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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 Studio Bleu Oct 10. 2020

당신의 코리아는 어떤 모습 인가요?

엘리자베스 키스, <올드코리아> 를 만나다.

<올드 코리아>, 어느 외국인이 사랑한 나라

1919년 3월,

검문이 삼엄하던 부산항에 푸른 눈의

두 여자가 짐을 내립니다.


커다란 트렁크 가방, 외국인이 흔하지 않던 시절,

그것도 여성 두 명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죠.


기차역마다 가득한 제복 입은 칼을 찬 군인들,

일본의 동맹국인 영국에서 왔음에도 이들의 눈에

비친 이 나라의 모습은 긴장이 가득합니다.


긴장된 눈으로 하지만 태연하게 기차에 오른 두 여인. 얼마 전, 이 나라에서는 커다란 난리가 났다고 들었습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야간기차가 서울을 향해 출발했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 창 밖으로 아침해가 어스름하게 떠올랐습니다.


  창 밖으로 펼쳐지는 야트막한 언덕 경치는
  원시적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
  동산들의 둥그런 모습이 마치 오래된 한국의
  도자기를 닮아, 사람들을 매혹시키기 충분했다
...
  가끔 여기저기 초가집이 모여 있었는데,
  기차 안에서 보기에는 사람이 사는 집이라기
  보다는 버섯들의 거대한 군락지와 같았다.


끝없을 것처럼 이어진 구불구불한 농로,

밝게 떠오르는 햇살 아래로 암갈색의 황소들이 짐을 실은 채로 걸어갑니다. 하얀 옷을 입고 허리를 펴고 곧게 걸어가는 키 큰 사람들.


오늘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사라져 버린,

이름만 남아 이어져 내려오던 신비의 나라, ‘코리아' 를 화폭에 담아낸 한 스코틀랜드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 에버딘셔의 작은 아씨들 >>


1881년 스코틀랜드의 동북 항구도시,

에버딘셔(Aberdeenshire) 에 키스 가문.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아이들 사이로 총기 넘치는 눈을 한 여자아이가 종이 위에 무언가를 열심히 스케치합니다.


명망 있는 세관장 '키스(Keith)' 씨네 넷째 딸,

엘리자베스(Elizabeth) 는 오늘도 무언가를 열심히 그려냅니다.


그녀의 위로는 세 명의 언니와 한 명의 오빠가 있었죠. 그리고 빠듯한 세관 공무원의 월급으론 (아무리 고위직 이라곤 해도), 다섯 번째로 밀려있는 여자 아이에게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시킬 여유는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시기는 아직까지 여성들이 투표권도 받지 못하는 시기였으니깐요, 인형처럼 잘 키워진 여성들은 좋은 남자를 만나, 내조하는 것이 미덕이라 여겨지던 시대였답니다)


'내 투표권 내놔~!!!' ~~  슬프지만 이런 시대가 있었습니다. (영화, <서프러제트> 중에서)


거기다 설상가상,

엘리자베스의 아래로 네 명의 남동생이 태어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의 미술공부는 꿈과 같은 이야기였죠.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들은 꽤 진보적인 분들이었나 봅니다.


여자들은 학교도 잘 보내지 않던 시절에,

아홉 남매 모두를 공평하게 교육을 시켰으니까요.

그런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 네 자매는 모두 고등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비범한 키스가의 아씨들은 나름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던 유리벽을 부수고 올라갑니다.


먼저 엘리자베스와 가장 인연이 많던 큰 언니 '엘스펫'. 그녀는 출판사 사장님인 남편 '로버트슨 스콧' 을 도와 글을 쓰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둘째언니 '제시' 는 엘리자베스의 실질적인 매니저가 되어주었죠. 여행 계획과 원고 정리, 그리고 다른 세세한 업무 등을 능숙하게 해내었습니다.


셋째 '레이첼' 은 엘리자베스와 같이 그림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림을 연구하던 그녀는 화가 '안톤 판 안루이' 와 결혼합니다. 안톤은 엘리자벳에게 그림에 대한 많은 조언을 해줍니다.


그리고,

막내 '엘리자벳' 은 거침없이 도전하고 실행하는 대담함을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아무런 도움이 없었음에도, 그림 공부를 계속하였고 항상 새로움에 대한 동경을 느끼게 됩니다.


