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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 Studio Bleu Jan 12. 2022

아몬드 나무 아래

요한나 반 고흐 봉허, 두 남자를 기억하다.


<< 만사휴의 >>


< 침대 위에서 숨을 거둔 반 고흐> (폴 가셰, 1890년)


조그만 천장 위의 창을 통해,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보입니다.  

 

무거운 공기가 가득한 작은 방 안,

비통한 표정으로 한 남자가 아래를 응시하며 침대에 앉아있고, 그의 품 안에서는 덥수룩한 수염의 남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습니다.


품안의 남자는 고통스러워하며 손을 들려다,

이내 힘에 겨운 듯 다시 손을 내리곤,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를 향해 가느다란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이제 이 모든 것들이 끝났으면 좋겠어."


그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지고,

식어가는 그를 안은 남자는 오열을 합니다.


1890년 7월 29일, 새벽 1시 30분.

오베 수아즈(Auvers sur Oise) 의 저녁 밤하늘에 별이 떨어집니다.


별이 되어 사라진 남자의 이름은

빈센트 반 고흐.


그가 생전에 좋아하던 노란 밀밭 위로 바람이 불어오고, 밤하늘의 별빛들은 자유로워진 영혼을 위로하듯, 바람을 따라 잔잔하게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 혼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 (1889년) >
별이 반짝이는 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그럴 땐 묻곤 하지.
...
왜 지도 위에 표시된 검은 점에게 가듯,
창공에 반짝이는 저 별에게 갈 수 없는 걸까?
 
-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
  (1888년 6월. 빈센트 반 고흐)

<< 남겨진 별 하나 >>


<테오 반 고흐의 초상 (1887년) >, 생전 고흐가 그린 작품으로 설명을 남기지 않아 오랫동안 빈센트의 자화상으로 알려졌던 작품이었습니다.


너무나 짧은 여름 소나기 같은 장례식이 끝나고,

물러진 땅이 다시 굳어지듯, 일상은 평온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별이 되어 평범한 사람들 곁에 머무르게 된 화가.


원래부터 그가 하늘에 있었다는듯 세상은 조용하고, 그가 남긴 강렬한 색감 가득한 그림들은 처분을 기다리며 낡은 창고에 쌓여 있습니다.


얼마나 이상한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어.

평범한 사람들과 비슷해져서 어울려 살고
싶다던 ‘큰 오빠’ 의 소원이 이루어진 데다,
 
이제‘작은 오빠’ 에게도 그렇게 가까워졌으니....

- 빈센트 반 고흐 죽음 후에 테오에게 -  
   (1890년, 빌레미나 반 고흐)


생전 테오만큼이나 빈센트가 아꼈던 넷째 동생,

빌레미나는 의미심장한 말로 그의 죽음을 잊어보려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혼란스러운  한 남자가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그를 지켜보며

품 안에서 떠나보낸 사람,

빈센트의 동생인 '테오도르 반 고흐' 였습니다.


아를에서, 생 레미에서... 그리고 오베 수아즈에서.


형의 그림은 자신만의 색을 찾아왔지만,

세상의 평가는 박하기만 했습니다.

< 꽃이 핀 밤나무들 (1890년) > 고흐가 머무른 라부 여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배경은 저녁 시간의 오베 수아즈 입니다.


그런 그가 관 속에서 평온한 잠이 들고 나서야,

사람들은 따듯한 위로와 찬사를 보내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보며 테오는

어머니에게 짧은 편지를 전합니다.  


" 종종 있는 일이지만,

  이제는 모두가 형에 대한 찬사로 가득합니다."


왜 생전에 이런 찬사를 듣지 못했을까?


생전 형과 서로 공유하였던 편지 더미를 뒤지고,

형이 남긴 캔버스의 그림들을 바라보며 그는 아내에게 말합니다.


" 형이 너무 그리워요.
   주변 모든 것들이 형을 상기시는 것 같소."



형의 흔적들을 모으고

이를 소개해 줄 만한 사람들은 없을까?

나를 도와 형을 기억해줄 사람들을 찾아보리라.


테오는 주변을 살펴봅니다.


우선,

고갱과 싸움으로 귀를 잘라버린 형에게 세상 사람들이 경악할 때, 그의 편에 서서 펜을 들어주었던 몇 안되던 사람.


