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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 Studio Bleu Dec 01. 2020

혁명은 그와 같이

라파예트, 대서양을 건너다

* 이 글은 이글루스 <3월의 토끼집> 님의 글을

   많은 부분 인용하였습니다.


<< 닻줄을 잘라라! >>


<테니스 코트의 서약 (Serment du Jeu de Paume)>  (자크 루이 다비드, 1789)>


좁은 공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손을 번쩍 들고 선언문을 외치는 사람,

그를 향하여 손을 뻗어 가리키며 연호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앞에서 서로 손을 잡고 다짐하는

서로 다른 옷차림의 사람들.


1789년 6월 20일,

프랑스 파리의 조그만 테니스 코트는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바로 후대 사람들이  <테니스 코트의 서약> 이라 기억할 역사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미국 독립전쟁을 도와주다

금고가 거덜 나 버린 프랑스,


세금을 올리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던 루이 16세와 귀족들의 바람과는 달리, 평민 대표들은 세금 이외에도 대폭적인 정치제도의 개혁을 주장합니다.


당황한 귀족들은 군대를 동원해

의회장을 폐쇄해 버립니다.


"때가 왔다, 닻줄을 잘라라!"


혁명을 지지하던 정치학자,

'에마뉘엘 조제프 시예에스'의 외침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흥분한 평민 대표들이 비어 었던 근처의

작은 테니스 코트(Jue de Paume) 로 몰려갑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혼란의 상황.


화가를 꿈꿨던 천문학자였지만,

파리의 시장이자 국민의회 첫 의장으로 선출되어

혁명의 가운데에 서게 된 '장 실벵 바이' 가 일어나 하늘을 가리키며 <테니스코트의 서약> 을 낭독합니다.


'우리는 압재에 맞서는 헌법을 정할 것을 한다!'


그림의 오른쪽에서 두 손을 가슴에 얹고

감동적으로 이를 바라보는 혁명의 주역,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왼쪽 아래는 시끄러운 선배들 사이에서

회의록을 작성해야 하는 막내의 고충(?)을 보여주는

'장 폴 마라' 의 모습도 보입니다

(네, 어느 시대든 짬밥은 중요해요).


이 날의 모습을 남기기 위해 혁명정부는 열혈 혁명당원이자 잘 나가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 에게 그림을 의뢰합니다.


여담이지만, 의욕적으로 그림을 그리던

다비드의 작품은 결국 미완으로 남게 됩니다.


이유는.... 혁명의 와중에 그림을 완성할만하면,

돈을 줘야할 등장인물들이 계속 죽어나갔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장 폴 바이’와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의 광기 속에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고, ‘마라’ 역시 집에서 암살 당하게 됩니다. 이쯤 되면 저 그림은 프랑스판 데스노트 였을까요?)


유명한 일본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 에서 묘사된 그 날의 모습입니다.


조금은 오래되었지만, 일본 인기 만화였던

<베르사유의 장미> 는 혁명기의 프랑스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며 만화를 찾아보니  상당히 고증이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만화 속 이 날의 장면 중에는 테니스코트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오늘은 그중 한 사람,

귀족의 혈통으로 태어났지만,

평생을 신념을 위해 살아간 이의 이야기입니다.



<< 꼬마 후작님 >>


거친 밤바다를 바라보며,

갑판 위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청년(또는 소년).


멀어지는 항구에서는 그를 부르는

시끄러운 고함소리만이 들립니다.


청년의 이름은

'마리 조세프 폴 이비스 로세 쥘베르 뒤 모티에 마리 드 라파예트' 후작(역사는 줄여서 그를 라파예트 후작이라 부릅니다)


그는 유서 깊은 귀족 집안의 유일한 상속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긴 이름이 이야기해 주듯이, 이 집안도 프랑스에선 나름 잘 나가던 집안이었답니다.



