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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 Studio Bleu Nov 28. 2021

제국을 기억하는 방법

엘리자베스 톰슨, 전장을 그리다.

* 이번 회는 그림이 작게 보입니다.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 큰 화면으로 보시길 권장드립니다. 언제나 감사드려요 ^^


<< 패잔병 >>


< 패잔병 (The Remanant of Army, 1879년 작>

젖혀진 고개와 풀린 눈,

무언가에 쫓기다 혼까지 빠져버린 듯한 남자의 모습.그 뒤로는 황량한 산맥들과 흙먼지 가득할 것 같은 도로들이 보입니다.


그를 태운 말 역시 혀를 내밀곤, 힘든 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말갈기는 엉망으로 쓸려져 있고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태로워 보입니다.


스산하기까지 한 이 풍경.

이 남자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있던 걸까요?

.

8피트의 커다란 캔버스에 마지막 점이 찍히고,

그림을 그리던 가녀린 손이 붓을 놓습니다.


긴 호흡을 하고 탐스런 밤색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화가. 슬픈 눈으로 완성된 황량한 풍경의 캔버스를 바라봅니다. 햇살이 창을 따라 들어오고 화가의 얼굴이 드러납니다.


이 삭막한 풍경을 그린 이는 놀랍게도 아름다운 여성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톰슨(Elizabeth Thomson)',

지금은 결혼한 남편의 성을 따라 '레이디 버틀러(Lady Butler)' 라는 이름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모든 국민들이 슬퍼한 사건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그 사건을 그려보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지금 다시 아프간과 싸우고 있으니,      
 옛날의 비극이 눈앞에 선하구나.

 브리이든 박사가 다 죽어가는 몸으로 똑같이 죽음 앞에서 싸우는 말을 타고, 카불 고개의
 재앙에서 홀로 살아남아 돌아왔지...'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들 가운데
절대 잊지 못할 이야기였다.

- 엘리자베스 톰슨의 자서전 중에서 -

<< Is this Game? >>


말 위에서 비틀거리며 돌아오는 남자는 영국 동인도회사 아프간 주둔군 소속의 군의관 '윌리엄 브라이든'.


에든버러 대학을 졸업하고, 동인도 회사로 모험과 부를 찾아온 전형적인 런던 신사였습니다.


그가 이곳에 올 때만 해도,

동방의 인도는 미지의 나라였고, 인도 위에 있는 이슬람 국가들은 먼 옛날 실크로드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지는 낭만의 땅처럼 느껴졌습니다.


산업혁명과 바다에서의 패권을 통해 이제는,

해가지지 않는 제국을 만든 영국.


하지만 이 영국인들의 밤잠을 설치게 만든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동방의 강대국 러시아였습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던 두 나라는 지금도 으르렁 거리고 있습니다. 올해 6월, 부지런한 사자국 군함들은 멀리 불곰국 앞바다까지 다녀오고, 전투기가 그 뒤를..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자의 자리에 앉았던 러시아,

덩치 큰 불곰국도 컴플랙스가 있었으니....

겨울만 되면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다는 얼어붙어 버렸고, 사정이 좋지 못하던 도로들은 이내 진창길이 되어버렸죠.


하지만 때는 바야흐로 제국주의 시대.


바다를 통해 열심히 유럽 국가들이

전 세계에 자신들의 깃발을 꽂고 다니던 시절,


한 해에 무려 4개월 이상을 얼음바다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골방에 앉아있다는 건, 러시아 입장에서는 팔짝 뛸 일이었습니다!


흔한(?) 불곰국의 일상이 겨울에는 저렇게 바뀝니다~~ 얼음길을 내는거 보다도, 배부터 먼저 건져내야 할 판...

이제 러시아는 강력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얼지 않는 항구'를 찾기 위한 대모험을 시작합니다.


1813년,

나폴레옹이라는 무시무시한 천재를 이기기 위해 힘을 합쳤던 연합군은 유럽 대륙에서 정신없는 공방전을 벌입니다.


한편 모스크바까지 탈탈 털렸던 러시아 제국은

이러한 정세 변화를 곰곰이 관찰합니다.


'가만, 어차피 겨울이면 감옥 신세인데~ 다들 유럽   

 대륙에 정신없는 참에 슬그머니 항구나 만들어봐?'