당시 그녀가 동경한 곳은 세상의 중심이었던

영국이 아닌, 먼바다 건너의 세계였습니다.


런던으로 이사 온 키스 가족들,

창 밖으로 드나드는 커다란 증기선들을 보면서,

그녀는 뛰는 가슴을 느낍니다.


그녀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던 곳은 우아한 느낌의 프랑스도,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이탈리아도 아닌,

먼 바다 건너의 땅. 바로 '아시아' 였습니다.   



<< 지팡구 >>


1915년,

유럽 대륙은 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원했습니다.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서부 전선에서 싸우고 있었고,

많은 영국의 젊은이들도 이 살육의 고리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어두운 공기가 영국의 수도,

런던을 감싸고 있던 어느 날.


런던에 있던 엘리자베스는 한 통의 편지를 흥분한 모습으로 읽고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큰 언니, 엘스핏 에게서 온 편지였습니다.


일찌감치 남편 존과 함께 먼 동방의 나라,

일본으로 넘어가 출판사업을 하고 있던 부부.


엘스핏은 어린 '엘리자벳' 에게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편지를 보냅니다. 그녀의 그림에 대한 열정을 알고 있었기에, 이 제안은 더욱 매력적일 거라 여기며 말이었죠.


엘리자벳은 전쟁의 참화가 가득한

유럽을 뒤로하고 드디어 머나먼 동방으로 떠납니다.

그 옛날 마르코폴로가 황금의 땅이라 이야기했던,

지팡구, 일본으로의 여행이었습니다.


1915년,

세 달 정도의 시간을 보낼 요량으로 시작한 일본 여행은 너무나 매력적이었고, 그녀는 3년이 넘는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게 됩니다.


일본 북부의 홋카이도까지 그녀는 곳곳을 누비며 그림을 그려나갔고, 그런 그녀의 작품은 항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죠.


블루 앤 화이트 (1939)    새해 등불 (1925) , 그녀의 눈에 비친 일본의 모습들 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1919년.

형부 존이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시기가

다가옵니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아시아 여행,

그녀와 언니 엘스핏은 조그만 계획 하나를 새웁니다.

얼마 전 일본의 땅이 되어버린 바다 건너 반도,

새로운 식민지, '조선' 으로 여행을 계획한 것이죠.


두 여자들이 가는 여행,

그녀들이 준비하는 모습을 보곤 친한 일본인들이

찾아와 이야기를 건넵니다.


얼마 전 소동이 일어난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니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는 말이었죠.


일본인들의 우려 섞인 눈빛과 형부 '존' 의 염려에도, 두 자매들의 모험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1919년 3월 28일.

스코틀랜드의 두 여인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의 수도, 서울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 근대화, 사라져 가는 것들 >>


<시골 결혼잔치> (1921)
< 수원의 수문, 화흥문 > (연도미상), 수로 아래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 엘리자베스 키스의 올드 코리아(Old Korea) >


는 아직까진 널리 알려지지 않은,

동양을 사랑했던 한 여류화가의 기록입니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그의 언니 엘스핏과 함께,  

3.1. 운동이 막 끝난 저항기의 대한민국에 도착합니다.


당시 그녀의 모국 영국과 일본은

둘도 없는 동맹국이었죠.


동양에 병자라 불리던,

커다란 중국은 갈기갈기 쪼개어지고 있었고,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하나 둘 식민지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쪽 끝 섬나라 일본은 영민하게도

아시아 국가 중엔 유일하게 식민지 경쟁에서 승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언니,

엘스핏이 서문에서 언급하였듯.

일본은 서양의 사람들에겐 예의 바르고 깨끗한,

문명화된 나라로 알려져 왔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반기를 드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어떻게 보면 시대의 변화를 놓쳐버리곤 아직까지도 고집을 부리는... 망해버린 집안의 뒷방 노인네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여졌을 겁니다.


키스의 언니인 엘스핏은

서문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서양 사람들은
  '싹싹한 일본인들'에 감탄하고 있었으므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그런 처사는
  잘한 일이라 생각했고,

  일본이야말로 너무나 뒤떨어진 한국을
  문명국가로 만드는데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엘리자베스와 엘스핏이 바다 건너,

아직은 개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조선' 을 여행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의 기운이 아직도 잔불처럼 남아있던 때였습니다.


많은 일본인들이 정세가 불안한 미개한(?) 식민지,

조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우려하고 걱정했습니다.


