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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0 과 1사이 12화

우리의 어린 씨앗들에게

케테 콜비츠, 조각칼을 들다.

by Le Studio Bleu

(Karl Kollwitz(Karl Kollwitz

im Strudel des Kriegesim Strudel des Krieges

<< 빛과 어둠 >>


<독일 제국의 선포>, 안톤 폰 베르너, 1885년

1871년 1월 18일,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는 우렁찬 음악이 울려퍼지고 강한 동프로이센 억양의 독일어가 커다란 방 안에 울려퍼집니다. 곧이어 큰 키의 군인들 사이로 흰색 제복을 갖춰입은 관료들이 입장합니다.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가 사랑한 궁전,

그곳에서 과거 야만인들이 사는 땅끝이라 여겨지던 엘베강 건너편에 뿌리를 둔 '호엔촐레른(Hohen Zollern)'가의 사람들이 발을 딛고 서있었습니다.


작년에 이 야만인들은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대육군과 회전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그들이 승리를 거두고 말았죠. 이제 유럽은 새로운 강국의 등장을 숨죽이며 지켜보았습니다.


연단 아래흰 제복을 입은 재상, '비스마르크'가 큰 목소리로 '독일 제국(Deutsches Kaiserreich)'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음을 선포합니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연단에 서서 그 광경을 돌아보던 독일제국의 황제, '빌헬름 1세' 는 큰 소리로 선언합니다.


60년전 우리가 프랑스에게 빼았겼던 것을
드디어 다시 찾아왔다!


이제 유럽의 국가들은 상승하는 신흥국가를 경이롭고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답니다.그런데… 신흥 강대국으로 이름을 올린 독일제국에게도 고민은 있었답니다. 전형적인 개발독재에서 나타니는 부작용들이 그 것 이었죠.

비참한 직조공들 (The Weavers’ Misery), 1850년 목판화 (출처 : German History 사이트)

사실 이런 성장통은 예상된 것이기도 했어요.

프랑스나 영국이 백여 년이 넘게 거쳐왔던 과정을 불과수 십년의 시간 동안 이루어낸 독일제국은 그만큼 개인들의 자유분배의 정의 같은 부분들을 포기해야만 했답니다.


독일제국의 노선은 통일을 이끌었던 명재상,

비스마르크의 취임 첫 연설만 보아도 이런 분위기를 잘 알 수 있었답니다.


우리의 땅에서의 프로이센의 지위는
자유주의가 아닌 권력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문제들에 대한 결단 역시,

과거에 범하였던 중요한 실수인
자유로운 의견의 표현과 다수결이 아닌,
<철과 피 (Eisen und Blut)>로 해결되어야 합니다!"

(비스마르크 취임연설 중에서 )


이런 독일제국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여주는 이벤트 중 하나가 1844년에 독일 대표 공업지대인 슐레지엔(Silesia) 지역에서 발생합니다. 대규모 봉기가 일어난 것이었죠.


사실 재앙의 기미가 조금씩 보이고 있었답니다.

1840년 초,중반의 유럽은 전례없는 기상이변으로 후덥지근한 여름을 보냈답니다. 그리고, 농작물의 감소가일어나기 시작합니다.


1842년 미국 동부의 농장들이 대규모 감자역병으로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됩니다. 그리고, 기세를 떨치던 병원균이 유럽에 상륙하게 되죠. 이제 유럽의 농작물은 눈에 띄게 작황이 줄어듭니다.


1844년, 폴란드와 접경지대인 슐레지엔 역시 이 영향을 고스란히 받게 됩니다 (아일랜드의 경우는이 시기 국가시스템이 거의 붕괴되는 대기근을 맞이하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이제 손으로 섬유를 만들던 전통 직조공들의 경쟁상대로 자동화된 기계들이 들어오게 됩니다.아무런 사회 보호망은 없는 상태에서 이제 많은 수의 직조공들이 직장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게 되죠.