그리하여 가장 만만해 보이는 상대를 골라보니,

남서부 오스만제국은 뭔가 찜찜하고,

동쪽에 청나라 아직 무서워 보입니다.

(너무 멀기도 하고)


그러다 저 멀리 지금의 이란 땅,

카자르 왕조가 눈에 들어옵니다.

러시아-이란 전쟁은 이런 사정으로 발발합니다.


나름 '나폴레옹' 에게 열심히 쫓겨 다니며 담금질 당한 경험이 있는지라, 러시아군은 손쉽게 이란 북부지방을 점령해 버리고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합니다.   

드디어 페르시아만이 눈앞에, 참 쉽죠.... 그런데 아래쪽 영국은 무엇?

1815년,

드디어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란 지긋지긋한 악몽을 털어내고 영국은 유럽의 승자가 됩니다.


다들 본인들이 승자라고 우겼지만,

유럽의 경쟁국가들이 프랑스와 치고받는 동안,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알짜배기 땅들을 점령하였던 영국은 사실 가장 큰 이익을 본 나라였죠.


그런 영국이 멀리 페르시아에서 벌어진

러시아의 남진 소식을 듣곤 놀라 입이 벌어집니다.

나름 유럽 바다에선 영국도 계획이 다 있었답니다. 러시아가 나오면 여기서 막고 다음엔 저기서 막고. 불곰국은 지도만 보면 답답할 노릇이었죠~~ 그런데.....!!!

'아니,

 우리랑 같이 프랑스 때리던 놈들이 언제 저기로?'


영국은 급히 인도 서부를 통해

이란의 남부지역으로 군대를 보냅니다.


이대로 가다간 두 나라의 부대가 충돌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일단 중립지대를 두고 싸움을 멈추기로 합의하죠.


억울하게 땅만 빼앗긴 카자르 왕국...

하지만, 두 강대국에 놀음에는 힘없는 나라들은 한낱 체스판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노골적으로 따듯한 바다를 찾아 전세계를 돌아다니는 러시아와 이를 막겠다는 영국의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제국주의 레이스의 시작이었습니다.


아오 이 불곰, 조용히 눈밭에 처박혀 있으라고~!!! 러시아가 가면 어디든 따라가는 사자국 영국. 새로운 제국주의 레이스가 시작됩니다.

<< 제국의 화가들 >>


'나오려는 놈'과 '막으려는 놈', 이제 영국과 러시아는 곳곳에서 충돌을 시작합니다.

러시아를 아~주 위험하며 음흉하고,

그렇고 그런 새로운 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영국.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갈등은 아프가니스탄, 크림반도, 그리고 동아시아의 만주까지 번지게 됩니다.


동인도회사의 기병대 장교이자 정보담당 장교였던 '아서 코넬리'는 본국에 <그레이트게임> 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급박한 상황을 전달합니다.


음... 그나저나,

곰돌이와 라이온이 치고받는 이야기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냐구요?


이게 그리 먼 문제만은 아니었답니다.


1885년 3월,

세 척의 영국 극동함대가 한적한 한반도 바닷가에 나타납니다. 그리곤 서해안의 작은 섬 거문도에 상륙하곤 아무런 통고없이 해안에 진지를 만들기 시작하죠.


명목은 러시아의 동방진출 견제.

가장 먼 아시아(그래서 자신들의 입장에선 극동이라 부르던)의 순박한 조선의 어촌도 이제 이들의 체스판이 들어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죠.



아무튼,

바다 건너 신대륙에선 미국은 멕시코와 한창 영토싸움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한국에선 김대건이란 한 신부님이 관헌들에게 잡혀 고초를 겪고 있던,


1846년 

스위스의 로잔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납니다.


엘리자베스 톰슨, 결혼후에 'Lady Butler' 로 더 유명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톰슨(Elizabeth Thompson)'.


재능 많은 이 아이는 여느 영국 아이들과는 다르게, 따듯하고 아름다운 남부 유럽의 기후를 한껏 느끼며 자랍니다.


아마추어 풍경화 화가였던 어머니는 그녀의 아이들에게 드로잉과 색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어깨너머로 어머니의 그림을 보던 아이들은 자연스래 하얀 캔버스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1862년 이탈리아에 살면서 아름다운 로마시대의 유적들과 르네상스풍 그림에 한껏 빠져든 엘리자베스는 본격적으로 '위대한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가 위대한 예술가가 되겠다고 꿈을 가졌을 때 아버지는 기뻐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해줍니다.