네? 저보고 먼저 올라가라고요? (영화 잔다르크 중에서)


가장 유명한 선조 ‘라파예트 3세’ 

1429년 프랑스의 성기사 ‘잔 다르크’ 와 함께 오를레앙의 성벽을 오릅니다.


그리고 역사가 기록하듯 이 전쟁으로

백년전쟁의 흐름이 프랑스 쪽으로 바뀌게 됩니다.

(전쟁 후에 그는 프랑스 장군 자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 이후로도 그의 가문은 쟁쟁한 조상들이 계속 나옵니다. 주로 군인, 선장 등 모험심이 가득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죠.


당시 많은 귀족 가문들이 군장교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집안은 유독 그 스릴을 즐기는 정도가 심했나 봅니다.


족보를 들춰보다 보면,

머~~언 조상님은 십자군 전쟁에 참여해 예루살렘에서 성배를 찾는 모험을 하다가 실종되기도 하고 (음, 프랑스의 인디아나 존스?),


프랑스 왕가가 벌이는 이상한 전쟁들에 족족 참여해 남의 나라까지 달려가 싸우다가 비명횡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단명하는 조상님들이 많은데

또 대는 끊기지 않고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이렇게 쌈박질만 하던 라파예트 가문에

조금은 성질을 죽인 조상님이 나타납니다.


오늘의 주인공, 라파예트 후작의 증조할아버지

샤를 모티에 샹프티에레(1630~1700 추정) 입니다.


그 역시 전쟁터를 따라다니는 군인이었지만, 증조할아버지는 나름 운이 따랐는지 차가운 전쟁터 땅바닥이 아닌, 따듯한 고향집의 침대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만년 '백작' 가문이던 집안을 '후작' 가문으로 승급시키기도 하고, 돈을 모을만하면 요단강을 건너시던  조상님들과는 달리 견실하게 재산을 모으게 됩니다.


그의 가정교육 덕분이었는지, 라파예트 후작의 할아버지 역시 전쟁터가 아닌 집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죠.


두 대가 거치고 이제 라파예트 가문의 젊은이들을 데려가던 죽음이 멀리 사라졌다고 생각할 무렵, 다시 일들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1759년 8월 1일,

라파예트의 아버지 미쉘 이 독일 베스트팔렌 민덴 지방에서 7년 전쟁에 참전 중에, 영국군의 포격에 사라져 버리고 만 거죠.


그의 나이 27살, 이야기의 주인공인 라파예트 후작의 나이는 고작 2살이었다고 합니다.


<민덴 전투>,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죽은 자와 고아와 과부를 만듭니다....


2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라파예트,

그런 그에게 이제  <라파예트 후작> 이라는 칭호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모아 온 재산들만 남았습니다.


아~ 어머니가 있었네요!

일이 터지자  그녀는 어린 아들을 남편의 영지인

샤바니악에 남겨놓곤 파리로 홀로 이사를 갑니다.


그리고,

남편이란 고삐가 풀린 그녀는 이제 파리의 뤽상부르 궁전(음~ 당대의 타워팰리스 였다고 합니다) 에서 누구나 꿈꾸던 파리의 사교계로 데뷔하게 됩니다.


이제 라파예트는 부모도 없이, 친할머니와 두 고모들의 보살핌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11살 나이에 파리로 진학한 어린 라파예트,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화려한 사교계의 생활에 몰두했죠.


무슨 운명인지, 아들과 파리에서 재회한지 한 해 만에 어머니는 병으로 사망합니다. 그리고, 그런 딸의 죽음으로 충격받은 외할아버지 역시 얼마 안 있어 사망해 버리죠.


어린 라파예트에게 애정을 주지 않던 어머니...

라파예트는 12살의 나이에 고아가 됩니다.


다만 위안이 되었다면, 외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에게 자신의 재산을 모두 물려주었다는 거였죠.


어린아이는 이제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됩니다.

너무나 많은 재산을 가진 채로 말이죠.


열두 살의 라파예트, 어린 소년은 세상에 홀로 남겨집니다.