가슴 한 켠에 그런 우려를 가지고 바다를 건너온 두 자매는 이내, 이 곳으로 오려고 한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됩니다.  


< 서당 풍경> (연도미상)
 날은 점점 더워졌고
 수많은 파리떼가 마당에서 마구 날아다녔다.  
 
  그런 와중에 가끔씩
  집을 둘러싼 담 사이로 내려다보면
  끝없이 파란 하늘과 높은 산이 보였다.
 
  참으로 매혹적인 한국의 모습이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

모든 것들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 나라.


코리아의 오래된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담담하게 화폭에 담습니다. 그리고 급격하게 새로운 것들이 들어오면서, 오래된 풍경들이 점점 사라지는데 아쉬워하죠.


그녀의 이런 마음들은 화폭에 담긴 그림 한편에 짧은 글들로 남아있습니다.


그녀가 일본에 의해 급격하게 변해가고 있던,

한국의 전통 건물들을 보고 사람들을 보면서,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 살펴볼까요?


<신식학교와 구식학교> (연도미상)
  군인처럼 칼까지 찬 선생이 학생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행진을 시키고 있었는데,
  주위의 평화스러운 환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나이가 좀 찬 학생들은
  규율도 그리 심하지 않고
  푸근한 집 같았던 서당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을까?
...
  이제 일본의 압박에 놓여있으니,
  한국 사람들은 다시 옛날 한복으로 돌아갈까?

  일본 사람들의 복장을
  계속 사용하는 게 편하다고 생각할까?

  과연 한국 사람들은
  옷뿐만 아니라 건축양식에서도
  추악한 일본의 잔재를 없앨 수 있을까?

  그들에게 현명한 충고를 해줄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저는 이 글을 보면서 몇 달 전 한참 이야기에 오르던

'도시 현대화' 사업에 대해 이야기하며, 아직도 부수고 파내야 한다고 이야기하던, 많은 패널들이 생각났답니다.


'품격 있는 도시' 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어느 한 화가가 보았던 그 시절의 사람들보다

우리는, 현명해지고 있는 걸까요?



<< 노예로 살기를 원치 않는다 >>


<두 학자> (연도미상), 엘리자베스는 이들의 신비한 모습을 보며, 고집스럽지만 불의를 참지 않는 학자들에게 깊은 존경심을 느꼈습니다.


서울에 발을 들인 키스 자매를 맞아준 것은,

당시 유명한 선교사인 '제임스 게일' 박사였습니다.


그녀를 맞아준 이가 조선을 아끼고 사랑했던

캐나다인 이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다행이었을까요?


게일은 당시 3.1 운동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조선인들의 아픔에 대하여 이야기해 줍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스케치 여행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됩니다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는 백인 여자의 모델로 위의 두 어르신을 설득해 준 것도 게일 박사였죠).


30년이 넘는 시간을 한국에서 보낸 게일 박사는,

자신이 보고 느낀 코리아라는 나라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해 줍니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들의 현대문명과 전혀 다른
  그들만의 순수한 정신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도 지난 삼십 년 동안 그들의 정신세계를 연구
  했지만 아직도, 채 이해 못하는 구석이 많답니다.

  깊이 파고들수록
  한국인과 그 문화를 존경하게 됩니다.


또한 이런 이야기도 해줍니다.


  아시아에서 기독교 전파가 쉽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많은 일반 대중이 문맹이라
  글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
  극동에서 한국만이 유일한 예외입니다.
  그들은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글자를 가지고 있죠.

  어떤 선구자적인 본능이 작용했는지 모르지만,
  한국에선 460년 전에 간단한 표음문자가
  발명되었어요.

  그래서
  남녀노소, 빈부의 차이, 직업 고하, 생계 방식을
  막론하고 누구나 글을 읽을 수 있죠.
   ...


음, 어제가 한글날이었군요.


수 십 년 전의 파란 눈의 외국인들이 보기에도

우리의 '한글' 은 매우 선구자적이고 파격적인 발명품으로 여겨졌나 봅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만약 한자를 베우고 있었다면....

으,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요 ㅠㅠ


더하여 엘리자베스는 감리교 선교회 병원장을

하고 있던 '메리 스튜어트 여사' 도 만납니다.  


시간이 지나 서로 친해지자 그녀는

키스 자매에게 마음에 담고 있던 이야기를 해줍니다.