어머니와는 13살이나 차이가 나던 엘리자베스의 아버지는, 나이대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예술과 문학을 딸들에게 직접 가르치며,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믿었던 진보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1866년 1월 엘리자베스는 영국 런던의 '사우스 캔싱턴 여성미술학교(Femal School of Art in South Kensington)'에 입학하여, 4년의 시간을 미술교육을 받게 됩니다.


아버지의 지원은 그녀가 동시대의 다른 여성화가들과는 다른 체계적인 예술의 길을 가게 도움을 줍니다.


특히 인체 데생에 필수적인 '살아있는 모델'들을 그리는 수업에 여성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는 건 화가로서의 중요한 기반이 됩니다.


해부학인체소묘, 그리고 고대 유적들에 대한 데생훈련은 그녀가 생동감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을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1869년,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이동하여 당대 유명한 '주세페 벨루치(Giuseppe Bellucci)' 의 지도하에 그림을 사사받았고,


이후 1870년에는 프랑스 파리로 옮겨가  '장 루이 제흐네스 메소니헤(Jean Louis Ernest Meissonier)' 등과 교류하며, 역사화에 대한 눈을 뜨게 됩니다.


'장 루이 제흐네스 메소니헤'(좌)의 <1807, Friedland >  (우), 후에 엘리자베스의 그림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작품들을 비교해 보시면 알 수 있을거에요

나폴레옹은 사실,

사회 및 문화 면에서도 천재적인 면모를 나타내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전선 종군 학자 및 예술가들' 의 양성이었죠.


그는 프랑스의 군사적인 승리를,

예술을 사용하여 홍보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끝없이 많은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지지와 명분을 확보하기 위하여, 군인들을 위한 멋진 제복을 고안하고, 영웅적인 군인들의 모습과 헌신하는 장군들의 이야기들을 그림과 글로도 남겼습니다.


이는 영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식민지 미국인의 신분으로 영국 왕립 예술원장을 지낸 '벤자민 웨스트(Benjamin West)' 역시, 이러한 홍보화를 많이 그리는데, 제독 넬슨의 죽음은 그러한 선전화들의 일종이었습니다.


이분은 대놓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전쟁터에서 일반 병사들의 나무토막 같은 죽음도 장엄하게 보일 수 있는 극적인 요소들을 그려 넣어야 한다...'라고 말이죠.


'벤자민 웨스트' (좌) 본국출신도 아닌 그역시 국가주의를 이용하여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Death of Nelson(넬슨의 죽음)>(우)  영국인이면 누구나 좋아할 이야기였죠


중세시대, 예술은 신을 섬긴다고  스스로 칭하는

교회와 사제'를 위해 봉사했습니다,


르네상스시대, 예술은 이제

돈 있는 후원자 '가문'들을 위해 봉사하죠.


왕정시대, 예술은 당연히

신성한 '왕가'를 위해 봉사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국민국가' 시대... 예술은 이제 그 개념도 모호한,

민족'과 '국가'라는 새로운 단어들을 칭송합니다.


대륙을 여행하고 공부하면서, 엘리자베스는 이제

사실주의(Realism)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이무렵,

그녀는 무엇을 캔버스에 남겨야 할지,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있었습니다.


<< 대영제국의 전선화가 >>


< 교전 후에 점호, (Calling the Roll after engagement , 1874년 작) >

1874년,

28살의 아직은 앳된 화가는,

영국 왕립 아카데미 전'에 작품을 출품합니다.


작품의 이름은 '점호(Calling the Roll )',

풀네임은 '교전 후의 점호' 입니다.


그림의 배경은 불과 수 십 년 전,

1853~1856년까지 있었던 '크림전쟁'이었습니다.

바다로 나오려는 러시아를 물리치기 위해, 저 멀리 오스만제국 땅까지 달려가, 영국도 참전한 국제전쟁.

하지만,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약 70만 명에 달하는 참전국 군인들이

죽거나 다쳤으니까요.


이미 싹이 보이기 시작하던, 대량학살의 전쟁시대.

비록 승자가 되었지만, 영국 역시 4만여 명의 젊은이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녀는 이 전쟁을 기존의 고전파 화가들과 다른 방식으로 그릴 것을 결심합니다.