가브리에 알베흐 오리에 가 있었습니다.  


<메세브헤 드 프항세> 지에 기고를 하던 오리에(좌), 그는 1890년 1월 < 고독한 이들(Les Isoles)> (우)이라는 기사를 통하여 알려지지 않았던 빈센트를 소개합니다.


테오오리에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냅니다.


"당신은 형의 진가를 인정한 첫 번째 사람이에요.

  형을 가치를 아주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테오는 흥분으로 떨리는 손을 붙잡곤,

편지의 마지막을 또박또박 써내려 갑니다.


"형은 잊혀지지 않을 거예요,
  나는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느낍니다.

  내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모든 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


형에 대한 모자란 평가들,

분명 세상은 뒤틀려 있었습니다.


형의 평가를 다시 세워야 한다!

구필 화랑에서 지금까지 쌓은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라도.


그는 형의 죽음 이후로

어느 때 보다 삶의 목표가 명확해진 느낌입니다.  


그가 다음으로 찾은 곳은, 인상파 화가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폴 뒤랑 뤼엘(Paul Durant Ruel)' 의 화랑이었습니다.


경쟁자이기도 했던 구필화랑의 테오에게

인상파 화가들을 알아보는 안목을 가르쳐 줬던 사람.


마네를 비롯한 많은 인상파 화가들이 몽마르트에서 배를 곪지 않고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재정적 위기를 겪으면서도 불평 않고 그들을 후원해 주었던 '뒤랑 뤼엘'의 공이 컸습니다.


파리에서 '뒤랑 뤼엘',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들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시간을 기다려준 그의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테오와도 오랜 교류가 있었습니다.
'뒤랑 뤼엘'의 화랑을 방문한 '테오 반 고흐' 의 방문카드. 인상파 화가들의 후원자였던 그가 형을 같이 기억해줄 것이라 테오는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테오는 '뒤랑 뤼엘'에게 찾아가,

빈센트의 그림과 편지들로 가득한 회고전을 기획하자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너무나 커다란 전시회 규모를 듣고는 뒤랑은 입을 딱 벌리고 맙니다.


배짱 좋은 그도 이제, 세상을 떠난 작가를 위해 화랑의 큰 공간을 내어주는 건 모험이라 생각했습니다.


주저하며 망설이는 그에게

테오는 광적으로 격한 반응을 보입니다.


"이 전시회는 꼭 열려야 합니다.

 모두가 기억할 수 있는 전시회가 돼야 한다구요!"


확실히 테오는 오베 수아즈의

그날 밤 이후로 달라져 있었습니다.


모두에게 상냥하던 그의 모습은 형의 죽음과 함께 무너져 버렸고, 모든 것을 태워버릴듯 신경질적으로 변하는모습에서는, 불안정하던 빈센트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테오의 변해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를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

아내 ‘요한나 봉허' 였습니다.



<< 암흑 속으로 >>


요한나와 테오의 아들 '빈센트 빌헬름 반 고흐' . 첫 아이에게 테오가 가장 사랑했던 형의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형의 죽음 이후 불과 두 달의 시간.


테오는 그의 기억에서 이제는 벗어나라고 조언하는 구필화랑의 상사들과 극렬한 언쟁을 벌였고, 이 와중에도 뒤랑의 화랑을 대신할 전시관을 찾고 있었습니다.


1887년 처음 형의 작품전이 열렸던 '카페 탕부랭'을 보면서 기뻐하다가, 이내 이곳이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불같이 화를 냅니다.


형의 기억이 깃든 곳들이

먼지 가득하게 방치되고 있다는 것,

형의 기억들이 이대로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테오는 지금,

(빈센트에 대한)
 견해를 같이하지 않는 이들은 누가 되었든 분개할
 정도로, 형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 가셰 박사에게 보내는 편지 -
   (1890년)


점점 극단을 넘나드는 남편의 모습.


발작적인 착란과 우울증세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10월에는 테오는 평생을 일했던 구필화랑마저 그만두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테오는 극심한 마비 증세를 겪게 됩니다.


쓰러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테오.