서울에 있던 외국인들 사이에 '일본의 첩자 두 명이 온다' 라는 소문이 돌았노라고 말이죠.


하지만, 이내 오해가 풀어지고 둘도 없는 친구가 된 그녀를 통해 엘스핏과 엘리자베스는 3.1 운동에 뛰어든 많은 용감했던 조선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위험한 잔인성을 가진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우려는 30년도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고 말죠...)


<김윤식의 초상화> (1921) , 고종 임금 당시 외무대신을 했던 그의 사망 한 달 전 모습입니다. 엘리자베스는 기득권인 나이 든 양반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화구들을 챙겨 들고 여러 사람을 그리던

그녀의 앞에 초로의 대학자가 앉아 있습니다.


한 때 모두가 우러러보던

높은 자리에 있던 양반 어르신.


하지만,

지금은 망한 나라에 새로운 지배자에게 작위를 받고 편안히 여생을 보낼 것 같던 그가, 움직이기도 불편한 몸을 이끌곤,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85살의 나이였지만 독립운동을 지지했고, 그의 손자는 2년의 옥고를 치르고 이후 사망했습니다) 


만세운동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일본 총독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식민지배의 부당함을 꾸짖었다고 했습니다.


김윤식
 :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고 노예상태를 벗어나는 것이다.
     ...
   무수한 양민들이 붙잡혀 감옥이 넘쳐나고
   옥중에서 죽는 자들이 많으며,
 
   함부로 총을 쏘아 길에 시체가 산처럼 쌓였으나,
   독립운동이 봉기한 것은 우연이라 할 것인가?
    ...
   시위 주모자를 모두 죽일지라도
   그 정신은 영원히 살아남아 사람마다의
   가슴 깊이 뿌리내려 각자 집에서
   만세를 부를 것이다!
    ...
   오늘날 죄 없는 자녀들이
   도탄에 빠진 것을 보고 침묵할 수 없어,
   나와 이용직도 대한독립을 위해
   침실에서 만세를 불렀노라....


이런 나이 든 학자들의 모습을 보고

엘리자베스는 감탄을 합니다.


나이 든 대학자가 어리고 지위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바른 소리를 합니다.


그리고, 나이 어린 학생들은 이제는 사라져 버린

나라를 위해서 만세를 외치다 잡혀갔죠.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책에서

이런 한국인들의 모습을 일본인들과 비교하며,

이 조그만 사라져 버린 나라의 기백 넘치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일본의 밑으로 들어갔으나

김윤식과 함께 작위를 반납하고,

기꺼이 일경에게 끌려간 또 다른 인물,


이용직의 이야기를 그녀는 자세히 남겨놓았습니다.


심문관
 : 진정한 힘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이용직
 : 진정한 힘이란 우리가 오늘 너희들에게
  보여주는 단결된 조선 사람들의 정신이다.

   너희들은 군함의 무력을 자랑하지만,
   우리가 만세를 부르는 정신을 분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힘이다.

<원산의 학자와 그 제자들> (1921), 원산에서 그림을 그리던 엘리자베스는 특히 이 학자를 좋아해서 많은 그림을 남깁니다. 은근히 멋을 부리는 그도 그녀가 싫지 않았나 봅니다
<왕릉 앞에 선 시골 선비> (1921), 네, 같은 분 이랍니다^^  그림에 너무나 협조적인 이 선비는 떠나려던 엘리자벳을 끌고 직접 뒷동산으로 가서 모델을 서 주셨다고 하네요


원산에서 만난 한 선비는

이 파란 눈의 여화가가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관복도 입고, 제자들과 모델도 서주었고,

몸소 조상들의 묘소까지 보여주었죠.

(물론 엘리자벳이 집에 돌아가는 시간이 늦어지긴 했습니다만 ^^;;;)


그런데 이 분이 또 그리 고분고분하진 않아서,

완성된 자신의 그림을 보곤 이리저리 포토샵(?)

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네요 ^^;;;


그녀는 이름 높은 선비가

조상 대대로 지켜온 무덤들을 보면서,

역시 한국 독립을 위해 힘썼던 '헐버트' 박사의

이야기를 옮기며 공감합니다.


헐버트
  :  한국의 무덤들은 모양새나 차림새가
     세계 어느 것 보다도 아름답다.


고고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던

그의 모습을 보면서, 엘리자벳은 신비로움과 포근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안타까워하죠.