어둑하고 거친 배경의 하늘,

까마귀들이 죽은 이들의 시체로 배를 채우기 위해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바닥에는 탈진해 쓰러저버린 병사가 보이고,

한 동료가 걱정스러운 듯, 쓰러진 그에게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몸이 성한 병사들은 찾아보기 힘들고,

대부분의 병사들은 붕대로 상처를 감싸고 있습니다.


레드코트를 입은 장교들이 인원점검을 하고,

흐느끼는 병사 뒤로는 그의 머리를 어루만지려는 고참병의 손길도 보입니다.


신참으로 보이는 비교적 깨끗한 제복의 병사만이 꼿꼿하게 서있을 뿐, 전쟁을 겪은 이들은 모두가 아프고 힘들고, 공포에 질려 보입니다.


계급 높은 장교 역시 이러한 사정을 아는지,

말 위에서 그저 근심 가득한 얼굴로 이들을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그녀의 캔버스 위에서 전쟁은 더 이상,

낭만적이지도 영웅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죽음의 그림자만 가득한 황량한 전장.


기존 작품과는 너무도 다른 결의 그림을 출품하곤, 별다른 기대 없이 그녀는 기다립니다. 누가 이런 어두운 그림을 좋아할까요?


하지만, 화가들의 최종 작품 리허셜 날인 배니싱데이(Varnishing Day)에서의 반응을 보곤 그녀는 깜짝 놀랍니다.


많은 남자 회원들의 전장을 가보지 않았음에도 가장 사실감 있게 그려낸 그녀의 작품을 칭찬하기 바빴으니까요.


더하여, 전시회 당일날 그녀의 작품은

가장 눈에 띄는 '중앙홀' 정가운데 배치되었습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역시,

단독으로 그녀의 작품을 관람했고,

어린 화가에게 찬사를 쏟아냅니다.


(이 작품이 인상이 깊었던지, 왕세자 웨일즈공 역시 축사에서 그림에 대한 감상을 언급하였고, 전시회 후에 그녀의 작품은 영국왕실 켈렉션에 판매되어 소장되는 영예를 안게 됩니다.)



쏟아지는 언론과 평단의 찬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두 가지의 어려움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첫째는 그녀의 그림 방식이었습니다.


그녀의 너무나 사실적인 전쟁터의 모습은 제국주의 레이스를 벌이며, 더욱 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필요로 하는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양날의 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국가의 입장에선 전쟁터는 낭만과 영웅담이 가득한 그런 곳으로 묘사되어야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그녀의 그림은 한편으로는

너무나 위험했습니다.


아래 그림을 볼까요?

그녀의 다른 작품, '발라클라바'입니다.

<발라클라바(Balaclava, 1876년 작)>, 크림전쟁에서 일어난 가장 멍청한 돌격작전인 '죽음의 계곡' 의 생존자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녀의 그림은 거침이 없습니다.


크림전쟁 당시,

영국군대는 이유는 모르지만, 700명이나 되는 경기병대 병력을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적들이 우글거리는 지역으로 돌격시키는 작전을 실행합니다.


누가 봐도 이상하다고 생각할 작전을, 죽을 줄 알지만 이유도 묻지 않고 돌격해 들어가는 영국 기병대의 모습을 보며, 관전하고 있던 프랑스 장교가 중얼거립니다.


"멋지군... 하지만, 이런건 전쟁이 아니야."


저 긴 길을 적들이 우글거리는 계곡을 지나 돌격해야 한다는 건데.... 결과적으론 돌아와야 해서, 두 번을 지나야 했답니다. 빨간색은 들어가면 죽어버리는 킬존(Kill zone)


당연한 이야기지만,

700명의 기병대 대부분 몰살당하고 맙니다.


(요즘 연구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원인들이 몇 가진 있었다고 합니다....


(1) 너무나 악필이라 잘못 전달된 최고지휘관의 명령서, (2) 이상함을 느끼고도 군인이랍시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실행한 바보 고급지휘관들, (3) 흥분해서 가장 먼저 죽어버린 그나마 상황을 알던 초급장교...등).


겨우 살아서 돌아온 인원은(기적적이지만) 194명이 있었고, 이 중 많은 이들이 부상이 악화되어 죽음에 이릅니다.


무능한 귀족 지휘관들이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언론은 이들을 보호하려 애써 외면하는 상황. 제국이 가리고픈 치부를 그녀는 캔버스에 고스란히 담아냅니다.


