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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 Studio Bleu May 15. 2023

망해가는 재벌집 막내아들

표트르 알렉세이 로마노프, 목수가 되다


<< 영광의 기억 >>


여름날의 모스크바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립니다.

2022년 6월 9일.

러시아 모스크바에는 특별한 행사가 열립니다.

행사장에서 연설을 시작한 푸틴 대통령, 그 입에서 오늘의 주인공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표트르 알렉세이 로마노프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Романов)'

    

군중들의 박수가 이어지고 푸틴은 연설을 이어갑니다. 2월 달에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제, 장기전의 양상으로 바뀌어가고 있었습니다. 나날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있는 시점.

군중들의 박수 속에서 푸틴은 연설을 이어갑니다.


"우크라이나와 크름반도는 표트르대제 시대 이후로   

 러시아의 땅이었고, 표트르의 정신을 이어받아

 러시아를 개혁하고 민족의 영광을 재현하겠다!"


표트르 대제 탄생 350주년,

푸틴의 연설에 사람들은 박수로 화답했고, 그의 뒤로 사자처럼 머리를 날리는 미남자의 얼굴이 청중들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 면도칼을 든 남자 >>


1698년 8월 26일,

모스크바의 대지가 열기로 달아오르던 여름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불안한 눈빛을 교환하며 흙바닥에 엎드려 있습니다.


언제나처럼 제멋대로인 젊은 황제,

평소 같으면 괴짜취급을 하며, 가볍게 행동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모든 대신들이 달려 나와 숨죽이고 머리를 조아려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인 올해 봄,

차르가 모스크바를 비운 사이, 조용히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할 것 같던 황제의 누나, 소피아가 차르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녀를 지지한 군부세력인 '스트렐치(Стрельцы́)가 모두 숙청당하고 말았습니다.

표트르의 배다른 누나, 소피아(Sofia). 러시아의 전권을 놓고 표트르에 대항합니다.

이제 젊은 차르는 너무나 강력해졌습니다.


한바탕 피바람이 지나간 모스크바,

대신들은 이제 젊은 차르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모두가 열을 맞춰 바닥에 납짝 엎드려 있었습니다.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2년 여의 시간을 수도 모스크바를 비운 차르는,

들리는 소문에는 조선소에 선반공으로 일을 했다고도 하고, 건물 지붕에 앉아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이상한 짓을 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곧 문이 열리고 2m는 족히 되는 큰 키의 미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나옵니다. 웃음 가득한 얼굴로 다가오는 차르는 바닥에 엎드린 이들을 하나하나 일으켜 세우곤, 인사를 하며 껴안아 주었습니다.


차례로 바닥에서 사람을 일으킨 차르는 천천히 하지만 위엄 있게 손을 옆으로 뻗었고, 그걸 본 시종이 급히 무언가를 가지고 달려옵니다,


그리곤, 차르의 손이 허공을 가르더니..,

갑자기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옵니다.

맨 앞줄에서 차르를 마주하던 '알렉세이 셰인' 장군의 수염이 잘려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젊은 차르의 손에는 작은 면도칼이 들려 있었고,

사색이 된 대신들의 얼굴은 상관없다는 듯, 거침없이 그들의 수염들을 잘라내기 시작합니다.  

이발사가 된 차르, 표트르 대제.
차르의 면도칼이 턱에 다가왔을 때,
내키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는 건
불길한 징조였다.

가끔 그런 이들이 있을 때는
곧장 따귀를 맞는 벌이 따라왔다

살짝 떨어져 난리통을 지켜보고 있던 오스트리아 특사, '요하네스 코르프' 는 이날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가 놀라며 기록한 오늘의 풍경은 앞으로 보게 될 변화할 러시아의 시작이었습니다.



<< 세 번째 로마 >>


러시아라는 나라는 독특합니다.


이들의 정확한 기원에 대하여는 아직도 논란은 있지만, 많은 러시아인들은 그들의 뿌리를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바이킹들로 보고 있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루스(Рѹсь) 라고 불렀는데, 고대 노르드어로 "노 젓는 사람들" 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드라마 <바이킹스>  시즌6 에서는 바이킹 무리들이 러시아까지 흘러들어 가는 모습이 나오죠~

이 호전적인 민족은 추운 고향을 떠나,

북서부 러시아 해안에 다다르더니, 모피를 찾아 길고 긴 볼가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이내, 광활한 러시아 영토 여기저기에서,

자기들끼리 흩어져 싸우기도 하고, 칭기즈칸의 기마대에 쫓겨다니기도 하면서 서서히 자리 잡게 됩니다.


