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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 Studio Bleu Aug 04. 2021

새로운 시대 앞에서

윌리엄 터너, 템즈 강변에 서다

<전함 빅토리와 테메레르의 진격 (Geoff Hunt),>멀리 전방에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의 실루엣들이 보입니다.


1805년 10월 21일,

대서양과 지중해를 잇는 트라팔가 곶에 범선들이 모여듭니다.


커다란 유니언 잭 깃발 아래, 화려한 제복에 안대를 한 제독이 망원경으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호레이쇼 넬슨'

27척으로 이루어진 그의 함대는 몇 달 전부터

지구 반 바퀴를 놓고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쩍 가까워져 버린 스페인프랑스,

대담하게도 영국의 바다에서 이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고, 얼마 전까지 이들은 카리브해 지역의 영국 거점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도망치면서 괴롭히기를 전문으로 하던 그들이,

드디어 바다 저 편에서 뱀처럼 긴 대열을 만들곤

영국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넬슨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습니다.


육중한 넬슨의 기함 이름은 빅토리(Victory, 승리)

1759년 프랑스에게서 거둔 영광스러운 '승리의 해' 를 기념하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오늘 전투의 승리도 넬슨의 전함이 가져야 할 것이었습니다.    


기함 빅토리의 우현에서 갑자기,

뒤 따라오던 전함 한 척이 속력을 내기 시작합니다.


"하비 함장은 걱정도 많군,

  다시 전열을 유지해라고 전해!"


넬슨의 입에서 자신감 넘친 말이 떨어집니다.

확성기를 통해 이야기가 전해졌고, 이제 빅토리호  지나가려던 배는 다시 속도를 줄입니다.


멀리 바다 위로 늘어선 프랑스-스페인 연합군들의 함선들에서 대포 연기가 피어나고, 넬슨의 전함 좌우로 커다란 물기둥이 솟아오르기 시작합니다.


트라팔가 해전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 그 남자들의 사정 >>


아오.... 바다만 아니면.... (볼로뉴 캠프를 방문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여기서 잠시,

시간을 조금 돌려 앞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희대의 영웅이 프랑스 북부 볼로뉴(Boulogne) 

해안가를 참모들과 말로 달리고 있습니다.


그의 등 뒤에는 20만 명에 달하는 프랑스 대육군(Grand Armee)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눈 안에는 수평선 너머에 깎아지는 영국의 절벽들이 거대한 벽처럼 들어옵니다.


얼마전 일방적으로 선전포고를 한 영국 ,

그는 이 바다를 극복하고 괘씸한 그들을 짓밟아주고 말겠노라는 생각에 꽂혀있었습니다.


하루....

아니, 반나절 만이라도 저 바다를 가로막고 있는 영국의 함대를 막아둘 수 있다면, 전쟁의 천재 나폴레옹은 런던을 차지하고 영국을 점령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프랑스 해군의 어느 누가 되었든 볼로뉴로 함대를 끌고 와주는 것이 급했습니다. 더하여 확률은 거의 없지만 바다에서 영국 함대를 이겨주면 만세를 부를 일이었죠.



고민에 싸인 넬슨 제독... 지극히 공적이고 사적인... (해상에서의 넬슨)

영국의 바다를 책임지는 호레이쇼 넬슨

평생 바닷바람을 맞으며 살아온 이 남자에게도 고민은 있었습니다.


물론 바다 건너 큰소리치는 나폴레옹과 프랑스 해군들이 성가시긴 했지만, 그의 눈에 그들은 언제든지 이길 수 있을 적들이었습니다.


넬슨은 사실 이때,

엄청난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나폴리에서 만난 당시 33살의 영국 공사의 부인,

'엠마 해밀튼(Emma Hamilton)' 에게 혼이 빠져버린 것이었죠.


사교계에서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던 엠마 해밀튼, 처음 그녀를 본 넬슨은 졸도해 버립니다. 정말로!!!