이 평화로운 풍경들이 일본에 의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음을 목격하게 되어서였습니다.



<< 조용하지만  강인한 여성들 >>


<과부> (연도 미상),  그녀를 만났을 당시는 만세 운동에 참여해서 막 감옥에서 나왔을 때였습니다. 그의 아들은 독립운동을 하다 행방불명이 되었죠.
 온화하면서도 슬픈 얼굴의 이 여인은
 한국 북부지방 출신이다.
   ...
  몸에는 아직 고문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고 원한에 찬 모습은
  아니었다.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움이
  뿜어져 나오는 여인이었다.
  ...
  외아들은 언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아들은 3.1 운동에 적극 가담한 애국자였다.


엘리자베스가 한국을 돌아보며 감탄한

또 하나의 존재는 바로 여성들이었습니다.


가녀린 몸에 온화한 태도, 하지만 자신들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선 산이 움직여도 그대로일 것 같은 강인함.


여행 도중에 그녀는 많은 여성들이 아직도 갖은 노동에 시달리고, 교육받지 못하고 있음에 안타까워합니다.


아마도 그녀들의 모습에서 아직도,  

'참정권' 을 요구하며 투쟁하던 영국의 여성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신부> (1919), 이 그림을 그리는 내내 엘리자베스는 그녀를 가여워 합니다 ㅠㅠ


개인적으로 키스가 한국에서 가장 비극적인 존재라고 언급한 결혼식날 신부의 모습입니다.


가장 기뻐야 할 결혼식 날,

신부는 하루 종일 안방에 앉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저 듣고만 있어야 한다고 하네요 (어우.... 저는 처음 듣는 풍속이라...)


신부의 어머니며 다른 여성들도 밖에서 수발들기 바쁘고,신랑과 친구들은 진탕 술 마시며 논다고들 합니다만 ..... 음.... 이건 제가 봐도 좀 너무하네요.


아무튼.

고된 시집살이의 시작은 이 안방에서부터가 아닌가 합니다. 엘리자베스는 글의 말미에, 그래도 이제는 이런 관습을 거부하는 신여성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고 하며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저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음을 감사해야 할까요?


인내심이 저절로 생겨나게 만들던 시절에 만난

한국 여성들을 보며, 엘리자베스는 오늘날에도 다른 문화를 대할 때 모범이 될 것 같은 작은 메모를 남겨 놓습니다.


  한국 여자들은
  뼈대가 작으며 얼굴 표정이 부드럽다.

  온순하기만 한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완고한 구석이 있다.
  ...  
  그들의 생각이나 생활신조를 바꾸려 한다면,
  차라리 서울을 둘러싼 산들을 허물어 옮기는
  것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오직
  한국풍습을 존경하며 끈기와 친절로 대해야 한다


우리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의 할머니들을 보며

한 외국인이 남긴 평가입니다.


그래도

지금은 높았던 산들이 조금은 허물어진 것 같아 보여 다행일까요?


<널뛰기> (연도미상), 힘든 여성들의 지위를 아파하면서도 그녀는 희망이 남아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 신화가 깃든 산 >>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은 여러모로 독특합니다.


스스로가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독학으로 그린 그림들이 많았고, 무엇보다 호기심 많은 모험가 성격 때문에 그림에는 특별한 그녀 만의 특징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초기 수채화는

포근한 느낌의 색감과 따듯한 풍경 분위기가 많다면,

일본 생활부터 배우기 시작한 목판화의 영향으로 색들은 더욱 선명해지고, 일본 전통 민화인 우키요에 같은 분위기마저 풍깁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 하나하나는 모두가 현실적인 그림들입니다. 따듯한 풍경들을 찾되 최대한 현실을 반영하는 그림들을 그렸죠.


이후 키스는 중국, 필리핀 등의 나라를 다니며

이 같은 원칙을 준수합니다.


한국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화폭에 담으며,

그녀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깁니다.


  그림을 통해 나는
  한국의 의상, 집의 모양, 풍습과 여러
  고유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려 애썼다.
   
  지난 십 수년간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귀중하게
  여기면서 잘 간수해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다.

  같이 살펴보면 볼수록 한국의 문화는
  존경하고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보존되어야 할 것들은 이제는

잘 지켜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저는 사실 그렇게 말할 자신이 없을것 같습니다.