<< 바다를 건너서 >>


라파예트는 조용한 아이로 자라납니다.

라틴어를 아주 잘하며 사색을 즐기는 조용한 성격으로 자라나죠.


그런 그도 14살의 나이가 되자 집안의 관습에 따라 <근위총사대(Les Noirs Mousquetaires)>에 들어가게 됩니다. 프랑스 왕과 왕정을 위해 봉사하는 운명을 따르게 된 것이죠.


달타냥과 <삼총사> 가 나오는 근위총사대 입니다. 검은 옷을 입은 머스켓단~~. 이들은 프랑스 왕과 왕비를 위해 봉사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772년,

어린 라파예트에게 갑자기 결혼 이야기가 오가게 됩니다.


죽은 어머니와 외할아버지 보다 더 오래 사셨던...

하지만, 얼마나 더 오래 사실지 모르던 외증조부 리비에르 백작이 지금도 흔한 이유로(살아있을 동안 손손주(?) 를 보겠다 이런) 혼사를 급히 진행시킨 것이었습니다.


상대는 노아이유 공작 집안의 어린 공녀,

아드리엔느 드 노아이유.


어린 신랑 후보는 이제 당황하게 됩니다.

아직 소녀들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기 힘든데,

결혼이라니요...


하지만,

많은 유산을 가진 후작 집안의 만만해 보이는 고아 도련님에게 딸을 보내려는 귀족들은 줄을 서 있었습니다.

(그의 재산이 목적이 아니었다면 거짓말이었겠죠).


이때, 정략결혼이 될뻔한 이들을 구원해준 이가 나타납니다. 다름 아닌 어린 신부의 엄마인 노아이유 공작부인이 반대를 한 것입니다.


두 어린아이들을 위해, 결혼은 그들이 큰 후에 선택에 맡기자며 완강히 반대의사를 표시한 것이었죠.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그녀의 태도에,

혼담은 계속 미뤄졌지만, 결론적으로 이러한 상황은 둘에겐 전화위복이 됩니다.


17살이 된 사춘기의 라파예트와

14살의 아드리엔느는 '정말' 사랑에 빠져 버렸으니까요.


아드리엔느 드 노아이유, 어린 나이에 라파예트의 동반자가 됩니다.


1774년 4월 아름답던 봄날,

어린 연인들은 사랑의 마음을 담아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해,

라파예트는 아내와 떨어져

메츠에서 군복무를 위해 떠나가게 됩니다.


군복무를 하던 어느날,

라파예트의 귀에 바다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일이 들어옵니다.


무례한 식민지인들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감히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었죠!


어린 라파예트의 눈은 빛납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1776년 미국의 전권대사

'살라스 딘' 이 접근해 옵니다.


딘의 목적은 유능한 프랑스의 군간부들을 모아서

미국으로 보내어, 독립전쟁에 가담시키는 일.


'돈', '명예', '허영심' ....

딘이 사람들을 유혹하는 단어는 다양했습니다.


그리고,

어린 라파예트에게는 '자유'  '혁명' 이라는

이름이 먹혀들었습니다.


이 어리숙한 이상주의자를

노련한 사기꾼(?) 외교관은 잘 구워삶게 됩니다.


미국대사 살라스 딘, 그의 화려한 말솜씨에 수많은 프랑스인들이 모험을 찾아 신대륙으로 떠났습니다.


어린 라파예트의 마음속은 뛰고 있었습니다.

그는 바다를 건너 미대륙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하고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갑니다.


그러던 사이,

영국은 정식으로 프랑스에게 항의를 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아메리카 대륙에 지원병과 물자를 보내는 행위를 한다면 전쟁으로 간주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공식적인 마찰을 피하고 싶었던 프랑스 정부는

이러한 미국으로의 도움을 중단할 것을 명령합니다.


1년 넘게 준비한 라파예트의 일이

틀어질 위기에 처한 것이었죠.


장인은 어린 사위에게 더 이상,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충고를 합니다.


친구들 역시 라파예트를 말리기 바쁩니다.