국가를 구한 잘 나가는 영웅,

뭐.... 정상적인 형태의 사랑이었다면 당연히 여왕의 축복도 받았겠지만, 엠마와 넬슨은 법적으로 엄연한 유부녀, 유부남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 목표가 보이면 목숨 걸고 돌격하는 40살의 제독은 이제,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는 나랏일에도 소홀하며, 그녀의 남편이 있든 없든 저돌적으로 엠마와의 열애를 벌입니다.

(아... 음.... 그... 아이도 만들고...)


이러한 상황은 그가 아무리 국가의 영웅이라곤 해도, 점잖은 영국 사회에서 구설에 오르게 되었죠.


해군성은 긴급히 그를 본국으로 불러들이는 편지를 보내었지만, 넬슨은 이를 알면서도 엠마와의 시간을 즐기며 의도적으로 느리게 돌아갑니다.


흥미진진하게 이들을 바라보던 런던 사교계,


넬슨은 이제 이런 사람들의 입을 닫게 만들고,

음.... 아쉽지만 부인과도 이혼을 하고,

새사랑 엠마와 결혼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군인인 그에게는 '승리' 가 필요했습니다.


그것도

세상 사람들이 두고두고 칭송할만한

‘화끈한  승리’ 가 말이죠!


그래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빠져나갈 기회를 엿보던 항구의 프랑스 함대를 보며, 넬슨은 슬그머니 자신의 함대를 뒤로(?) 빼놓습니다. 프랑스 놈들이 바다로 나오는 순간 덮치기 위해서였죠.


그에게는 공적이든 사적인 이유든,

영웅적인 '승리' 가 너무나 간절했습니다.

 


프랑스 함대 빌뢰브 제독, 어떤 의미로는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일지도...

프랑스 함대사령관,

피에르 샤를 장 바티스트 실베스트헤 드 뷜레브.

그 역시 머리를 싸매고 있었습니다.


먼저 웃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프랑스 해군 툴롱 방면군 지휘자가 되었습니다.


전임 트래빌 제독이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죽어버린 탓이었죠. 세 명의 후보 중에서 나폴레옹은 뷜레브를 택했습니다.


"운도 지휘관의 능력이다." 라는 말과 함께요.


그랬습니다.

뛰어나지도 그렇다고 못나지도 않은

적당한 지휘능력에 더하여 이 남자,


정말 행운의 여신이 함께하는 것인지

그의 전함만은 어떤 전쟁에서든 살아남았습니다.

(문제는 그의 배만 말이죠...)


오랜 영국의 해상봉쇄로 실전 경험이 많이 없던 그에게 영국해군 이란, 6년 전 이집트 아부키르 만에서 본 무시무시한 모습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넬슨이 무서웠습니다.


그의 부하들 역시 영국 해군에 비해 능력이 모자란다는 것도 알고 있었죠. 마지막으로 하늘이 그에게 주신 능력이 하필 '도주' 였습니다.

(이 능력만큼은 넬슨도 혀를 내두르게 만듭니다)


성질 나쁜 황제 나폴레옹

네가 오지않아 바다를 못 건넌다고 그를 몰아붙였고,

당장 항구 밖에는 사랑에 눈이 먼 넬슨

미친 듯이 그를 쫓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카디즈의 항구에서 그는

머리만 싸매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황제 나폴레옹이 자신을 갈아치울 것이며, 후임자가 이미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까지 도착했다는 소식이 귀에 들어옵니다.


아무것도 못해보고 프랑스로 끌려가게 생긴 상황,

그러기는 싫었던 빌뢰브는 다시 자신의 행운을 믿어보기로 합니다.



장 자크 제티앙 루카, 곱상한 외모와는 다른 열혈 함장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와 스페인 전함들에는 바보들만 있었을까요? 이렇게 말하면 조금은 억울한 면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대혁명 때의 숙청과 영국의 장기간의 해상봉쇄로 해군의 질이 떨어지긴 했지만, 분명 프랑스에도 생각 있고 행동력 가득한 유능한 장교들이 있었습니다.