이 동쪽에 광대한,

하지만 무언가 어두워 보이는 무리들.

이런 루씨인들이 다시 뭉치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함락이었습니다.

넷플의 드라마 <오스만 제국의 꿈>, 시즌 1에는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스토리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루씨인들의 무력이 마음에 들었던 동로마제국은 이들에게 동방정교회를 전파시키곤, 필요할 때마다 신앙심을 자극하여 용병으로 부려먹었는데, 이미 9세기부터 이러한 관계가 생기게 됩니다.


이런 그들에게 용병아르바이트의 고용주이자 문화의 수입지, 종교의 성지이기도 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큰 의미로 다가왔죠.


러시아 류리크 왕조 이반 3세

이 난리통에 콘스탄티노플을 탈출한 동로마 마지막 황제(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딸 소피아와 결혼하였고, 이를 통하여 자신들 역시 동로마 제국의 계승권이 있음을 선언합니다.


오스만투르크 에 의해

완전히 이름이 사라져 버린 '로마 제국'.

서쪽에서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가 '신성로마제국' 이라는 이름을 물려받고 자신들이 로마의 후계자임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동쪽의 러시아 역시 자신들이 사라진 로마제국의의 정통 계승자이며, 모스크바'로마', '콘스탄티노플' 에 이어 '제3의 로마(Третий Рим)' 로 불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러시아왕국 문장(좌) 과 합스부르크 왕국 문장(우), 이 머리 둘 달린 독수리는 로마제국의 후계자임을 나타냅니다. 러시아의 역사적 자신감은 오래전 부터 시작되었답니다.

아무튼,

모피를 찾아다니던 바이킹들은 이제 사라진 대제국의 후예임을 자처하였고, 광대한 영토에서 나오는 생산물과 본인들만의 문화를 바탕으로 그 힘을 키워가고 있었죠.


그리고 이러한 팽창은 당연히

옆 나라들과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우선 역사적으로 친할 수 없는

남쪽의 오스만제국과는 흑해지역을,


서쪽의 독실한 로마 카톨릭 국가이자 스스로를 하느님의 전사라 말하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과는 서부 러시아 우크라이나를,


그리고,

북쪽에서는 강력한 개신교 국가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던 북방의 사자, 스웨덴 왕국북부 러시아 및 발트해를 놓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외부에서 러시아의 성장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나라는 많지 않았습니다.

날개가 시그니쳐인 폴란드의 기병대, 윙드후사르(Towarzysz husarski),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 가려졌지만 이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전사로 믿으며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 망해가는 집구석의 황태자 >>


제3의 로마, 새로운 동로마제국.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러시아가 처한 상황은 호락호락하진 않았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로마노프 왕가의 젊은 차르, 표트르가 물려받게 됩니다.


그럼 러시아 내부 상황은 어땠느냐 물어보신다면...

음, 가히 절망적이었습니다.

간단하게 지표로만 살펴볼까요?


17세기 후반,

러시아에는 약 1천만 명의 인구가

영토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미 서유럽은 상당한 도시화가 진행되어, 자본가 계급이 형성되고 있었지만, 1670년대 제정 러시아에서 도시인구로 등재된 남성은 18만 명 정도.


겨우 전 인구의 4% 정도 만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상인, 장인, 무역업자 등의 수가 이 정도였다는 말이 됩니다~)

그림 속에 그려진 러시아의 농노들의 삶 ( Ilya Repin 작, 1870~1873 )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전체 소작농민의

90% 이상이 농노였다는 점입니다.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시민계급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을 때, 러시아는 거대한 농업국가로 대부분의 국민은 농노의 신분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삶을 벗어나기 위해, 많은 농노들이 탈주하자,

1649년 차르 알렉세이<도주한 농노는 언제든 잡히면 다시 농노가 되는 법> 을 통과시킵니다. 한 번 농노가 된 러시아 사람들에게 이제 농노란 신분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족쇄가 됩니다.


그리고,

수도 모스크바에서 조차, 전문직(은행가, 법률가, 의사, 교사....) 인원들이 부족하여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이미 14세기부터 서유럽에 있던 고등교육기관인 '대학교'는 러시아에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고, 하급관료들을 만들 학교조차 부족해서 궁전 내부에서 별도로 교육과정을 만들어 진행할 정도였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체계적인 전문지식의 전달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선박제조, 항해술, 공성술, 포술학 .... 이런 고급 지식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영역이었죠.