아니... 돈도 있고, 아름다운 아내까지 있는 귀족인 자네가 왜 그런 험한 곳을 가서 고생을 한단 말이야?


라는 말들이 돌아오기 일수였죠.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라파예트,

그는 의기소침해 하는 대신,

함께할 장교들을 모으고 배를 한 척 준비합니다.


그리고 정부의 감시망을 따돌리기 위해,

아내와 장인을 모시고 마르세이유 관광을 예약하곤, 그들과 떨어져 자신이 준비한 배를 숨겨놓은 스페인으로 냅다 달려갑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프랑스 정부,

놀란 관원들이 스페인 부두로 뛰어옵니다만,

라파예트의 배는 어둠 속으로 이미 출항한 상태였죠.


19살의 어린 후작 라파예트는 마르세유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에게 미안함을 담은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그의 배 <승리호(La Victoire)> 

갑판 위에 주저앉아 밤하늘을 바라봅니다.


1777년 4월 20일,

앞으로의 그의 운명은 하늘만이 알 것이었습니다.



<< 신대륙에서 만난 아버지 >>


필라델피아의 Carpenter hall, 미국 혁명의회가 존재했던 기념적인 작은 건물입니다.


"당신 모험자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필라델피아 대륙의회 정문,

한 남자가 불어로 연설을 하더니

15명의 프랑스 장교들을 문 밖으로 쫓아냅니다.

(어린 라파예트도 그중에 있었습니다).


이미 시기는 7월 28일 여름,

프랑스에서 이들이 떠나온 지도 3달의 시간이 넘었습니다.

 

걸어서 대륙의회가 있는 곳까지

고생하며 도착한 프랑스 장교들.

그런 그들을 의회 사람들이 급히 밖으로 쫓아냅니다.


여관에 앉아 어리둥절해하는 이들에게,

의회와 줄이 닿아있던 이들이 다가와 이야기를 해줍니다.


"살라스 딘, 그 자식...

  너무 사람을 많이 보냈단 말이오!"


원래 대륙의회에서는 딘에게

프랑스 공병장교 4명을 확보해 보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떠벌이 사기꾼이 보는 사람마다 영업력(?)을 과시한 것이죠.


결론적으로 라파예트를 비롯하여, 미국에 도착한

프랑스 장교는 75명이나 되었습니다~!!!


거기다 병과도 다양해서,

이제는 외국인 장교들로 군대를 꾸려도 될 정도가 되었죠.


당연히 딘은 대륙의회에 붙잡혀와

'파면' 당하게 됩니다.


더하여 대륙군 사령관 '죠지 워싱턴' 은 참다참다

의회에 서한까지 보내게 됩니다.


"영어도 못하는 놈들 그만 좀 보내시오,

  이놈들이 와서 밥만 축내고 있잖아!"


고생 고생해서 도착한 혁명의 땅,

이제 그와 동료들은 꼼짝없이 찬밥 신세로

프랑스로 돌아가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눈만 뜨고 있던 라파예트에게 의외의 곳에서

구원의 손길이 찾아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 의 추천서가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더하여 프랑스 신문에까지 나오며 떠들썩하던 그의 도주극 역시 도움이 되었죠.


어린 나이에 그는 이미 유럽의 유명인사였습니다.


라파예트를 만나는 죠지 워싱턴, 어느 한 식당에서 둘의 만남이 성사됩니다. 얻어먹는 날 라파예트는 그의 동료들도 모두 다 데리고 가버리죠~


단번에 그의 선전 가치를 알아본 (요즘으로 치면, 프랑스에서 온 셀럽일까요?) 대륙의회는 라파예트에게 정중히 사과를 하고, 필라델피아의 한 식당에서 대륙군 사령관 죠지 워싱턴과 만남을 주선해 줍니다.


드디어 꿈에 그러던 자유의 혁명 사업에 합류한다는 사실에 흥분한 라파예트.


