑스는 불멸의 화가

두 명(발라동 & 위트릴로)을 가지게 됩니다.

(발라동은 1894년, 여성 최초로

 <프랑스 국립 미술협회> 에 들어가게 됩니다)



<세탁부> 1885년 &  <카르멍 고뎅> 1884년


코르몽 아틀리에 시절,

몽마르트 언덕의 세탁부이던 카르멍 고뎅(Carmen Gaudin) 을 그린 그림입니다.


그녀의 붉은 머리와 거친 손이 마음에 들었던 앙리는 당시 23살의 그녀를 모델로 총 13점의 작품을 남깁니다 (일설에는 그녀가 앙리에게 매독을 안겨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답니다).


<세탁부> 는 그리 주목받지 못하고 창고에 방치되다가, 2005년 발견되어 크리스티 경매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미화 2,240만 달러에 낙찰이 되면서,

<앙리 드 로트렉> 의 작품 중 가장 비싼 가격으로 팔린 그림으로 기록됩니다.

(그런데 과연 그녀는 로트렉과 연인 사이였을까요?)



<물랭루즈> 1891년, 이 작품은 앙리에게 불멸의 명성과 '물랭루즈 평생 입장권'을 선물하게 됩니다 ^^


<물랭루즈>,

앙리를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무대 중앙은 물랭루즈의 간판스타,

라 굴뤼 (La Goulue) 의 모습입니다.


몽마르트 언덕에 문을 연 빨간풍차(물랭루즈) 에서는 가을 시즌을 홍보할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밑져야 본전이란 마음으로 3천 장의 포스터를 앙리에게 발주하게 됩니다.


앙리가 만든 첫 채색 포스터,

<물랭루즈> 가 발표되고 파리 시내는 들끓게 됩니다.(아울러 포스터를 소장하고픈 사람들로 거리의 포스터들이 뜯겨나가고, 웃돈을 주고 포스터를 구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죠)


자네는 앞으로 평생 공짜 입장이야~~, 대박이 난 물랭루즈의 지배인 <샤를 지들러> 와 <앙리 드 로트렉>


무대 중앙에서 캉캉춤을 추는 여자 댄서, '라 굴뤼'

목이 길게 묘사된 또 한 명의 남자 댄서, '발랑탱'


둘을 배치한 파격적인 포스터는

기존의 포스터와 차별되는 강렬한 색감과

대담한 배치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일본 우키요에를 연상하게 하는 진한 색들,,


커다란 'M' 글씨로

세 줄의 문장 라인을 처리해 버리는 기법,


주인공을 중앙에 배치하고

다른 이들을 흑백 처리해 버리는 과감함...


이 모든 것들은 이어져 내려와

현대 미술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로트렉이 없었다면,
앤디 워홀도 없었을 것이다.
(미국 매트로폴리탄 뮤지엄)

음... 다시 돌아와서

'라 굴뤼' 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본명은 '루이스 웨버' 입니다.

라 굴뤼(많이 먹는 여자) 란 별명은 ....

그녀의 습관 때문에 붙여진 별명인데요,


캉캉춤을 추던 그녀가 춤을 춘 후 하던 습관은,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남자 손님들의

(비싼) 음료수들을 다 마셔 버리는 것이었다고 하네요... (이런) ^^;;;


'라 굴뤼' 는 의심할 것 없이, 

한 시대를 풍미하던 물랭루즈의 스타였습니다.


다만 은퇴 후에도 무절제한 생활을 이어가던 그녀는 생활고에 시달렸으며, 생의 마지막에는 서커스 공연을 해야 할 정도로 비참했죠....



<장 아브릴> 1893년, 앙리의 평생의 친구, ‘장 아브릴’


영화 물랭루즈의 실제 주인공, 장 아브릴~

장 루이즈 보동 (Jeanne Louise Beaudon) 

입니다.


영화 물랭루즈의

니콜 키드먼 역이 바로 '장 아브릴'

이완 맥그리거는 '앙리 드 로트렉'


역할이라고 합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영화 < 물랭루즈(2001 ) > 입니다. 화려하고 재미있고 슬픈 내용입니다


그녀는 물랭루즈의 보통 댄서들과는

다른 매력이 있었습니다.

 

격정적인 춤을 추지만,

그 외의 시간은 기품 있는 숙녀처럼 지내곤 했죠.


그리고,

주변 동료 댄서들과 그리 친하지도 않았나 봅니다.