장 자크 제티앙 루카 (Jean Jacques Étienne Lucas) 역시 그런 부류였습니다.


그의 고민은 상관 빌뢰브 였습니다.

상대와 나에 대한 냉정한 전력 평가를 내리는 것 까지는 좋았지만, 이 상관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는 타입은 아니었습니다.


더하여 해군이 바다를 나가야 배도 움직이고 훈련을 할 것인데, 항구 구석에 갇혀있는 수병들을 보면 한숨이 나왔습니다.


루카 함장이 그저 그런 장교였다면

냉소적인 웃음을 날리며 술이나 마시고 있겠지만,

그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철저히 전력을 분석합니다.


우선 자신의 병사들이 항해술이나 대포로 영국을 잡기는 힘들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약점을 분석한 젊은 제독은 이를 보완할 나름의 훈련을 시켰으니,


수류탄 던지기,

지격총 쏘기,

백병전 훈련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어차피 멀리서 대포로 배를 가라앉히기는 글렀으니 바짝 달라붙어서, 적선 위의 사람들을 목표로 싸우겠다는 전술이었습니다.


항구에서의 훈련이 거듭 될수록 프랑스 병사들의 근육은 불어갔고, 젊은 함장은 바다 위에 떠있는 영국 함대를 보며 필승의 의지를 다졌습니다.



<< Dog Fighting >>


트라팔가 해전 상황도, 빨간색 두 줄로 늘어선 배들은 영국 전함입니다. 맨 앞의 빅토리(붉은원)와 테메레르(노란색원) 이 보입니다.


이렇듯 각자의 사정을 가지고 시작된 트라팔가 해전,

지구 반 바퀴를 숨바꼭질하여 드디어 적을 따라잡은 넬슨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반면 카디즈를 나와 지중해로 내빼려 했던 빌뢰브는 죽을 맛이었죠.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많은 함선들이 있었습니다

.

순간 어쩌면 그는 이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곧바로 그는 함대를 길게 늘어뜨립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학익진 비스무리한(?) 모양의 대형이 바다 위에 펼쳐집니다.


언뜻 보면 저 그물 속으로 달려드는 영국의 배들이 위태로워 보입니다. 저렇게 두 줄로 달리다가는 집중적인 포사격을 받을 것이 뻔할 테니까요.


당장 넬슨의 기함 빅토리(붉은색 원) 가 앞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은 너무나 눈에 잘 띄었습니다.


점점 프랑스-스페인 함대의 포격이 바다 위를 뒤덮자, 뒤를 따르던 테메레르(노란색 원) 의 하비 함장은 급히 빅토리 앞으로 나가려 합니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거기 까지였습니다.


넬슨은 단호하게 테메레르의 움직임을 저지합니다.

그리고 바로 프랑스 전함들과의 충돌이 일어납니다.



간략한 전황도, 넬슨의 전함이 프랑스 대열을 뚫고 들어갑니다. 이 날은 결과는 우연의 연속이었죠 (출처: 엘의주절주절 사이트)


커다란 전투의 단면도,

빌뢰브가 타고 있던 프랑스 전함은 뷔생토르 호 입니다.

 

하필....이 중요한 배의 뒤를 지키던 프랑스 배 넵튠이 바람에 떠밀려 가버립니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넬슨의 기함 빅토리가 들어가면서 대포를 집중 발사합니다.


이 한 번의 공격으로 행운이 같이하던 빌뢰브 제독의 배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습니다.


위치를 놓쳐버린 넵튠호는 그 순간 넬슨의 배에 사격을 가합니다, 하지만, 훈련이 부족했던 그들은 영국배에 큰 피해를 주지 못하죠.

(새삼... 이순신 장군님과 조상님들이 존경스러워 보이네요. 바다에서 배를 몬다는 건 자리만 잡고 있기도 힘든 일인데, 얼마나 힘을 내셨을지 상상해 봅니다)


빌뢰브 제독은 뷔생토르 호 위에서 영국 함대를 보며 고함치고 있었고, 넬슨의 빅토리 호는 신나게 프랑스 배들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넵튠 호는 감히 빅토리에 다가오지 못하곤 하늘 위로 포탄만 낭비하고 있었죠.