그는 내친김에 기다리고 있던 동료 장교들까지

몽땅 몰고 가서 워싱턴에게 이야기합니다.


"존경하는 장군님~ . 저에게 1개 사단만 주시면,

 영국놈들을 바다 끝까지 몰아내겠습니다."


이제 45살의 나이를 바라보는

산전수전 다 겪은 워싱턴,


그는 물끄러미 고3병 증상이 보이는

어린 프랑스인 청년(또는 소년)을 바라봅니다.


막내아들 같은 그를

웃음 띈 얼굴로 바라보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안됩니다."




어린 청년 장교는 이제

워싱턴 휘하의 참모부에서 일하게 됩니다.


물론 라파예트에게 소장 이라는 파격적인 장군 지위를 보장해 주었지만, 어리고 상징적인 인물이었기에 전쟁터에 보내기는 부담이 있었죠.


하지만 유전자는 배신하지 않는 법,

전쟁터에서 몸을 던지는 라파예트 가문의 본능이

그를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1777년 9월 11일,

노련한 영국군은 미국 혁명군의 허술한 포위망으로 돌격해 들어옵니다.


필라델피아 남서쪽, (이름만 들어도 취할 것 같은) 브랜디와인(Brandywine) 강가에서 대규모 접전이 일어납니다.


지휘로 정신없던 워싱턴에게 라파예트는 슬며시 다가가 자기가 그곳으로 달려가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워싱턴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신이 난 어린 장교는 전쟁터 한가운데로 달려가,

몰려오는 적들을 향해 그의 부대원들과 돌격을 시도합니다.


그리곤 정신없이 싸우다 다리에 총을 맞곤...

기절해서 실려오게 되죠.


그날의 전투는 대륙군이 크게 패배하고 후퇴하게 됩니다. 라파예트 후작의 첫 아메리카 대륙 데뷔전은 이렇게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후세 역사가들은 이날의 라파예트를 이렇게 그렸지만 (좌측) ~~~ 사실은 저랬다고 합니다 (우측)


거듭되는 패배로

'죠지 워싱턴' 의 입지는 점점 좁아집니다.


더하여 그의 반대파였던 '호레이쇼 게이츠' 는 새러토가 전투에서 승리하며, 워싱턴의 영향력을 위협합니다.


게이츠는 이제 노골적으로 워싱턴 대신,

본인이 대륙군 총사령관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워싱턴 휘하에 다른 프랑스 장군, 

'토마스 콘웨이' 는 게이츠파로 변심을 하게 되죠.


영국군에겐 패하고, 내부적으로는 서로 세력을 불려야 하는 정치 싸움까지 벌어진 상황.


콘웨이는 다쳐 요양 중이던 '라파예트' 에게 찾아와 자신들과 함께할 것을 은연중에 부추깁니다!  


죠지 워싱턴(좌) 과 호레이쇼 게이츠(우), 한 때 둘은 라이벌이었습니다.

이 철없는 어린 장군은 병상에서 이들의 정치싸움은 모른체(당연히 알 리가 없었지만) 반워싱턴파 들의 상냥한 태도에도 감동을 합니다.


친하게 지내던 콘웨이를 통해 게이츠에게 승전을 축하하는 편지를 보내곤, 다시 또 워싱턴에게도 그의 지도력을 믿는다는 편지를 보내며, 편안한(?) 병상생활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둘의 싸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이제 한가하게 병상에 누워있던 라파예트의 귀에 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너무나 놀란 라파예트는 한걸음에 워싱턴의 막사로 뛰어갑니다. 하지만, 반대파라 의심을 받고 있던 라파예트를 워싱턴은 만나주지 않습니다.


생각을 하던 라파예트는 자리에 앉아

워싱턴에게 장문의 편지를 씁니다.


"유럽에 있는 동안 저는 미국인들은 자유를 사랑하

 며, 일치단결하여 의회를 지지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모르는 의회의 멍청이들이 장군님

 을 옳아 매려 하는군요. 하지만 전 장군님을 굳게   

 믿고 지지합니다.