반대로..기계를 들여오고 어려워진 노동자들에게 돈장사를 하던 부유한 자본가들은 더욱 많은 돈을 벌게 되었죠.


이런 배경에서 그해 6월에 드디어,

참고 있던 노동자들이 그들을 억압하던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불길이 얼마나 거세었는지, 수많은 이들이 동참한 봉기는 순식간에 바로 옆마을인 랑겐비엘라우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어제까지 이들을 억압하던 자본가들의 집은 불타 없어졌고, 노동자들에게 빌려주었던 고리대금업 장부 역시 불 속에서 소각됩니다.


처음 일어난 노동자들의 대규모 봉기에 당황한 제국정부는 무장한 군인들을 파견합니다. 3일 간의 봉기의 결말은 17명의 노동자들의 죽음과 수 많은이들의 실종,구금이었답니다.


발전을 위해서는 모든 것들이 포기되어야 했던 상황.

제국의 영광이 길어질 수록 역설적이게도 어둠은 더욱 짙어져갑니다. 그리고, 그 어둠을 감수해야 하는 이들은 숨쉴 여유조차 사라진 사회 밑바닥의 노동자, 농민 계급이었답니다.



<< 불쏘시개 >>


내가 괜히 게르만 출신이겠니? (츨처 : 김펭귄님 블로그)

이런 비참한 분위기는 제국의 지식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질문거리를 던져줍니다.


이런 어둠이 왜 시작된 것일까?

왜 모두는 양지에서 햇볕을 누릴 수 없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이런 구조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런 숨막히는 제국의 분위기에서,

'사회주의'의 움직임이 강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였답니다. 부르주아들의 반성을 이야기하던 헝클어진 모습의 '카를 마르크스'는 직조공 봉기의 의미를 담아 자신이 발간하던 신문을 통해 프로이센 제국의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를 강도높게 비판합니다.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역시 이 신문을 통해 <슐레지엔의 직조공들> 이라는 시로 이들을 기념합니다.

자, 어찌되었든 강력하고 통일된 제국이 생겼고, 모두가 보기에 독일제국은 강력해져 가는 것처럼 보이니 이런 희생은 감당할 수준 아닐까요?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나아지진 않을까요?


하지만, 제국의 어두운 그늘은

여전히 밝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답니다.


1893년, 희곡작가로 이름을 얻고있던 '게르하르트 하웁트만'은 슐레지엔에서 일어났던 직조공 봉기가 잊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연극으로 만들기로 합니다.


연극 <직조공들(Das Weber)>.은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집니다. 연극은 1844년 노동자 봉기를 담고있어요. 비록 50년이 지난 사건이었지만, 그의 작품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게 됩니다.


아니, 마음을 울렸다는 말로는 부족할거에요.

이 연극이 독일사회에 준 충격은 너무나 컸답니다.


당장, 소문을 듣고 연극을 관람한 황제, 빌헬름 2세는 다시는 이 연극을 궁정 사람들이 볼 일은 없을 거라며, 연극이 상영되는 극장들에서 궁정특별석을 치워버릴 것을 명령합니다. 더해서, 불쾌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저 사회민주주의자란 작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조국에 해를 끼치는 놈들이다!


황제가 공인한 불온한 연극,

하지만 이런 노이즈마케팅으로 인해 이 연극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베를린에 어느 극장에서는 무대 위의 모든 것들을 놓치지 않겠다는듯 눈빛을 반짝이며 이 불온연극을 관람하는 한 여성이 있었죠.


어떤 각도로 보면 시크해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각도로 보면 모든 것을 달관한 듯한 무심해 보이는 눈동자로 무대를 응시하는 여성의 이름은 오늘의 주인공,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였답니다.


케테 콜비츠 (Käthe Kollwitz), 1906년 모습

그녀는 이미 베를린에서 미술수업을 듣고, 뮌핸과 파리를 거쳐 스스로의 그림 스타일을 만들어 가고있던 전도유망한 화가였어요. 이런 그녀가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이야기하는 연극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이상해 보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여류 화가들은 모두가 아름다운 색감으로 사랑스런 이야기들을 노래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녀가 자라온 환경은 조금은 특별했답니다.