그를 진료한 '앙투안 블랑슈' 박사가 요한나에게 이야기합니다.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몸이 망가져 있다고... 그 원인은 로트렉과 같은 화가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매독' 이라고 말이죠.


슬퍼할 틈도 없이 병은 빠르게 진행되어갔습니다.


열정적으로 움직이던 테오는 이제 병원에 수용되었고, 환각과 분노에 시달리며 삶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암흑만이 가득하던 시기....

요한나는 비통함에 빠집니다.


1891년 1월 25일,

오베 수아즈의 황량한 밀밭 위로

까마귀들의 처량한 울음만이 가득하던 날.


어두운 밤하늘 아래, 너무도 허무하게

또 다른 우주가 사라져 갔습니다.


테오도르 반 고흐의 죽음.


형 빈센트가 별이 되어 떠나간 지 불과

반년의 시간이 지나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 까마귀가 있는 밀밭 (1890년) >,  빈센트 반 고흐 인생 후반부에 남긴 강렬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 그림입니다.

<< 아몬드 나무 아래에서 >>


< 꽃 피는 아몬드 나무 (1890년) >, 천재화가가 그와 이름이 같은 첫 조카, 꼬마 빈센트의 탄생을 축하하며 선물한 그림입니다.


어린 아기를 안고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벽 위에 걸린 그림을 보고 있습니다.


파란 하늘 아래 흐드러지게 피어오른

아몬드 나뭇가지.


그림을 선물하며 아주버님은 '아몬드 나무'

새 생명과 희망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생레미의 정신병원을 나와 오베 수아즈로 떠나기 전빈센트는 파리에 들러 이 그림을 자신의 조카, 꼬마 빈센트에게 선물해 주었습니다.  


누구보다도 꼬마 빈센트의 탄생을 축하해주던 그는 그녀와 함께 얼마 전 주고받았던 편지들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기분이 매우 이상해요,
 
계속해서 질문을 하게 된답니다.
내일이면 정말 아이와 같이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지금은 아주버님께 편지를 쓰고 싶어요
...
저는 아주버님의 편지를 무척 기다리고 있답니다. 테오도 마찬가지고요.

아주버님의 다음 편지를
제가 읽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워요.
제가 용기를 잃지 않으면 될 거예요.  

- 빈센트 반 고흐에게 보내는 편지 -
  (1890년 출산 전날, 요한나 봉허)


당시만 해도 아이를 낳는다는 건 아직,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남편에게 이야기만 전해 들었던 가련한 형.

스스로 귀를 잘라버린 세상이 말하는 광인...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한 출산전날 저녁,

왜 그가 생각난 걸까요?


요한나 본인 역시 알 길은 없었습니다.


이제 두 남자는 그녀 곁에서 사라졌습니다.

오롯이 혼자가 된 그녀는,

빈센트의 편지를 꺼내 봅니다.


생전 테오와 그녀가 좋아하던 편지들 중 하나.


드디어 네가 아버지가 되었으며,
요한나도 아이도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무사하다는 반가운 소식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그 소식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을 주었단다.
브라보!
...

아이를 낳기 하루 전 나에게 편지를 쓴 요한나의 마음 씀씀이에 내가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른단다.

위험을 각오하고 있는 순간인데도
그녀는 얼마나 용감하고 침착하던지.

이 모든 소식이 내가 아팠던
최근 며칠의 일을 잊게 해 주었다.

-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
  (1890년 2월 2일, 조카 빈센트의 탄생 후)


편지들이 오가고,

서로를 궁금해 하던 요한나와 빈센트는

5월의 봄날 파리에서 만나게 됩니다.


아몬드 나무 그림을 들고,

신혼집을 방문한 빈센트에게

테오는 첫 조카, 꼬마 빈센트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요람 안에서 세상모르고 잠이 든 아이.


그 곁에서 조용히 아기를 응시하는

두 형제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습니다.


요한나는 열린 문 틈 사이로,

그 신비로운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1890년의 시작은 분명,

그녀와 테오, 그리고 빈센트가 그리도 원하던

행복이 드디어 미소 짓는 것 같은 한 해였습니다.


광인으로 취급받던 아주버니 빈센트는 최근 있었던 두 번의 전시회에서 호평을 받으며, 서서히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Les XX (20인) 전시회>

1883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20명의 인사들이 결성한이 모임은 매년 실험적인 정기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1890년 1~2월의 전시회에, 빈센트 반 고흐는
초청을 받아 6점의 작품을 출품하게 됩니다.