  ...창피하게도 저는 속아 왔습니다.

  이제 진실을 알게 되어 전보다 더 장군님을 지지하

  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 운명은 장군님과 하나가 되어 뜻하시는

  바를 전력을 다해 따르겠습니다. "


혁명의 땅을 꿈꾸며,

프랑스를 탈출해 먼바다를 건너 도착한 땅.


전쟁에 참여해 부상까지 입었지만,

우습게도 정치싸움에 휘말려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를 상황.


라파예트는 정공법을 택합니다.


정성 어린 편지를 보내고 얼마 후,

차갑기만 하던 워싱턴에게서 답장이 도착합니다.


"이 모든 전쟁이 끝나면,

 버지니아에 있는 내 농장에 와주지 않겠소?


 그날이 온다면 우리는 오늘 우리들이 겪은 고난과

 사람들의 모략을 떠올리며 그저 웃어넘기게 되겠

 지요.


 그리고 내 모든 노력과 지식을 다해

 내가 그대를 얼마나 아끼고 가깝게 여기는지

 알려줄 수 있을 거요."


포지 계곡에서의 워싱턴과 라파예트, 대륙군이 가장 힘든 시기 그는 워싱턴을 아버지처럼 생각하며 항상 옆을 지킵니다.
전쟁터에서 사라져간 라파예트의 아버지와 비슷힌 연배, 워싱턴과 그의 행보를 보면 아버지와 아들 같은 깊은 유대감이 느껴집니다. 라파예트에게 워싱턴은 또 다른 이름의 아버지였습니다

<< 혁명 그리고 또 혁명 >>


영화 <패트리어트> 에서의 '요크타운 전투', 주인공을 도와주는 프랑스 장교는 라파예트 는 아니었지만, 아마도 저런 모습이 아니였을까 생각합니다


워싱턴을 도와 미국을 종횡무진하던 라파예트.


이제 그는 프랑스로 다시 돌아가 루이 16세에게

사면을 받고, 대규모 응원군까지 몰고 옵니다.


마르세이유 호텔에서 바람 맞혔던 어린 아내는

이미 그의 아이를 낳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조지 워싱턴 드 라파예트

 (Georges Washington de La Fayette)'.


바다 건너 대륙에 있을 ,

그와 이름이 같은 양할아버지에게 보내는

존경의 표시였습니다.


다시 미국으로 복귀한 라파예트는 명실상부한 워싱턴의 오른팔이 됩니다. 그리고, 오랜 전쟁을 거쳐 이제 미국 독립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할 <요크타운 전투>가 다가옵니다.


1781년 5월,

이제 미국 독립군은 영국군을 항구도시 요크타운으로 밀어붙입니다.


라파예트의 지휘 아래 대륙군은 겹겹이 도시를 포위하였고, 바다와 육지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 후에 독립의 아버지들은 결국,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내게 됩니다.

https://youtu.be/e3W3URlMWVk

영화 패트리어트 <요크타운 전투> 장면입니다.


1781년 10월 19일,

영국군은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여왕의 레드코트들은 미국 대륙을 떠나가게 됩니다.


승리의 환호가 가득하던 날,

라파예트는 그가 건너왔던 푸른 대서양 바다를 바라봅니다.


추격대를 피해 자유를 찾아, 스페인의 항구에서 도망치듯 떠나온 19살의 소년은 이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하나가 되어 영웅으로 추대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그의 영웅담은 이제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도 유명해질 터였습니다.



1784년 8월 17일,

그는 작은 이벤트를 맞이합니다.


바로 아버지처럼 따랐던

죠지 워싱턴농장에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왕이 되어달라는 사람들의 요청에도,

단호히 은퇴생활을 선택한 워싱턴.


그가 편지에 썼듯 전쟁이 끝나고

버지니아의 한적한 농장에서,

다정한 아버지와 아들처럼 그렇게,


두 대륙의 영웅들은 마주 앉아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인들 치고는 소박하게 옛 일들을 웃으며 이야기합니다.