우선, 그녀의 아버지 '카를 슈미트 (케테의 원래 성은 슈미트였답니다)'는 자유로움이 가득한 항구도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고학으로 법학을 공부한 자수성가형 인물이었습니다.


사회 밑바닥에서 부터 올라온 그는, 황제로 대표되는 전제군주정치를 혐오하였고 자유공화주의의 열풍에 따라 1848년 시민혁명에 가담한 운동가이기도 했죠.결국 그는 반국가적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법조인의 길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열정이 꿈을 막아버리면 좌절할법도 한데, 그는 과감하게 법전을 던져버리고 시멘트 삽을 듭니다. 그리곤 미장일의 마스터가 되었고, 건축가가 되어 당시 독일의 개발붐을 타고 건실한 사업체를 이끌게 되었죠.


그의 외할아버지 '율리우스 루프'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었답니다. 신학대학을 졸업한 철학자이자 신학자. 강직한 루터의 정신을 따르려는 그는 답답하고 권위적인 교회와 충돌하였고, 결국 양심과 교리의 자유를 주장하며 자신만의종교그룹을 만들게 됩니다.


그가 만든 공동체에는 매우 급진적이게도 모든이들의 평등을 주장하였는데, 일례로 여신도들에게까지 투표권을 부여하였습니다. 당시로서는 너무나 혁신적인 내용이었어요.


당연히 제국은 그를 요주의의 인물로 보았어요. 그리고, 미래의 사위이자 젊은날 자신을 닮은 케테의 아버지, 카를과는 죽이 잘 맞았답니다.


엄격하지만 또 자유로운 사상을 중시한 단단한 주춧돌 같은 외할아버지, 그 집에서 자란 어머니, 어릴적부터 고생하며 성공의 길을 달렸지만 다른이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다가 세상의 풍파를 맞아야했던 혁명가같은 아버지.


케테의 행보는 이런 집안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순 없을거에요. 이런 집안 내력을 반영하듯, 그녀가 선택한 남편 '카를 콜비츠' 박사 역시 의료보험조합 소속의 개업의로서 빈민들을 위해 무료진료를 하며 사회를 바꾸려 노력하는 행동가였답니다.


연극을 집중하며 관람한 그녀는

하웁트만에게 긴 편지를 보냅니다.

<직조공>은 처음으로 내게
엄청난 충격을 준 작품입니다...
이 기억은 아직도 내게 남아있어요. "


그녀는 그 날의 느낌을 떠올리며 여러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석판 위에 옮기기 시작합니다.

콜비츠의 동판화 직조공 6연작 중에서, <가난(좌)> 과 <죽음(우)>
<계획 모의(좌)> 와 <직조공들의 행진(우)>
<정문으로의 돌격(좌)> 과 <결말(우)> (출처 : 케테콜비츠 쾰른(Köln) 박물관)


<직조공> 6연작 석판화 '케테 콜비츠'를 설명할 때, 자주 언급되는 작품입니다. 죽지 않기위해 죽음을 감수해야하는 이들을 왜곡없이 작품에 옮기기 위해, 케테는 1893년에서 1897년까지 무려 4년의 시간을 작품에 할애하죠.


사람들은 새로 들어서는 공장들과 늘어나는 전함들의 수를 보면서 이제 제국의 그늘은 잊으라고 이야기하지만, 케테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이렇게 현실의 어두움을 보면서 사회에 참여하고 고발하는 작품 활동을 하려는 분위기에 대하여 사회는 '현실예술' 이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아름답고 절제된 미를 추구하던 '아틀리에 예술'에 반대되는 개념이었죠.

자신감 넘치는 필체로 케테는

현실을 외면하는 예술가들애 대하여 비판합니다.

그들의 실패는 당연하다, 왜?
대중적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예술가와 민중 사이에 이해가 성립되어야 하며, 가장 적절한 시기는 늘상 존재해 왔다고 생각한다.