더하여 고리타분한 성직자들 역시,

제정러시아의 발전을 막고 있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는 니콘 대주교의 강력한 종교개혁 정책으로, 성호를 긋는 손가락 숫자를 가지고 여러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대혼란이 벌여졌습니다 (니콘 대주교의 개혁의 대한 썰은 여기서).     

"우리 예수님은 손가락 두 개로 성호를 그리라고 가르치셨다~!!!", 니콘대주교의 말을 어겨 잡혀가는 고의식파(러시아 정교파) 귀족여성의 모습.

한. 마. 디.로.

말만 제3의 로마이지, 차르의 처지는

망해가는 재벌집 막내아들 과도 같았습니다.


이런 낙후된 러시아의 문제는

이어지는 전쟁들의 패전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규모는 많지만 매일 지기만 하는 러시아 군대를 보다 못한 요하네스 코르프는 이렇게 기록에 남깁니다


오직 타타르 도적들만이
차르의 군대를 무서워했다.

적과 싸울 수천의 사람을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들은 그저 그런
안하무인의 오합지졸이다.
이들은 금방 거둔 승리도 잃고 만다.


<< 학생이 된 황제 >>


1697년 3월 10일,

모스크바 서쪽 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아직은 눈이 많이 남아있는 풍경.


제복을 갖춰 입은 차르 근위대의 연주와 사람들의 환송을 뒤로하고, 100여 대의 썰매가 열을 지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썰매를 탄 총 250명의 사람들의 얼굴은 긴장이 가득했습니다.


오랜 표트르의 아이디어.

대사절단(The Grand Embassy)이 서유럽으로 먼 여행을 시작하였던 것이였죠.

대사절단의 여행경로, 무려 2년의 시간이 걸리는 광활한 여정이었습니다.


창 밖을 바라보던 표트르는 손 안의 인장을 만지작 거립니다. 손 안의 인장에는 출발 전 손수 명령하여 새겨 넣은 문구가 보였습니다.


나는 학생이며, 선생들을 찾고 있다.


오랫동안 유럽의 변방에서 머물렀던 러시아.

이런 상황을 젊은 차르는 정면으로 마주하고자 합니다. 스스로가 학생이 되어 서구의 신문물을 배우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죠.


그의 사절단은 긴 시간을 이동할  예정이었고,

표트르는 그가 러시아에 없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그리고, 자유롭게 다른 나라 사람들을 보기 위해) 평민으로 변장을 하고 '표트르 미하일로비치' 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로 미리 약속하였습니다.


물론....

2미터가 넘는 커다란 키로 금방 들통이 나버렸지만 말이죠. 표트르의 연극을 맞춰주던, 수행단원 페터 레포르트 는 8월 경에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맙니다.


소문이 너무 많이 퍼져 있습니다.

이제 도시 거리에 사람들은
모스크바에서 온 사람은 모두
폐하라 생각하고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1697년 12월,

표트르는 스웨덴의 칼12세 를 만나 그의 즉위를 축하하였습니다. 16세에 즉위해 '소년왕'이라 불린 그는 장차 표트르의 강력한 라이벌 중 하나가 될 터였습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칼12세는 후에

<상트페트르부르크>를 놓고 표트르와 일전을 치릅니다.


이 독하디 독한 왕은 진심으로 전쟁만 연구하면서, 술과 여자와 집(?)도 멀리하는 절제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폴타바에서 표트르는 그의 군대에게 세 번이나 총에 맞고도 살아남습니다).

옛 되어 보이는 얼굴의 스웨덴 국왕, 칼 12세. 소년왕 이란 별명이 붙었으나 그의 일생은 전쟁의 삶이었습니다. 후일 표트르의 강력한 라이벌이 됩니다.

  

좋은 선생님을 찾아다니는

표트르의 노력은 놀랄만했습니다.


포술의 대가 '페터 폰 슈테른펠트' 가 사는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 에서는 대포와 사격술에 대한 교습을 받고, 마스터가 인증한 인증서까지 받게 됩니다.


하노버에서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부인인

조피 샤를로테와 그녀의 모친을 만나죠.


서구식 예절이 유행이었던 독일 여성들의 눈에 표트르 '자연스러운 태도와 격식을 차리지 않는 모습' 은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정작 표트르러시아 대표단이 놀라게 한 것은 당시 유행하던, 여성들의 허리를 가느다랗게 만드는  코르셋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무튼 이런 사교적인 에티켓은 표트르의 사절단에 의해 러시아 전역에 소개될 예정이었습니다.