이 광경을 눈앞에서 보고 있던 한 사람,

프랑스 전함 르두터블 호의 루카 함장은

고함을 칩니다.


"지금이야, 배를 붙여!"


영국 빅토리(왼쪽)와 프랑스의 르투터블(오른쪽), 루카 함장은 준비해온 전술을 실행합니다. (그림: Danelle Harmon 작품)


그림에서 보듯,

넬슨빅토리루카 함장의 르투터블은 크기 차이가 많이 났습니다.


더 큰 배들을 사냥해야 하는 넬슨의 입장에선 이 배는 무시하고 싶었습니다만, 루카 함장은 단단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루카는 모든 병력을 갑판으로 올리곤

철저하게 영국배의 갑판을 노렸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넬슨의 대포들은 프랑스 배 아래를 열심히 두들겼습니다만, 배 안의 병사들은 모두 갑판으로 몰려나와 넬슨의 배에 총을 갈기고 있었죠.

아래층에서는 영국 선원들이 프랑스배를 대포로 공격하고, 위층에서는 프랑스 선원들이 영국배를 총과 수류탄으로 공격하는 조금은 이상한 상황.


르투터블 망루에 어린 프랑스 저격병의 눈에 영국배의 뒷 쪽에서 침착하게 서있는 화려한 복장에 장교의 모습이 보입니다.


한눈에 높은 사람임을 직감한 저격병은 방아쇠를 당깁니다. 그리고 하얀 화약연기가 걷히고 그가 노리던 표적이 무너지듯 쓰러집니다.


넬슨이 쓰러진 것이었습니다!


넬슨의 죽음, 실제로 총을 맞고도 몇 시간을 버티며 갑판 아래에서 넬슨은 죽어갑니다.

영국 함대는 가장 큰 위험을 맞습니다.


손쉬울 것 같은 전투였지만, 대담한 프랑스 함장의 작전으로 이제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상황.


상대편의 루카 함장은 배를 붙이고

기세 등등하게 명령하고 있었습니다.


"돌격 준비!"


겁에 질린 영국 수병들은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줄을 서서 다가오던 영국 함대는 아직 바람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도착할 즈음이면 아마도, 빅토리의 갑판에는 프랑스 깃발이 날리고 있을 것이었습니다.


빅토리의 수병들은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프랑스 수병들의 함성소리가 귓가에 들려왔습니다.


반전, 전함 테메레르의 참전으로 상황은 바뀝니다. 넬슨의 기함 빅토리(왼쪽), 프랑스의 르투터블(중앙), 그리고 영국전함 테메레르(오른쪽) 의 모습입니다.


갑자기 반대편 갑판에서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눈을 떠본 영국 수병들의 눈에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전열 뒤 쪽에서 싸움을 하고 있던,

영국 전함 '테메레르' 가 어느샌가 달려와,

프랑스 전함 르투터블의 갑판에 포를 난사하고 있었습니다.


빅토리에 오를 준비로

등 뒤를 신경 쓰지 않던 프랑스 전함.


영국전함 테메레르의 두 번의 포격으로 루카 함장과 수많은 프랑스 수병들이 갑판 위로 쓰러졌습니다.

이제 전쟁의 양상이 다시 바뀌었습니다.


프랑스 전함 르두터블은 이제,

넬슨의 빅토리 하비 함장의 테메레르 사이에 끼여서 난사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정신을 차린 루카 함장은

테메레르와 치고받는 싸움을 시작하였습니다.


빌뢰브 제독은 주먹을 쥐곤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행운의 여신이 프랑스 함대에 미소를 지어주는 듯했는데, 어느 순간 뛰어온 전함 한 척 때문에 승리가 날아가게 생겼습니다.


더 괘씸한 것은 약이라도 올리듯 저 영국 전함이

'프랑스 이름'을 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테메레르는 사실 프랑스 전함이었지만,

 영국해군에 나포되어 활약하고 있었답니다).