<< 마스에서 메멜까지 >>


시간이 지나 1914년 8월,

사라예보에 총성으로 전 유럽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습니다. 마치 이런 이벤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유럽 각국의 사람들은 환호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게,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게... 서로 기다렸다는듯 선전포고가 이어졌고, 그 불길은 독일제국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오랜시간 서랍속에서 잠을 자다 깨어난 <슐리펜 계획>이라 불리는 두꺼운 문서가 발동됩니다. 100만명이 넘는 제국의 군인들이 동원되고 있었습니다.


전시를 위한 비상철도 시간표가 적용되었고, 독일 각 정차역에는 군복입은 군인들이 시간표에 맞추어 속속 도착하였습니다. 긴장한 역무원들은 시계를 확인하며 기차들을 서쪽으로 보내었고, 그 뒤로는 갑작스럽게 기차편이 취소된 시민들이 환호하며 군인들을 향해 박수를 치고 있었죠.

독일의 한 대학안에 끓어오릅니다 (출처: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 중에서)
지구 반대편 캐나다에서도 사람들은 전쟁에 환호합니다 (출처 : 영화 <파스샹달> 중에서)

거대한 전쟁기계가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움직여보지 못한 규모의 기계가 한 번 작동을 시작하자 아무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설령 그 대상이

버튼을 눌렀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이죠.



문 밖에서 우렁찬 독일 국가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소리가 흐릿하게 멀어질때 즈음 턱을 괴고 고심하던 아버지는 펜을 집어듭니다.


그 누구도 국가와 민족이라는 단어의 무거움을 거스를순 없는 시대입니다. 종이를 든 아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을 뛰쳐나가 노래가 울려퍼지는 쪽으로 친구들과 달려 갑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페터 콜비츠'

한 아이가 전쟁기계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페터 콜비츠', 어머니와 같은 예술가가 되고 싶어했던 케테의 둘째 아들이었답니다.


이 어린것들이 다시 살아 돌아올 가능성은 없었다.
공연한 걱정이 아니다 ...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었고,
조용히 듣고있는 아이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없었다 ...
저녁에는 나와 카를, 둘 뿐이었다.
울고, 울고 또 울었다. (1914년 8월 11일)


케테는 지금의 상황이 낯설기만 합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유럽 각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서로의 연대를 통해 평화로운 연대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전쟁기계가 작동하자 각국의 활동가들은 앞다투어 조국의 품으로 달려갑니다.


어떻게 어제의 동료에게

서로가 총부리를 겨눌 수 있을까?


이런 흐름 속에서, 프랑스의 온건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가 극우주의 청년에게 암살 당하면서 이제 사회주의자들의 국제연대의 가능성은 깨어집니다.


국경을 넘은 독일군들이 벨기에 안트바르펜으로 쇄도하고 있었고, 조만간 프랑스 북부를 위협할 것이었습니다. 케테의 부부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페터의 임관일이다...
한스는 아침 일찍 페터에게로 떠났다...

우리 가족은 확신에 찬 사회주의자들이었으나,
오늘 10월 10일, 독일 제국기를 내걸었다.

페터와 안트바르펜,
누구보다도 내 아이들을 위해서.
(1914년 10월 10일)



<< 나의 아이들 >>


<품속의 아이와 엄마>, 1916년.

부모에게 아이들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1916년 그린 이 그림에서 그녀는 아이들에 대한 마음을 담은 메모를 남겼답니다.

엄마를 위해 무엇이 남겨져 있을까?
내 오른손과 왼손 같은 아이들.

하나는 세상을 떠났고,
하나는 내가 도와줄 수 없는 곳으로 멀리 떠나있구나.

내 모든 삶은 이미 완벽하게 끝이났다...
(1916년 1월 17일)


불과 2년 전인 1914년 10월 30일,

케테는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아들과 이별한지 2주가 조금 더 지난 시간,

간절히 알고 싶던 아들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제국의 답신은 짧고 무미건조했습니다.