비록 완고한 아버지와 자유로운 아들처럼,

노예문제 등의 이야기에서는 서로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이 사이좋은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운트 베르논 농장에서, 라파예트와 워싱턴 가족들의 모습. 전쟁 후의 둘의 모습은 영락없는 한 가족이었습니다.


미국인들은 이 이방인 건국의 아버지에게

감사의 의미로 미국 시민권을 부여하였습니다,

정작 프랑스에는 존재하지 않는 시민권을 미국에서 받았음을 라파예트는 평생 재미있어합니다.


그의 행보는 거침없이 이어집니다.

<흑인들의 친구 협회> 단체에 가입하여, 당시에는 상당히 획기적이던 발상인 '흑인노예 해방운동'에도 앞장서고 흑인들의 교육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신념을 프랑스에도 가지고와

 귀족과 부르주아들에게 미운털이 박힙니다).


모든 도움이 끝나 안정되어 보이는 미국의 풍경,


하지만 정작 5년 뒤에는 어머니 나라 프랑스가 거대한 '혁명' 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자신이 이 나라의 도움이 필요하게 될 줄은 젊은 후작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죠.



1789년 파리,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삼부회에 소집된 평민 의원들이 국왕 근위대에 쫓겨나 테니스 코트장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이들 중에

귀족의 신분인 ‘라파예트' 도 함께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다른 신분이었음에도,

자유와 평등 을 주장하며 혁명을 지지하였습니다.


<베르사유의 장미> 에서는 테니스코트 서약에서 평민들을 보호하는 라파예트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혁명의 시기, 그는  '인권선언문'을 작성하기도 하였고, 국민방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프랑스의 치안을 유지하였습니다.


하지만,

급진적인 프랑스혁명의 불길은 미국보다 더욱 거세었고, 그의 주변에 모든 것을 불살르곤 결국 그를 몰락하게 만들었습니다.


파리 치안유지에 실패한 라파예트는

새로운 황제, '나폴레옹'과 갈등을 빚었고,

여러 번의 부침을 겪은 후 고향으로 내려와

조용한 삶을 살다 마지막을 맞이하게 됩니다.  


1834년 5월 20일,

항상 혁명의 가운데 있었음에도 73세의 나이로

라파예트 가문의 남자들 중에선 나름 장수한 그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합니다.


죽는 순간 까지도, '흑인노예해방' 을 주장하며 활동하다가,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탓에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립'은 군대를 동원하여 그의 장례식장의 조문 행렬을 막아 버립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몰려옵니다.


특히 미국의 시민들은 그의 죽음을 더욱 슬퍼하였고, 그의 무덤 위로는 그가 누볐던 미국 땅의 흙이 담겨와 뿌려집니다.


그의 죽음 후에 35일간 미국 전역에서는 조기가 게양되고, 국회의사당은 한 달 동안 검은 천을 걸어 최고의 예우를 표시합니다.


명망 있는 수필가,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 브리앙 은 그의 죽음에 대하여 신문지상에 짧은 글을 남깁니다.


"그의 생애는 한 점의 얼룩도 없다.

 그는 상냥하고 자상했으며, 고결한 사람이었다."


* 그리고 <라파예트> 라는 이름은 아직도 프랑스와 미국 사이의 우정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워싱턴 DC, 그의 이름을 딴 <라파예트 공원> 의 동상 입니다. 이방인임에도  그가 사랑받는 이유는 순수한 열정에 따른 삶을 실천하며 살았기 때문일 겁니다
영화 <라파예트> 중에서, 1차 세계대전 위기에 몰린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미국에서 보낸 공군 조종사 비행단의 이름 역시 <라파예트 비행대> 였습니다.
미국의 라파예트급 잠수함(좌) 과 프랑스의 라파예트급 호위함(우), 그는 아직도 두 나라의 후손들이 기억하는 명실상부한 영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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