빌뢰브는 움직이지 못하는 넬슨의 배는 놔두더라도 저 괘씸한 전함을 살려둘 생각은 없었습니다.



알아보시겠나요? 그림 가운데 일렬로 선 네 척의 포개어진 배들. 영국 빅토리(왼쪽) - 프랑스 르투터블 - 영국 테메레르 - 프랑스 푸구아(오른쪽) 순서로 배들이 보입니다.


그 후 몇 시간 동안,

테메레르호는 말 그대로 난타를 당하게 됩니다.


또 다른 프랑스 전함 푸구아(Fugua)

테메레르의 옆으로 붙어 난타전을 벌였고,

정신을 차린 르투터블의 살아남은 선원들은 분노의 총알을 테메레르의 갑판에 뿌리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전투가 격렬했는지 마무리되었을 무렵에는 테메레르의 주요 돛들은 모두가 부러저 있었다고 하네요 (갑판 위는 상상해 보지 않아도...)


뒤따르던 영국 전함들이 도착하면서

치열했던 해전은 끝이 납니다.



이처럼 긴박했던 전투가 있을까요?


영국은 대승을 거두었음에도 정작

넬슨이라는 지휘관을 잃어버렸습니다.


무력한’ 지휘관과 ‘무모한’ 지휘관의 충돌.


이날 행운의 여신은 여러 차례 양 쪽에 미소를

지어주느라 바빴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목받지 못하던 함선들이 달려와

전쟁의 방향을 극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날 전투의 클리아맥스는 단연

영국전함 '테메레르의 등장' 이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영국의 승리(Victory) 를

바람처럼 나타나 지켜주었으니까요.


하지만 넬슨의 죽음으로 승리의 시선은

그의 기함, 빅토리에 집중됩니다.  


모든 포화를 뒤집어쓰며 영국을 지킨

'테메레르' 에게는 억울할 만도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만신창이인 몸을

이끌고 정비창으로 이동합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될 영웅은

한 명으로 충분했습니다.


이인자의 운명이란 그런 것일 테니까요...



<< 무대 뒤로 >>


1838년 신문에 난 기사를 본 사람들이

템즈강 연안에 몰려 있습니다.


저 멀리 증기선들이 한 척의 배를 인양해 오고 사람들은 탄성을 지릅니다. 그리고, 언덕 한편에 앉은 잘생긴 한 신사가 조그만 캔버스에 광경을 스케치하고 있습니다.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수증기와 빛의 조합을 자유자재로 쓰던 그의 그림은 몽환적이기까지 합니다.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빛과 수증기를 마법사처럼 다루던 고독한 젊은 화가는 이 날의 풍경에 잔잔한 감동을 받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전함, 테메레르,

하지만 더 이상 바다는 범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1769년 제임스 와트가 개발한 증기기관은

'증기혁명(Steam Revolution)' 을 가져왔습니다.


1807년 로버트 풀턴은 증기로 움직이는 커다란 바퀴를 배에 달 생각을 하죠. 1815년 풀턴은 드디어 바퀴 달린 전함을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과거에는 범선들이 템즈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물때와 바람에 맞추어, 수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 노 달린 보트로 견인을 해야 했죠.


범선은 그렇게 물의 흐름바람의 손길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터너의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신기하기만 합니다.


바퀴굴뚝은 사람의 손을 대신했고,

테메레르 보다도 작은 동력선이 거뜬하게

그녀를 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돛대와 주요 부품들이 제거된 초라한 모습의 전함,

터너는 마지막 항해를 하는 그녀를 위해,

사라진 돛과 장식들을 그려 주기로 결심합니다.


그런 그의 귀에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립니다.


"그래도 아직은 범선이지?"


아직은 증기선이 범선을 대체하진 못하는 상황.

하지만 시대는 점점 변하고 있습니다.


1836년 프랜시스 스미스존 에릭슨 같은 천재들이 스크류 추진기관을 만들었단 소식도 들립니다. 이제 거추장스럽고 커다란 바퀴도 필요가 없게 된 거죠.