사회주의 신념을 따르며 황제의 미움을 받던 그녀가

그토록 싫어하던 제국의 깃발을 창 밖으로 내걸었던 유일한 이유, 전장으로 떠나간 그녀의 아들.


벨기에의 전장에서 그 아들이 전사하게 됩니다.

유일한 위안은 그의 부대에서 제일 처음 전사한 아들을 위해 떡갈나무 비목간이 매장터가 제공되었다는 것이었죠 (이후 수 많은 군인들은 이런 무덤조차 제공받지 못하고 찢겨져 전쟁터에 버려질 것이었습니다).


이제, 케테의 작품세계는 달라집니다.

과거의 그녀는 사람들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고 연대와 저항을 추구하고자 했다면, 파멸적인 전쟁의 결과를 보면서 이제는 삶의 의미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때 부터 나는 늙기 시작하여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더이상 똑바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나는 꺾여버렸다...
(1917년 10월 12일)

페터가 사라진지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케테는 비어버린 아이의 방을 보며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긴 어둠의 시간, 벨기에 전선에서 아들과 같이 참전한 대부분의 친구들은 포화 속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페터와 함께 노래부르며 지원병 신청서를 내었던 아이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스 코흐'는 전장에서 사라져간 친구들을 떠올리곤 울먹이며 이야기합니다.

다시는 자원해서 전쟁터에 가는 일은 없을거에요.


전선의 참호에서는 지금도 많은 군인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제국의 언론과 지식인들은 희망없이 기관총 앞으로 돌격하는 이들을 보며, '의미없는 죽음'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국가에게 품속의 아이들을 빼앗기고 살아가는 부모들을 향해, 이제 그 아이들의 죽음을 그저 파도에 쓸려나가는 모레알같은 의미없는 일이라고 세상이 이야기한다면…… 남은 이들은 어떻게 해야할까?


그녀의 시선은 이제,

아들이 묻혀있는 벨기에 로케펠트로 향해 있습니다.

죽은 아이들을 위해 그녀는 예술가로서 할 수 있는일을하고자 합니다. 그들을 기념할 조형물을 제작할 것을 결심한거죠.


그녀의 기념비에는,

군인들의 용기를 찬양하는 미사여구도

철모를 쓴 영웅들의 이야기도

들어있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그런 단어들은 아이들을

죽음의 전쟁터로 내보낸 어른들이

어지럽도록 사용해 왔으니까요.


무릎을 꿇은 어머니는
수많은 무덤들을 눈으로 주시하고 있으며,
무덤 속에 누워있는 그 모든 아들들을 향해
양팔을 끼고있다.

아버지 역시 무릎을 꿇고서
두 손을 품속에 꼭 끼고 있다.
(1925년 10월 13일)
<애도하는 부모>, 블라드슬로 군인묘지, 1932년 작품

https://krieg.de/friedhof/vladslo

<블라드슬로 전쟁묘지>, 로케펠트의 전장에서 전사한 25,645명의 유해가 이곳으로 옮겨져 묻혀 있습니다. 2023년 9월, 유네스코는 이 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습니다

1932년,

벨기에 로케펠트의 군인묘지 앞에

화강암으로 만든 두 석상이 놓입니다.


수 년이 지나도록 머리 속으로

만들고 다시 부수기를 반복했던 작품,


케테는 이 전쟁으로 사라져간 모든 아이들의 부모를 대표하여 석상에 본인과 남편의 얼굴을 새겨넣었답니다.

케테의 작품이 기억하는 전쟁의 의미는 너무나도 간결했어요.


전쟁의 결과는 죽어 사라진 이들과

비통함으로 고통받는 남은 죽어가는 이들 뿐.


부부는 죽은 아들의 무덤 앞에서 고개를 숙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전하고싶었던 그 말을

나직히 속삭입니다.