네덜란드에서의 표트르, 어쩌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일지도~

8월 8일,

황제의 사절단은 네덜란드의 조선의 중심지였던

잔담(Zaandam) 도착하였습니다.


배에 대해 그가 진심임을 알아본 네덜란드 정부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유의 조선소에서 수석조선공 아래에서 일할 기회를 마련해 줍니다.


신이 난 황제는 바로 조선공처럼 옷을 갈아입곤, 대장장이 그릿 키스트(Gerrit Kist)가 사는 집 뒤편에 방 한 칸을 빌립니다.  

선진 조선기술을 배우기 위해 네덜란드 조선소로 유학온, 아주 평범한(?) 보통사람, '표트르 미하일로비치' 씨~ ( 출처: BBC )

그리고,

밤을 새워가며 조선소에서 목재를 자르고 배를 만드는 방법을 배웁니다.


먼 러시아에서 온 황제가 자기들처럼 비좁은 방에서 사람들과 자면서, 나무를 자르고 있다는 소문은 사람들에겐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그 괴짜의 얼굴을 보기 위해 네덜란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인근 집의 지붕까지 사람들이 기어 올라가는 바람에 미하일로비치씨는 곤욕을 치릅니다.

덕분에 이곳에선 8일 정도만 머물 수밖에 없었죠.

이재에 밝은 네덜란드 사람들 같으니... 네덜란드 잔담에 아직도 보존되고 있는 '차르 표트르 하우스(우측)' 모습입니다. 여행 시간이 되시면 방문을 해보시는 것도 ^^
1865년,
네덜란드의 헨리공은 차르가 방문한 이 작은 오두막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에 의해 개보수된 '차르 표트르 하우스(Czar Peter House)' 는 1886년에는 네덜란드왕 빌러 3세에 의해, 제정러시아의 알렉산드르 3세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알렉산드르의 손에 다시 보강된 이 건물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건물의 외벽에는 예복을 벗고 기꺼이 나무를 자르던 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너무나 좋아한, 또 다른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그를 기리며 바쳤던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에게 하찮은 일은 없다.


사람들을 피해 암스테르담으로 떠난 표트르는

네덜란드의 조선장인인 '클라스 파울' 의 밑에서 다시 망치질을 하며, 10명의 러시아인들과 함께 직접 만든 구축함 1척을 바다에 띄워 보내는 감동도 맛봅니다.


약 4달의 기간 동안 공화국에 머물면서,

황제는 조선학, 해군전술, 도시공학, 건축학, 식물학, 해부학 등의 지식들을 공부합니다.


재미있는 점은 평생을 전제국가에서 자란 표트르가 처음으로 '입헌군주국' 체제를 보게 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해 9월 22일,

헤이그에서 열린 네덜란드 전국회의를 표트르는 참석하게 됩니다. 이 자리에서 네덜란드 의원들은 러시아 사절단에게


우리들은 군주의 하인이 아니라,
각자 전문역할을 가진 존경받는 존재


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야기의 의미를 알지 못하던 러시아 대표단은 눈만 깜빡거립니다. 다만 표트르의 다음 행보를 본다면, 그 역시 이 새로운 체제에 약간의 흥미를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1651년 네덜란드 의회의 모습, 표트르는 이 생소한 체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습니다.

1698년 1월  9일,

네덜란드에 머물던 러시아 사절단은 영국으로 향합니다. 이 바다 덕후 차르에게 영국의 해군은 너무나 매력적인 존재였습니다.


그의 열정에 감동한 영국정부는 왕립해군조선소 에서 젊은 차르에게 선박건조를 직접 참여하게 하는 배려를 해줍니다.


이때의 경험은 표트르에게 엄청난 행운이 됩니다. 이미 4차례의 전쟁을 통하여 영국과 네덜란드는 최강의 해군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러시아의 해군은 걸음마 수준이었고, 광대한 러시아의 시장을 생각한다면 괴짜 차르에게 최신식 조선소를 보여줘도 영국은 수지맞는 장사라 생각하였습니다.


표트르는 영국에서 3개월의 시간을 보냅니다.

왕립천문대, 학술원, 윈저궁 등 그가 원한 모든 곳들을 볼 수 있도록 해주었죠. 바다를 수놓은 수많은 범선들을 보면서, 표트르는 그를 수행하였던 영국 기술자 '존 페리' 에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러시아의 차르 보다는
 영국의 해군제독으로 지내는 삶이
 훨씬 행복하다고 생각하오.”