좋든 싫든 그렇게 새시대는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트라팔가의 바다에서 승리를 맛본지 불과 30년,

실제 증기기관이 상용화된 시기는 1880년대이니,

아직도 범선에게는 반 세기의 시간이 더 남았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알고 있던 영국은, 변화에 대한 불만반발을 감수하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시대의 변화를 눈앞에서 목격한 영국신사 터너는 그만의 세련된 방법으로 그림에 그의 생각을 녹입니다.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 윌리엄 터너 (1838년)


저 멀리 태양,

지는 해일까요?... 아니면 떠오르는 해일까요?


시대를 맞이하는 입장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보일 거라 생각합니다.


한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과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영감을 줄 태양이라는 장치를

화가는 그가 좋아하는 공기와 잘 섞어 놓았습니다.


템즈강이 실제로는 동쪽으로 흐르기에,

태양은 위치는 달라야 했지만, 떠나가는 테메레르를 위해 터너는 관객들을 살짝 속이기로 합니다.


그리고,

이미 많은 부분이 해체된 초라한 모습이지만, 증기선 뒤를 묵묵히 따르는 테메레르의 외관을 전성기 영광스러운 모습 그대로 그림에서 다시 살려놓습니다.


새로운 세대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

터너의 붓 끝에서 세심한 배려가 느껴집니다.


거대한 테메레르도 작은 증기선의 도움 없이는,

템즈강의 물결을 거스를 순 없습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자신이 주인공이 아님을 아는 이들은 그렇게,

작아 보이지만 날렵한

새로운 주인공들의 도움을 받아,


한걸음 한걸음

변화하는 시대의 물결 속을 해처 나아갑니다.


새로운 증기선의 시대,

하지만 아직은 범선의 시대....


고집을 피운다면 조금은 더 바다를

누빌 수도 있을 전함 테메레르는 그렇게 조용히,

새로운 가능성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 줍니다.


한 시대의 끝과

새 시대의 시작,


오랜 세대의 품격있는 퇴장과

새로운 세대의 활기찬 등장,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방법,

그들이 우리와 함께 나아가는 방법.


<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 > 는

그 모든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터너의 이 작품은 아직도 영국의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이겠죠.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세대교체의 상징으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저에게 터너의 테메레르호의 이미지는 조금은 달라 보입니다.

 

터너가 작품에서의 말하는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 는 단순히 영광의 시절에 대한 추억만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분명 그 시대의 영국은

새로운 도약을 앞두고 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아직은 작지만 날렵한 ‘신세대’ 는 이제 새로운 영광의 시대를 살아 나아가야 하고, 듬직한 덩치를 지닌 ‘구세대’ 는 그들의 뒤를 지켜 줍니다.


새로운 시대의 강물을

두 존재가 같이 맞서 해쳐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새 시대를 맞이하게 될

대영제국이 나아갈 길이다.

 

혹시 터너는 이런 메시지를

그림으로 관객들에게 보낸 건 아닐까요?

 

<007 스카이폴(2012)> 에서 주인공은 새로운 요원 Q와 접선합니다.
그들이 보고 있던 그림은 다름 아닌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 였죠.


위기의 순간마다 영국을 구한 전함 테메레르.


그녀의 마지막 항해를 보고 있노라면 시공간을 넘어 터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합니다.


영원하지 않을 우리들이

대를 거쳐 새로움을 마주할때면,

결코 변화를 두려워 하지 말 것을,  


그리고,

서로가 함께 손을 맞잡고,

시대의 흐름을 헤쳐 나아가라고 말이죠.


PS: 그런 그녀의 항해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이 드는건 저만의 착각일까요?.. ^^;;;

https://youtu.be/1AS-dCdY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도 제임스 본드가 등장합니다. 여왕의 한 발자국 뒤에서 봉사하는 그의 모습이, 왠지 전함 테메레르의 모습과도 닮아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동영상은 이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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