혼이 빠져버린 채  돌아오는 병사들,

지쳐 쓰러져 죽어버린 군마들.

죽은 동료를 안고 오는 병사와 그들을 보며,

울부짖고 아우성치는 다른 전우들...


그녀의 그림 속에서 만큼은 더 이상 포효하는 사자,

영국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둘째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바로 엘리자베스 본인이 '여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1874년

전시회의 성공으로 그녀는 한 껏 고무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으로 출품하였던 왕립 아카데미전에서의 기분나쁜 기억이 드디어 사라지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869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호평받으며 교황님의 연중 전시회에도 초청되었던 첫 번째 작품 <성모의 노래(Magnificat)> 를 영국 아카데미 전시회에 출품하였던 1871년, 그녀는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었죠.


그녀의 작품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전시불가 판정을 받아 작가에게 돌아왔고, 심지어 작품에 큰 구멍까지 나서 돌아왔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동일한 전시회에서 불과 3년 만에, 중앙을 차지하는 것을 보고, 찬사만큼이나 많은 시샘의 눈길들 역시 생겨났습니다.


< 꽈트헤 브하 전투의 28연대, (The 28th Regiment at Quatre Bras , 1875년 작)  >

1875년,

열정적이던 그녀는 워털루 전투의 영광을 그림에 담아냅니다.


프랑스의 겁없는(아쉽게도 머리도 없던) 기병장군 미쉘 네(Michel Ney)의 정찰대가 조용한 마을 꽈트헤브하(Quatre Bras)에서 영국 제28연대와 조우하며 일어난 전투를 그린 겁니다.


단단한 방진을 짜고,

착검한 총을 창삼아 밖을 노려보고 있는 병사들.


그 주변으로는 여왕의 레드코트들의 빈 틈새를 노리는 프랑스 기병대의 모습이 보이고, 방진 내부에는 모든 모습의 병사들의 얼굴들이 들어있습니다.


죽은 동료를 방패 삼아 방진을 유지하는 군인들과 맨 앞의 병사는 넋이 나간듯 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얀 화약연기 속에서 단호한 모습을 한 병사들의 얼굴이 보이고, 그 사이로 몸을 숨기고 군도를 휘두르며 지휘를 하는 장교의 모습도 보입니다.


이미 유명화가가 된 엘리자베스,

올해도 그녀의 작품은 크게 호평을 받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아무런 설명 없이 그녀의 작품은 '강연홀' 로 옮겨져서 전시되게 됩니다.


채광이 좋지 않아 사람들에게 '블랙홀' 이라는 별명을 부여받은 곳이었죠. 석연찮은 이유로 메인 전시장에서 쫓겨난 그녀.


사실 여왕까지 주목하는 이 여성화가는 '왕립 아카데미'의 콧대 높은 남성회원들에게는 불편함을 넘어 '위기감'을 주고 있었습니다.


'라파엘전파(Pre-Raphaelites)' 화풍을 주도한 '존 에버릿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같은 아카데미 정회원 화가 조차도, 그녀가 최초의 여성 로열 아카데미 회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위협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합니다.


(글을 쓰다가 의외라고 생각한 것이, '엘리자베스'의 그림은 그들과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그냥 성별을 따지지 말고, 아군 한 명 얻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요?)


아무튼,

이런 좀스런 남자들의 보이콧으로 1879년, 그녀가 정식으로 출마한 '로열 아카데미 정회원 인준 선거'에서 그녀는 고배를 마시고 맙니다. 단 2표 차이로 그녀의 인준안이 부결되었다고 하네요.


더하여,

그녀의 출현이 얼마나 위협적이었으면, '로열 아카데미'는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원회'영구적으로 여성들의 참여를 제한하고, 정회원들의 축하연에는 '여성' 들의 참석을 금지하는 조항을 1881년 정식으로 명문화하였습니다.


그녀 하나 때문에 말이죠...


이러한 <로열 아카데미> 치졸한 분위기를 속속들이 알 수 있던 것은, '엘리자베스 톰슨' 본인이 <자서전>을 남기기도 했지만,


거의 동시대를 살은 또 다른 여성화가,

루이즈 조플링(Louis Jopling, 1843~1933)의 자서전 <내 인생의 20년: 1867~1887)> 과의 교차검증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조플링은 그녀의 자서전에서,

로열 아카데미의 괴팍한 늙은이자 독신남(특히 이 부분을 강조했던 것 같습니다) '존 길버트 경 (Sir John Gilbert)' 이 엘리자베스의 정회원 선출을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폭로했습니다.