나의 아가, 봄이 왔단다



<< im Strudel des Krieges>>


케태와 그의 남편, 카를 콜비츠(Karl Kollwitz), 1934년의 모습

카를 콜비츠

(Johannes Karl August Kollwitz, 1863~1940),


'케테 콜비츠' 의 동반자이자 평생의 지지자 였습니다.

아홉 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남은 아들을 어머니는 쾨니히스베르크의 위탁시설로 보내어 버렸죠.


좌절할 법도 한 환경 속에서도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쾨니히스베르크 의과대학에 입학합니다.


1891년 그는 평생의 동반자인 케테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리고,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프라츠라우어 베르크에 진료소를 개업합니다. 부유한 이들을 상대하며 큰 돈을 만질수도 있었지만, 그는 진료소를 가난한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들을 위해 문을 열었죠.


헌신적인 그의 노력은

많은 지역의 가난한 이들을 구하게 됩니다.

이런 그에게 언론은 '센덴펠더 광장의 그리스도(Christ of Senefelder Platz)'라는 명칭을 헌정합니다.


하지만, 프로이센의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금기사항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여러번 국가로부터 면허취소의 위협을 받았음에도 그의 선행은 계속되었습니다.


분주하던 진료소에서 마주한 사람들은

아내 케테의 작품세계에도 영향을 줍니다.

초기에 사회고발 작품들은 이런 카를의 활동을 통해 만난 이들의 이야기들이 담겨있었죠.


그의 진보적인 활동은 이후 독일 의료보험 추진과 '사회민주주의 의사협회' 설립으로 이어졌고, 사민당의 의원으로 베를린 지역정치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온화하지만 행동력 강하던 그의 존재는 반복되는 시련을 겪으며 무너질 위기를 반복하던 케테에게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었습니다.


1940년, 나치 독일의 어두운 그림자가

베를린을 뒤덮고 있던 시절에 그는 영면에 듭니다.




한스 콜비츠, 케테의 첫째 아들입니다.

한스 콜비츠 (Hans Kollwitz, 1892 ~ 1971)

'

케테 콜비츠' 의 첫 번째 아들이자 입니다.

생전 케테는 두 아들을 낳습니다.

첫째 한스는 아버지를 닮아 의사가 되고자 합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전젱이 그의 삶을 비켜가지는 않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동생인 페터와 함께 의무병으로 자원하의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는 비극적인 전장의 모습을 확인하게 되죠.


한스는 그 시대를 살아낸 독일 국민들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인 역시 독일의 젊은이처럼 전쟁의 분위기에 휩쓸려 입대를 하였고, 벨기에 전선에서 동생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일어난 전쟁에서는 자신의 아들마저 잃게 되죠.

슬픔을 가슴에 묻고 시대를 살아낸 그에게 남은 것은 피폐해진 조국이었습니다.




케테의 둘째 아들, '페터 콜비츠'

페터 콜비츠 (Peter Kollwitz, 1896 ~ 1914)


케테의 둘째 아들인 페터.

페터에 대한 콜비츠의 애정은 각별했습니다.


잘생기고 조용한 청년이었던 페터는 어머니를 따라 화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 페터가 북유럽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 조국의 전쟁소식이 들려오게 됩니다.


이미 조국 독일은 전쟁의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독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그와 친구들은 참전을 결심하죠.


전쟁을 모르던 그들에게 개전 소식은 할아버지들에게 이야기듣던, 보불전쟁의 영광을 다시 체험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답니다.


군사교육을 이수한 페터는 벨기에 에센 전선에 투입되게 됩니다. 그리고, 전쟁의 양상은 그의 상상과는 다르게 흘러갔죠.


전장은 미숙한 신병들에게 호의적이지 못하였습니다.그의 부대에서 페터는 처음으로 사망한 병사가 됩니다. 쏟아지는 포격 속에서 참호에 웅크리고 있던 그의 목을 파편이 뚫고 지나가 버립니다.


그리고,

북유럽에서 돌아오던 선상에서 입대를 결의하던,

그의 친구들 역시 하나씩 그 뒤를 따르게 됩니다.