그의 배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본다면 헛된말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젊은 차르를 만만하게 본 영국은, 이후 20년 동안 발트해에서 급속히 성장하는 표트르의 함대를 보며 가슴을 졸이게 되었으니까요.

뎁포트를 방문한 표트르, 이 격식 없는 황제의 행보에 모두가 신기해합니다.

4월 2일,

표트르의 행보를 관찰하던 오스트리아 대사

<희귀한 사건; 왕좌에 앉은 왕과 지붕 위의 황제>라는 제목으로 본국에 보고를 올립니다. 자극적인 제목에 눈이 간 오스트리아 궁정은 급히 밀봉된 서류를 뜯어봅니다.

런던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가 보고 드립니다.

오늘 러시아 차르 표트르가 영국 의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이 독특한 황제는 영국왕이 의회를 주관하는 모습을 방해하지 않고 보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러다 결국,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의회 지붕으로 올라가 홈통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창문에 매달려 의회를 훔쳐보는 거구의 황제 모습에 의원들과 영국왕은 웃음을 참지 못하였고, 젊은 차르는 예정보다 빨리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경험은 표트르에게 자극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조국의 자제들이 왕에게

  솔직한 진실을 이야기하는 걸 들으니 흥미롭다.

  우리는 이런 점을 영국에서 배워야 해."


주변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는 단서를 덧붙였습니다.


"영국식 자유는 우리에겐 적절하지 않아.

 나에게 유용한 것이라면 최하층 백성의 의견에라도

 귀를 기울여야겠지만, 그들의 손발에는 족쇄가 채

 워져 있지 않잖아."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결국 명민한 차르에게도 여론에 자유롭지 않은 영국의 군주들의 모습은 불편하게  다가왔나봅니다.


그가 런던탑을 방문했을 때,

자랑스럽게 전시되어 있던 도끼 (메리 스튜어드 왕비, 그리고 불과 얼마 전 찰스 1세의 머리를 싹둑 잘라버린) 들을 혹시, 이 괴짜 차르가 템즈강으로 던져버리지 않을까 걱정한 영국인들이 급히 치웠다는 것을 보면, 절대 권력자인 차르의 태생적 한계 역시 분명하였죠.

서양옷을 입고 좋아하는 표트르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황태후 나탈리아. 엄마들의 아들 걱정은 예나 지금이나...

1699년 2월

이제 긴 여행을 끝내고 모스크바에서 면도칼을 휘두르던 표트르는 가위를 들고 궁궐을 돌아다닙니다.


고집스럽게 전통을 고수하는 신하들이 입고 있는 러시아 전통옷들의 긴소매를 직접 잘라내고, <독일식  계량의복>을 입을 것을 명령합니다.


그의 개혁은 거침없이 진행되었습니다.

모스크바 시내 성문에는 <프랑스식, 독일식 옷입는 법> 이라고 걸린 마네킹이 전시되었고, 1701년 1월까지 모든 국민들이 서양식으로 옷을 입을 것을 명령합니다.


1700년, 모스크바 수학, 항해학교가 설립됩니다.

부족한 교수진은 영국에서 스카우트해 옵니다.


모스크바 학술원에서는 서구의 책들이 수입되어 번역되었고, 이 과정에 참여한 인원 다수는 후일 상트페테르부르크 해군사관학교의 설립 멤버들이 됩니다.


1701년에는 수도원에 산재되어 있던 모든 인쇄소를 국가산하로 통합하여 대중들에게 출판물을 공급합니다. 문맹 퇴치를 위해, 고등학교의 졸업생들은 초등학교 교원으로 충원되었죠.


이제 러시아는 겨울잠을 깬 불곰처럼 무서운 기세로 일어섭니다. 1703년 러시아 최초의 신문 <베도모스티> 가 창간됩니다. 물론 국가가 모든 출판물을 통제하였지만, 이제 러시아 민중들도 활자를 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1722년 표트르는 모든 귀족들을 능력에 따라 등급을 구분하는 <관등표(Tabel' o rangakh)>를 선포합니다. 이제 능력이 없는 귀족들은 출신 만으로는 공직사회에서 승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주 후에,

후계자 승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현대인들이 봐도) 놀랄만한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군주의 자손들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임명한 사람이
부적절한 행동을 했을 경우에는
책봉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군주의 자격이 없는 핏줄 보다는
자격있는 사람이 군주가 되어야 한다.