눈에 비치는 풍경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엘리자베스가 한국을 돌면서 남긴 몇 안 되는 신비한 그림들이 있습니다.


<금강산, 전설적 환상> (1921) , 기도하는 인간을 신들과 호랑이 용이 쳐다보고 있습니다
<금강산 구룡폭포> (1921), 여기저기 용이 보이나요? 나쁜 짓을 하던 녀석들 치곤 귀여워 보이네요.


한국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자베스는 금강산에 오르게 됩니다.


그곳에서 본 한국의 모습은 상상 이상이었죠.


산 중턱 산사에서 만난 사람들은

금강산에 대해 이야기해 줍니다.


1만 2천 봉우리에 내려오는

부처님의 모습과 산을 지키는 호랑이들,

연못 속에 살고 있는 용들의 모습까지...


꿈이라도 꾼 듯,

금강산의 봉우리들과 구룡폭포를 여행한 엘리자베스는 이야기의 생생한 그 모습들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녀의 책 안에서,

비록 지금은 아프고 힘들지만,

언제나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을 신화의 나라,

코리아는 다시 그려지고 태어나게 됩니다.


   한국의 풍경은 마치  
   조바위를 쓴 한국 여인의 차분한 얼굴처럼  
   평안하고 조용해 보였다.

   한국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워
   때때로 기이한 감동을 맛보게 된다.
    ...
   가끔 걸어보면 시간을 초월한
   황홀경마저 느끼게 된다.

   이 감각적인 즐거움은 내 고국의 전원을
   산책할 때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필리핀 마닐라의 번화가,

글로리에타의 서점 한 켠에는 세계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소개하는 사진첩들이 있습니다.


동아시아 섹션에 비치된 '중국' 과 '일본' 사진첩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책들이 없음을 툴툴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들이 없는 서점 바닥에 앉아,

두 나라의 건축물들 사진을 보면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건 뭘까?

과연 저 두 나라 사이에 '한국' 의 건축물 사진첩이 들어간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어릴 적 가끔 들렸던 어르신들의 시골 마을,


이제는 사라져 버린 외양간 황소들과

마을 어귀에 장승상, 돌담길들.


파랗고 구불구불하던

그런 모습들이 기억에서 점점 희미해져 갑니다.


다시 한번 돌아가서,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가장 한국 다운 것은 어떤 것들일까요?


백여 년 전,

아름다운 조선의 모습을 구석구석 돌아본 한 서양의 여화가는 우리에게 약간의 힌트를 들려줍니다.


  어떤 사람이 1919년 서울을 방문해
  큰길로 다녔다거나 전차만 타고 다녔으면,

  아마 서울도 극동의 여느 도시들처럼
  부분적으로 서구화된 지저분하고 재미없는
  도시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대로를 벗어나서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들어서면,

  알라딘 단지 같은 장독들이 늘어서 있는
  신비스러운 집안 마당을 들여다볼 수 있다.
   ..
  골목은 미로 같아서 한 구석을 돌아설 때마다
  새로운 풍경을 관광객에게 보여준다.



<< My Beloved Country, Korea >>


<달빛 아래의 동대문 (1920)>, 엘리자베스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비록 헐려버린 성터에 남은 문이지만, 섬세한 돌담 표현은 목판화로는 만들기 어려운 기법이라고 하네요.
<해 뜰 무렵 서울의 동대문> (1921)
<신부 행차> (1921), 청계천을 지나던 신부 행렬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을 그리기 위해 스케치를 하며 따라가다가 엘리자베스는 청계천에 빠져 버렸다고..... ^^;;;


엘리자베스의 그림에 나오는 서울의 모습들입니다.

동대문은 그녀의 그림에 자주 나오는 단골 배경이기도 하죠.


<달빛 아래 동대문> 은 수채화 전문 화가이던

그녀를 목판화가의 길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선 신목판화 운동이 시작되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도쿄에서 전시회를 하던 그녀에게 유명하던 목판화가 '와타나베 쇼자부로' 가 찾아와 목판화를 시작할 것을 강하게 건의합니다.


도제식으로 이루어지던 일본 목판화 공방에서 오랜 시간을 참아가며, 그녀는 수공 목판화를 베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관동대지진으로 많은 목판들이 불에 타 사라지고 말죠.