더하여,

만역 그녀가 선출되더라도 축하연에 참석하지 못하게 만들어, 결국 영향력 없는 회원이 되도록 장치한 남자들의 교활함(?)에 분노를 하였죠.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조플링이 엘리자베스를 하나의 아이콘 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1880년 1월의 일기에서 그녀는, '엘리자베스가 내년에는 반드시 선출될 것이란 이야기를 진보적인 회원인 ‘노먼 쇼(Norman Shaw)에게 들었다, 나도 열심히 하면 10년 안에는 엘리자베스의 길을 따라갈 수 있을 것' 이라는 희망 섞인 전망을 써놓았습니다.


그녀는 이미 많은 여성들에겐 '유리벽을 사라지게 할 수도 있는' 인물로 비추어지고 있었습니다.


정작 '엘리자베스 자신은 그 사건을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라는 이야기로 짧게 언급했지만 말이죠.



엘리자베스 톰슨의 대표작, <스코틀랜드여, 영원히 (Scotland , Fovever, 1881년 작)>. 멋지게 돌격하던 저 기병대는..사실 프랑스 창기병대에게 밟히게 되고,


어떤 이들은 그녀에게 진보적인 활동을 바랐음에도, 그녀는 빅토리아시대의 여느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안정적인 삶을 살아내는데 집중을 합니다.


그녀의 자서전의 대부분 내용이, 남편을 따라다니던 세계 여러 근무지와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었음을 보면, 그녀 역시 보수적 가치관과 진보적 흐름 속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위의 ‘엘리자베스 톰슨’ 의 대표작,

<스코틀랜드여, 영원히> 이전의 그림들 을 보면,

그 시대를 살아가며, 영국이 행하던 식민전쟁을 보아왔던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대영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전쟁터에 끌려나가 죽음으로 내몰리는

군인들을 동정하면서도,


막상 불기둥 가운데로 뛰어드는 그들의 용기는 깎아내릴 수 없기에 장엄하게 캔버스에 담아 내어야 하는 그런 복잡한 마음들을 말이죠.



1877년,

그녀는 결혼을 하게 됩니다.


상대는 상냥한 신사이자, 아프리카 줄루전쟁에서 생긴 상처로 본국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군인, 윌리엄 프랜시스 버틀러 (Willian Francis Butler) 소령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버틀러경, 그는 후에 육군 장군으로 승진합니다.

남편 버틀러경의 행보를 살펴보면,

그녀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준 아버지와 비슷한 면이 많았습니다.


그는 군인임에도 시와 수필을 쓰는 문학적 감성도 풍부했고, 대학에서 강연을 할 정도로 지적인 매력도 넘쳤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영제국의 영광을 수행해야 하는 최전선의 군인임에도, ‘식민주의’ ‘인종주의’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죠.


1880년대 이후,

그녀의 작품은 점점 인기를 잃어갑니다.


우선 군인이었던 남편을 따라 여러 임지를 다녀야 했기에, 영국 미술계와의 네트워크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하여, 개혁주의 성향이 강한 남편의 정치관이 그녀의 그림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영광스런 대영제국' 과는 조금 거리가 먼 현실적인 그림을 그린 것도 영향을 미쳤답니다. (리얼다큐가 판타지 드라마에는 밀리는 이유라고 할까요?) 

< 인케르만으로 부터의 귀환 (The Return form Inkerman, 1877년 작) > , 크림전쟁에서 승리한 랭카셔연대의 귀환모습입니다. 승자임에도 그 모습이...

<< 상처 입은 사자 >>


1839년,

러시아의 남침을 막기 위해 정신이 없던 영국군아프가니스탄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소수의 영국군과 다수의 세포이 인도군으로 구성된 21,000명의 군인들, 그리고 민간인 30,000명 가량으로 구성된 대규모 원정단이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아프가니스탄 영내에 친영 정권을 세우고, 장기적으로는 이곳을 제2의 인도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칸다하르'와 '카불' 을 점령하고,

드디어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게 된 영국군.