불운하게도 아버지를 닮지 못했던

그의 아들 알렉세이 황태자,


4년전 직접 아들을 처형한 표트르의 마음 속에는 후계자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생깁니다. 이러한 군주론은 이후, 그의 개혁이 지속되는 원동력이 됩니다.

표트르(우) 와 아들 알렉세이(좌), 이들의 관계는 가히 러시아판 사도세자 스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개혁을 반대해 오스트리아로 도망친 아들은 끌려와 저렇게....


1703년,

표트르는 그의 개혁이 영원히 기억될 도시를 만듭니다. 제정 러시아의 상징, 독수리가 앉아 점지해준 성스러운 베드로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erg)>


바다를 면한 이 도시는 개혁 러시아의 상징으로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표트르 대제 동상, 학생이길 자처했던 황제의 꿈은 이 도시에서 현실이 됩니다.

<< 다시 러시아 >>


2023년 5월 9일, 러시아 대독 전승일에서 푸틴은 다시 연설을 합니다.

매년 5월 9일,

이 날은 러시아인들에게 중요한 날 중 하나입니다.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 대항하여 승전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1년 전 표트르대제 탄생기념일에서

표트르의 정신을 이어받아, '영광의 러시아'를 재건하겠다 외쳤던 푸틴. 이번에는 우크라이나를 언급하며 처음으로, "우리는 전쟁 상황에 있다" 라는 말을 씁니다.


그의 연설이 끝나고

도열한 군인들이 퍼레이드를 진행하였습니다.

2008년 이래로 최저로 줄어버린 규모, 도시별로 항상 진행했던 퍼레이드 역시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충격적이던 탱크 퍼레이드.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하던 T-34 전차 1대가 등장하였습니다.

약 1년의 시간,

푸틴이 공언한 표트르의 영광은 붉은 광장에선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붉은 군대는 예전 무기들을 꺼내와야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으로 줄어 있었죠. 개방을 위해 달려가던 표트르의 러시아와는 분명 차이가 있었죠.


황제라는 신분에도,
수 백 년 전의 지도자는 스스로가 학생이 되기를 자처했습니다. 그는 차르라는 이름을 벗어던지고, 작업복을 입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며 그들을 관찰하였습니다.

그가 물려받은 러시아는 사실 이름만 거창한 망해가는 나라였을 만큼 급박했기 때문일 겁니다.


현대판 차르라 불리는,
러시아의 지도자는 스스로가 황제가 되기를 자처했습니다.예전의 영토와 영광의 시절을 이야기하며, 어제의 친구들에게 총을 겨누었죠.

그가 물려받은 러시아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느 때 보다 강력한 국가였습니다.

1716년 10월,

러시아의 '표트르 미하일로비치' 씨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다시 방문합니다.

견습생이던 그는 이제, 선박건조 달인

'마스터 피터르' 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동료들과 땀 흘리며 잠을 청하던 잔담의 조그만 오두막을 둘러보고, 대장간에서 망치를 들곤 쇠들을 두드리기도 하고, 유명한 삽화가인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의 마지막을 함께하며, 그녀의 삽화집 두 권을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유명한.박물학자,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 의 마지막을 함께한 표트르의 모습

그를 기억하던 네덜란드 사람들이

술집에서 다가와 '폐하' 를 연호하자,


"아니야 아니야~ 이봐, 형제들.
  옛날처럼 정직한 조선공으로 대해주게."


라고 이야기하곤,

맥주 가득한 항아리를 서로 돌리며

떠들썩하게 어울렸다고 합니다.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고 배움을 청할 때, 진정한 친구가 만들어지는것은 아닐까요? 그 처지나 신분에 관계없이 말이에요. (출처 : Whitemay)

'마크 갈레오티' 는

푸틴의 표트르대제 탄생기념 연설을 들은 후,

스펙타토르 지에 유머러스하고 간략한 논평을 통하여 이야기합니다.


푸틴은 표트르보다 작은 키를 가졌다.
하지만 표트르는 키보다 더욱 큰 사람이다.

(푸틴과는 다르게)
표트르는 늘 앞장서는 리더였다.

(푸틴과는 다르게)
표트르는 계획을 세심히 다듬고 몰두하였다.

그리고,
(마리우폴의 폐허를 남긴 푸틴과는 다르게)
표트르는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영광스러운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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