그런 그녀에게 유럽에서 널리 응용되던 에칭화(금속을 긁어서 만드는 방식입니다) 방식을 건의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엘리자베스는 이후 시간과 노력이 훨씬 단축되는 에칭화를 많이 만들게 됩니다.


평양의 동문 (1925)    평양 강변 (1925), 대동문의 모습입니다. 많은 외국인들이  중국, 일본과는 다른 한국 건축의 진수를 보여주는 곳 이라고 평했습니다.


평양의 동문과 아름다운 대동강의 모습을

스케치하며 엘리자베스는 뜻밖의 환대를 받습니다.


서양 여화가의 등장에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온 것이었습니다.


시달리다 못한 엘리자베스는 사람들이 없을 거라

생각한 새벽에도 대동문으로 나가보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사람들이 그 새벽에도 그녀를 보러 오죠.


하지만 이즈음에는, 그녀는 이런 정감 넘치는

풍경들에도 푹 빠지고 맙니다.


  한국의 전원풍경은 정말 아름답다.

  어떤 예기치 못한 프로젝트가 시작되어
  그 오래된 땅의 매혹적인 풍경을 망가 뜨리지나
  않을지 걱정되어 한시바삐 그곳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동경을 느낀다.

  한국 풍경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저 먼 산 위의 푸른 색깔이다.

  그 푸른색은 특히
  북쪽으로 갈수록 더욱 아름다워진다.

  한국 하늘의 여름은 짙은 푸른색이지만
  비바람이 불 때는 짙은 남색으로 바뀐다.

   

혹시 산들이나 하늘이

서로 색이 다르다는 의미를 알고 계신가요?


저는 부끄럽게도 어른이 되어서야

산들과 바다, 그리고 하늘이 미세하게나마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고유의 색이 있음을 알게 되었답니다.


엘리자베스는 화가답게 이 의미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네요 ^^;;;


<안개 낀 아침> (1922),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새벽이 어스름이 밝아옵니다.
<원산> (1919), 이른 저녁 원산의 모습은 그녀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답니다.


'원산' 은 그녀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준 도시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녀가 생각하던 가장 한국적인 모습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이 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그녀는 매 순간마다 최고의 찬사를 보냈습니다.


  내가 아무리 말해도 세상 사람들은 원산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이번에 운 좋게 머물게 된 이 집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세상에 또 없으리라.....
 
  이 땅의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이란 ....
  별조차 새롭게 보인다.
  
  그림 그릴 곳을 찾아다니다가
  나는 가끔 멈춰 서서
  이 땅의 고요함. 평화를 만끽하곤 한다.


첫 문장을 보며,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를 보는 느낌이 들어요.


오래전  시인은 

이름 모를 연인에게 사랑의 찬가를 보내었다면,


 화가는 

신비로운 나라와 사랑에 빠진 것 같습니다.


<연날리기> (연도미상), 정월 초하루에 시작되는 연날리기는 한국 아이들의 대표적인 놀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한국의 여러 곳을 여행한 엘리자베스는

한국을 떠나 중국과 필리핀으로 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항상 바다 건너 동양에 있었죠.


바람처럼 여러 곳에서 작업을 하며,

1925년 단독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1933년에는 스튜디오 잡지사에서 선정한

영국 판화 대가 9명에도 선정이 됩니다.


그러나, 항상 평탄할 것 같았던

그녀의 앞날에도 먹구름이 드리웁니다.


일본이 만주와 동남아 국가들을 침범하기 시작하고, 영국과도 전쟁의 위기가 높아지자, 엘리자베스가 주로 그렸던 일본 관련 그림들을 더 이상 화랑들이 취급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림 외에 다른 수입원이 없던 그녀에겐

크나큰 시련이었죠.


하지만,

그녀의 한국에 대한 사랑은 멈추지 않습니다.


항상 한국을 언급할 때마다 <나의 사랑하는 나라(My Beloved Country)> 라는 수식어를 빼놓지 않았죠.


그녀가 사랑하는 나라,

코리아를 그린 그림은 총 66점에 달한다고 합니다.



<< 그녀가 남기고 간 것들 >>


1939년 여름,

엘리자베스는 미국에 있던 셔우드 홀 박사에게 메일 한 통을 보냅니다.


한국을 떠나 영국에서 생활하던 키스는 자진해서

한국의 결핵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스스로

크리스마스 씰 도안을 해주겠노라 제안합니다.