하지만 이 산골짜기의 민족들은 호시탐탐 때를 노리며, 이교도들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1841년 11월,

영국 원정군이 4,000 명 수준으로 축소된 것을 확인한 아프간인들은 카불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혼돈의 와중에 영국편이었던 두라니왕조 ' 슈자' 정권이 몰락 버리고 맙니다. 


아프간 중앙군은 붕괴되어 버리고,

밖은 반군들로 둘러싸인 상황......


절망한 영국인들은 가까운 인도로 급히 전보를 보냅니다만, 때는 겨울이라 모든 길들이 폭설로 막혔다는 대답만을 듣게 됩니다.


결국 영국군은 반란을 일으킨

'악바르 ' 세력과 협상을 하게 됩니다.


조건은 인질과 재산을 남기고 무조건적인 철수.


선택지가 없어져버린 영국은 1842년 1월 6일,

대규모의 철수작전 진행하게 됩니다. 


군인 4,500명과 민간인 12,000명이 

한겨울에 거의 100km  달하는 거리를 

걸어야 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와중에 협상을 깨고, 30,000  달하는 악바르 칸의 군대가 이들을 공격하고,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거나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

누군가가  잘랄라바드 요새 앞으로 다가옵니다.

1842년 1월 13일.

잘랄라바드 요새 영국군들은 

지평선 너머에서 희미한 무언가를 발견합니다.


비틀거리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힘겹게 다가오는 점 하나. 요새의 문이 열리고, 말을 탄 경비병들이 급히 달려갑니다.  


 점은 1 6 카불에서 시작되었던  죽음의 행군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

외과의사 윌리엄 브라이든 이었습니다.


혀를 내빼고 힘겹게 걷는 말과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혼이 나가버린 생존자.


요새에 도착하자 말은 탈진해 죽어버리고,

그는 흐느끼며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합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진정이된 그는 그동안의 있었던 일들을 설명합니다.  


16,500 여명의 사람들 중,

살아남은 단 한 명의 생존자.

나머지는 생사가 모호한 상황.


이 충격적인 소식은 본국으로 전해졌고,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해가지지 않는 사자의 나라,

항상 승리만 함께할 것 같았던 영국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복수를 다짐하던 영국,

엘리자베스가 이 그림을 그리던 1879년은

아프가니스탄 전역이 다시 시끄러워지는 시기였습니다.


작년 11월 새로운 칸이 아프간에 들어오면서, 영국대사들을 추방하는 등 노골적인 반영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영국은 5만의 대군을 동원해

아프가니스탄으로 다시 진격해 들어갑니다.


이러한  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시기,

그녀는 1차 전쟁의 생존자인 '윌리엄 브라이든'의 그림을 통하여 제국주의 전쟁의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나는 결코 전쟁의 영광에 대해 그린 적이 없다.

 영웅주의나 찬양을 위해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


 내가 이렇듯 사실적인 그림을 남기는 이유는,

 전쟁의 파괴적인 측면을 기록하고, 관람자들로

 하여금 그 비극의 희생자이자 참여자였던 일반

 사람들을 다시 떠올리고,


 사라저간 이들의 희생의 가치를 소중히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 -(자서전 중에서) -


하지만,

제국으로 나아가는 영국이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욕심과 이권들이 걸려있었습니다.  


이는 비단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유럽의 국가들이 이러한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들었고, 식민지가 넓어질수록 국가는 국민들에게 더 많은 희생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학계, 언론과 예술계는 이러한 희생을 미화하기에 바빴습니다.


... 그런 것이 당연한 시대였으니까요.


<그레이트 게임> 의 결말은 결국,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레이트 워(Great War)>, 제 1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불운하게도 전장을 그리던 엘리자베스 톰슨은

그녀의 삶에서 이 모든 것들을 경험하게 되죠.


그녀가 미화했음에도 그림 속 영웅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포연속에서 사라져 갔고,

그녀가 경고했음에도 이 굴레를 멈추기에는

세상은 너무나 복잡하고 탐욕스러워 졌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만만해하던 유럽인들과,

국가와 민족을 위한 희생을 당연시하고 찬양하던

유럽의 예술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의 세계대전이라는 

혹독한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톰슨이 캔버스에 담아내었듯,

파괴 뒤에는 모두가 피해자이고, 패배자였습니다.



셜록홈즈의 영원한 동반자, 왓슨 박사 ... 그가 뜬금없이 아프가니스탄으로 간 이유는?