(그녀를 보고 주변에선 미친X 이라고.... )


그녀의 그런 성격은

성장기 시절의 영향이 컸다고 보여진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탈리아 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길거리의 매춘부였죠.

 

사생아로 태어난 그녀는 불행하게도,

알콜 중독인 어머니에게 어린 시절부터 학대를 받습니다.


결국 학대하는 어머니를 피해 10대에 가출했고,

안면발작과 팔다리를 제어하지 못하는 고질병을 가지게 됩니다.


신기하게도 의사는

'춤' 을 치료법으로 처방하게 되죠.


어린 시절 정신병원에서 치료받은 경력도 있었고,

비서, 곡예사, 매표소 직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물랭루즈의 '자당 드 파히(Jadin de Paris)' 쇼의 고정 댄서가 됩니다.


독특하고 격렬한 캉캉춤으로 사람들에게 인기를 끈 그녀는, 물랭루즈를 출입하던 앙리와는 이상하리만치 친밀해집니다.


요정 같은 외모에 차가운 성격을 가진 댄서,

화려한 춤 뒤로 그녀가 감추고 싶은 아픔을

난쟁이 앙리는 희한할 정도로 알아맞힙니다.

 

평민들과 섞이긴 힘들어하는

자존심 높은 귀족의 혈통,


하지만 현실은

모든 사람의 업신 거림을 받는 낮은 신분,


그리고,

신체적 장애 까지....  


둘은 정말 많은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앙리 와 장은 평생을 교류하는 친밀한 사이가 됩니다 (장은 변함없이 그를 신뢰하였고, 은퇴의 순간까지 포스터를 의뢰하였습니다).


어릴 때 고생이 밑거름이 되었을까요?


인기를 끌던 그녀는 연극무대까지 진출하며,

성공을 계속 이어갑니다.


하지만,

1930년대 전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은 그녀를 다시 파멸시키죠. 그리고 노년에는 가난에 시달리다 결국, 불우한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커튼콜 하는 이베트 길베르> 1894년, 악연으로 시작해서 평생 친구가 된 인연, ‘이베트 길베르’


프랑스가 사랑한 가수

'이베트 길베흐(Yvette Guilbert)' 입니다.


'라 굴뤼' 나 '장 아브릴' 과는 다르게

오랫동안 예술가로 살면서

순탄한 마지막을 맞은 예술가 이기도 합니다.


이베트와 앙리의 인연은 재미있습니다.


아름답고 발랄한 뮤즈에게 반한 앙리가

그녀를 스케치한 그림을 보내옵니다.


그녀의 시즌 포스터 제작을

하고 싶다고 하면서 말이죠.


문제는 저 그림(!!!) 이였습니다.

그림을 받아본 이베트는 질겁합니다.

(의뢰인을 아름답게 그려도 일을 줄까말까할 판에..)


그녀는 제안을 거절하며 정중하게 편지를 씁니다.


"제발 저를 추하게 그리지 말아 주세요!


 저를 보러 왔던 사람들은 당신이 보내주신

 스케치를 보고 모두 비명을 질렀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술적인 부분만 보는 건 아니에요, 

 정말로요!"


하지만 앙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베트에게

그녀의 모습을 담은 석판화집을 만들 것을 승낙받죠.


스케치를 하는 과정에서도

그녀와의 신경전이 계속됩니다.

(주로 '왜 이렇게 못생기게 나를 그렸냐' 가 원인이었습니다)


8월 무더운 파리의 여름날,

이베트의 판화집이 완성됩니다.


이베트는 작업 기간 동안 적응이 된 탓인지 작품들을 만족해하며, 100 여권의 작품 출판에 사인을 했습니다...만...


그녀의 가족들과 매니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판화집 초안을 감상한

그녀의 어머니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고,


앙리를 딸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고발하려 한 탓에,

이를 말리느라 모두가 진땀을 빼야 했습니다.


통큰 이베트의 도박은 성공했습니다.


그림이 아름다운 그녀를

똑같이 그리긴 실패했을지 몰라도,


앙리의 생동감 있는 색감과 선들은

그녀의 모습을 기자들에게 각인시켰고,

언론의 찬사와 시민들의 인기를 모두 가지게 됩니다.

 

감사의 의미로 이베트는

개인 별장으로 앙리를 초대하였고,

이후에도 그와 평생의 친구가 됩니다.


그녀는 영국 등으로도 성공적으로 진출하였고,

77세의 나이에 사망해 여러 예술가들이 잠들어 있는 <페르 라세르> 묘지에 안장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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