1934년 한국에서 결핵퇴치를 위해 활동하던 셔우드 홀 박사는 크리스마스 씰 발행을 통해 많은 모금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전통 도안으로 만든 씰이 없음을 아쉬워하던 홀 박사의 머릿속에, 항상 한국을 방문하면 자신의 어머니 집에서 머물던 엘리자베스 키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런 그의 조심스러운 부탁을

엘리자베스는 흔쾌히 수락합니다.


그녀가 사랑하는 나라,

코리아 사람들을 위한 일이었으니깐요.


총 3번에 걸쳐, 그녀는 결핵환자들을 위한 도안작업을 합니다. 1934, 36, 40년에 발행한 크리스마스 씰은 그녀의 한국을 위한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씰은 항상

한국의 모습을 담으려 했습니다.


동대문, 팔각정, 북한산 같은

한국을 대표하는 풍경들이 있었죠.


그리고,

평생 독신으로 지낸 엘리자베스의 그림에는

항상 아이들이 나옵니다.


그녀는 자유로운 자신의 삶을 사랑한 만큼이나,

아이들을 사랑하고 좋아했었다고 합니다.

(씰의 아래에는 '키스' 라는 뜻의 한자 이름

'기덕(奇德)' 이라는 서명이 보입니다)


그녀와 씰에 얽힌 더 많은 이야기들은

이곳을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의외로 일제 검열과 관련된 재미있는 내용과

강단 있는 그녀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답니다.



<청포를 입은 무인>, 재야학자 송영달 교수님이 발굴한 엘리자베스의 그림


2019년 7월,

경향 신문에는 커다란 발굴 기사가 납니다.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의 얼굴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였죠. 그리고 그 얼굴을 남긴 사람은 다름 아닌 엘리자베스 키스 였습니다.


이 그림은 엘리자베스가 남긴 그림 중 가장 큰 크기(77cm x 55cm) 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 작품의 인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반증이기도 하겠지요. 이름 모를 무인의 뒤에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 수 있는 <거북선> 의 모습이 보입니다.


음.... 대강 감이 오시죠?


아직 확증은 없지만,

많은 학자들이 이 그림으로 얼굴이 알려진 적이 없는 <이순신 장군> 의 모습이 발굴된 것이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실제 일제 강점기까지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들이 국가나 민간에서 전승되고 있었지만, 민족혼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대부분 사라졌으니까요.


멀리 캐나다의 엘리자베스의 후손들이 가지고 있던 이 그림에서, 그녀가 우리에게 남기려고 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더욱 정밀한 감정들이 필요하겠지만,

정말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그녀에게 또 한 번

커다란 빚을 지게 되는 것이겠죠.


흔히들 우리네 사람들끼리 만남에는

항상 갑과 을의 관계가 발생한다고들 합니다.


더하여, 백여 년 전, 태어날 때부터 사람들마다

차이가 존재한다고 믿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강한 나라는 약한 나라를 점령하는 것이고,

그것은 점령이 아닌 교화라고 정당화시키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야생 정글과도 같은 시절에

한 서양인 여성화가가 당당하게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찾아 왔습니다.


그리곤 아직 세련되지 못한

이 나라의 사람들을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며, 눈동자 속에 비친 그들의 모습을 화폭 속에 담아냅니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지던 시절,

당당하게 그 편견에 맞서며,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코리아의 사람들과 같이, 그런 시대가 잘못되었다고 목소리를 내어준,그녀는 그런 정의로운 사람이었구나 라고 말이죠.


그래서,

그녀가 남겨두려 했던 우리들의 모습을

그림을 통해 보면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답니다.


어렴풋이나마 그녀가 남겨주려 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더하여,

그녀가 말하였지만 너무 흔하기에 지나처 버리던

우리들의 주변 모습 하나하나가 생각납니다.


무엇이 우리를 가장 한국적으로 만들까요?


그녀가 말하던

알라딘의 단지 같은 장독들은 사라지고,

아름다운 산들은 콘크리트 건물들로 막혔습니다.


'품격있는' 이라는 수식어를 좋아하는 우리네 도시들은 앞으로는 또 어떤 모습을 담고 싶은 걸까요?  


그렇게,

올드 코리아 영 코리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묻는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요?


가을밤이 깊어 갑니다...


<엘리자베스 키스> 의 모습입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더 알고 싶다면 편하게 아래 웹툰으로도 보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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