'아서 코난도일

 (Arthur Conan Doyle, 1859-1930)'


셜록을 완성한 이 작가는 '엘리자베스 톰슨' 과 동시대를 살아낸 사람입니다. 영국인들이 아직도 좋아하는 '빅토리아 시대' 이죠.


그의 소설 '셜록 홈즈’ 는 지금도 사랑받고 있는 추리소설입니다. 그리고 주인공 '셜록홈즈'의 옆을 항상 조수인 '왓슨' 박사가 지키고 있습니다.


왓슨박사는 의사 이자 군의관 이에요.

('코난도일'도 의사였데요. 세상에나...)


요즘 같으면 의대생이 탐정소설을 쓴 것인데,

아무튼 이 소설에 나온 사람들의 모티프도 특이합니다.

.

법의학 지식이 탁월한 '셜록 홈즈' 의 모델은,

작가의 은사 교수님이신 '죠셉 벨' 이라고 합니다.

정말 홈즈처럼 대화 몇 마디, 관찰 몇 분으로 어떤 사람인지 맞추는 대단한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럼 '왓슨'은?

당연히 죠셉 교수님의 친구인

외과의사 '패트릭 왓슨' 의 이름을 따왔다고 합니다.


그런 왓슨이 초반 홈즈를 만날 때,

아프가니스탄에 참전한 군의관이었으며,

후유증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떤 학자들은 캐릭터의 모티프가 바로 유일한 생존 군의관 '윌리엄 브라이든' 이 아닐까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진위여부야 확인할 수 없겠지만, 이런 배경에서 살아남은 인물을 캐릭터로 썼다면, 왓슨 박사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용한 왓슨 박사도 알고 보면,

사지를 해쳐 나온 강인한 상남자가 아닐까요



[ 도움주신 내용들 ] 


1. 김호정, '1920년대 영미 여성미술가들의 자서전 집필과 자기서사에 대한 고찰, 현대미술사연구, 2017 -->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여류화가들의 이야기를 담고있는 논문입니다, 많은 공부를 하게되는).


2. 3월의 토끼집 이글루스, '벤자민 웨스트와 레이디 버틀러의 역사화畵 접근 방식의 차이', (2021년 12월 5일 조  회, http://egloos.zum.com/kalnaf/v/3259528) --> (제가 좋아하는 3월의 토끼집님 이글루스에요, 볼때 마다 고개가 숙여집니다).


3. 에릭두르슈미트,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 세종서적, 2001 --> (조금의 백인우월주의 사상만 제거한다면, 살아있는 전장을 글로 만날 수 있답니다. 워털루와 발라클라바 전장에 대한 묘사는 이 책이 제일인거 같아요).


4. Battle of Quatre Bras, 위키피디아 (2021년 12월 4일 조회,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Quatre_Bras) --> (워털루 전투의 전초전에 대한 이야기들이 소상하게 나와있습니다. 나름 중요한 의미를 가진 전투라는 내용들이 가득해요).


5. 정진국, 『제국의 낭만, 19세기 화가는 무엇을 그렸을까』, 깊은나무, 2017 --> (예술과 제국주의가 어떤 상황에 놓여 움직이게 되는지를 알게 해주는 재미있는 책이랍니다).


6. Paul Usherwood, 'Elizabeth Thompson Butler: A Case of Tokenism', Woman's Art Journal. 11(2), 1990 --> (약간의 페미니즘 관점에서 바라본 논문인데...저한텐 그닥 와닿진 않았답니다 ^^;;;).


7. Noh, Taeeun, 『Battle painting and agency : a study of the art of Elizabeth Thompson Butler, 1859 to 1919』, University of York, 2020 --> (자수합니다, 저도 텍스트를 다 이해하진 못했다는 >.<, 그래도 광범위한 내용이 재미있어요).


8. Paul Usherwood, 'Elizabeth Thompson Butler: The Consequences of Marriage', Woman's Art Journal; Spring/Summer88, Vol. 9 Issue 1, 2004. --> (이분 엘리자베스 톰슨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하시는것 같아요. 음...제목이 그런데 ㅎ).


9. 이정하, '19세기 중후반 러시아 제국의 인도 침공 계획에 관한 소고', 역사학연구, 2020 --> (러시아가 인도를 침공하려 했다는건 저도 처음 알았답니다. 오우.... 브런치는 공부를 하게 만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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