페터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으로, 케테의 작품은 긴 휴식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일어났을 때,

작품 곳곳에는 페터에 대한 기억들이 가득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얼굴을 본 적 없는 형의 조카에게 물려집니다. 하지만, 또 다른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페터 콜비츠'

또 다른 페터,

페터 콜비츠 (Peter Kollwitz, 1921 ~ 1942)


1942년 9월,

독일 국방군은 광활한 러시아의 겨울을 겪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의 칼 끝은 동부 모스크바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설원을 뚫고 전진하던 독일 기갑군은 연전연승하고 있었지만, 이내 거대한 진창, 라스푸티차에 그 기세가 꺾여버렸죠.


그리고,다가오는 혹한의 겨울은 독일군에게 나폴레옹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이제 하얀 눈밭은 수많은 독일 젊은이들의 목숨을 요구할 것이었답니다.


이 시기에 모스크바 근교 르제프에서 한 병사가 전사합니다. 그의 이름은 페터 콜비츠, 얄궂게도 아이는 먼저 전사한 작은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참호 속에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어간 작은아버지, 그의 이름을 이은 조카는 혹한의 설원에서 쓰러져갔죠.

마치 하늘이 콜비츠 가문에 이 이름을 허락하지 않듯,

대를 거쳐 두 아이가 전쟁기계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슬퍼할 틈도 없이,

전쟁은 끝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제, 수도 베를린과 근교 지역에 연합군들의 폭격이 시작됩니다. 아름다운 도시, 드래스덴이 폐허로 변하고, 스탈린그라드에 독일군이 괴멸됩니다.


제3 제국의 끝이 보이고 있는 상황,

제국은 더욱 많은 시민들의 목숨을 요구합니다.

이 비극을 목격한 케테는 울부짓습니다.


이 전쟁을, 이 살육의 고리를 멈추어라.

이것은 나의 명령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이 될 석판화에 제목을 남깁니다.


우리의 씨앗들이 더이상 짓이겨저선 안된다
<씨앗들이 짓이겨져선 안된다>, 1942년

[ 도움주신 내용들 ]


1. 유리 반터베페르크, 소냐 반터페르크 공저, 『케테콜비츠 평전 』, 2022 --> (콜비츠에 대한 두꺼운 평전입니다. 많은 부분을 참고할 수 있어 좋았어요, 두 가지 단점은 너무 커서 휴대하기 불편하다는 점과 시간순서가 섞여있어 상당한 순발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


2. 카테리네 크라머, 『케테콜비츠, 슬픔을 구출하는 예술』, 2023 --> (제가 좋아하는 하드하지도 소프트하지도 않은 책디자인에 핸디북 이에요, 시간구성이 편하게 되어있답니다)


3. 이현애. '노이에바헤 논쟁과 케테콜비츠: 통일 전후 독일 기억장치의 오용과 이용', 2024 --> (통일독일 이후, 노이에바헤 공간에 케테콜비츠의 작품을 들여오면서 논쟁이 된 내용을 정리한 논문입니다. 흥미로운 주제이고 또 제 기준으로는 어려운 내용이기도 한...ㅜㅜ)


4. 윤응진, '케테콜비츠의 생애와 작품세계', 2019 --> (윤응진교수님의 네이버 블로그 (푸른 느티나무)에 내용은 글을 쓰면서 너무나 많은 참고가 되었어요. 광대한 내용을 여러 편으로 나누어서 소개해 주셨는데, 그녀의 작품세계와 주변 환경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답니다)


5. 케테콜비츠 쾰른미술관 (Käthe Kollwitz Museum Köln) 사이트, (http://kollwitz.de/en/) --> (콜비츠의 작품과 여러 주변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 미술관 입니다. 다른 미술관들 보다도 이상하게 이 사이트를 자주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


* 기타 많은 인터넷 기사들이 인용되었습니다. 분량이 방대하여 모두 언급하지 못하는 점은 양해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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