그리고,
1점의 작품이 생애 처음으로 공식 전시회를 통해 판매되게 되죠.

전시회 후에 청중들의 호평과 ‘오리에’ 의 평론이 더해지며, 비운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이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 아를 주변의 붉은 포도밭 (1888년) >, 이 작품은  빈센트가 정식 전시회를 통해 판매한 유일한 그림이 됩니다.

남편 테오 역시, 구필화랑에서의 독립을 꿈꾸며

차근차근 새로운 미래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완벽하진 않아도 희망적인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의심하지 않던 시간... 하지만, 가혹한 운명의 파도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쓸어가 버렸습니다.


그녀의 손 안에는 다행히 부쏘발라동 화랑이

남편의 위로금으로 지급한 8천 프랑이 있습니다.


별이 된 빈센트와 남편 테오가 이루고자 했던 것들... 그리고 품 안의 어린 빈센트.


하늘로 뻗어가는 아몬드 나무 가지를 보면서,

그녀는 이제 새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녀는 그날의 감정을 일기에 남깁니다.


소녀였을 때 나는,

완벽하게 행복한 1년을 보내는 것이,
같은 양의 행복을 평생에 걸쳐 나누어 느끼는
것보다 낫다고 습관처럼 말하곤 했다.

(테오와의 결혼생활로)
이제 내 소원은 이루어졌다.

내 몫의 행복을 만끽한 이상
나에겐 책임만이 남아있다
...
단순히 빨래하고 청소하는 기계로
전락해서는 안된다.

끊임없이 정신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테오는 나에게 예술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아니,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는 말이 옳다.

그는 내게 아이 말고도
또 하나의 유산을 물려주었다.

빈센트의 작품!

나는 그것을 세상에 보이고
가치를 최대한 높여야 한다.

내게 의지가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혼자 쓸쓸히 남겨졌다는 느낌만은 지울 수 없다.

- 요한나의 일기 -
   (1891년 11월 13일)




테오와 사별하고 요한나는 다사다난한 파리를 떠나,

네덜란드예술가 마을 부쑴(Bussum) 지역에 정착을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하숙집을 운영하게 되죠.


빈센트의 생전 친한 친구 중 하나였던 화가 '에밀 베흐나흐' 는 반대했지만, 요한나는 그의 작품들을 모두 네덜란드로 옮기기로 결심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네덜란드는 그녀에게

 감사 훈장을 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400여 점이 넘는 그림들,

그녀는 이 그림들에 더하여 생전 빈센트가 테오와 주고받았던 663통의 편지들을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형의 발자취들을 모으고 사람들에게 기억시키려 했던 남편의 노력들을, 요한나는 고스란히 물려받고자 합니다.  

< 피에타(1890년) >, 외젠 들라크루아의 피에타를 재해석한 빈센트의 종교화입니다, 요한나는 이 그림을 23년 동안 그녀의 안방에 걸어놓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무려 30년이 넘도록 이어지죠.


1903년 암스테르담으로 이사한 후,

평생 동안 그녀의 안방 벽을 장식한 것은 빈센트의 그림, <피에타> 였습니다.


그림 속,

마리아님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여러 복잡한 감정이 느껴집니다.


죽어버린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아직도 슬픔이 남아있는 눈동자.

그럼에도 그녀가 입가에 짓고 있는 미소는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지금은 슬프지만, 희망스러운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


어쩌면,

요한나에게 고흐가의 두 남자는 그림 속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영혼을 잃고 차갑게 식어버렸지만,

언젠가 다시 부활하여 사람들 앞에 설 그런 존재...


그러기에 그녀는 그림 속 마리아님 처럼,

포기하지 않고 식어버린 육신을 일으켜 세우며, 두 팔을 벌려 부활의 날을 기다렸던 건 아닐까 합니다.



<< 마지막 퍼즐 >>


드디어,
(1872년 이후에 빈센트가 보내었던)
모든 편지를 정리했습니다.

이제 빠진 부분은
셍레미에서의 편지들 뿐입니다.
...
제가 네덜란드에 도착한 이후부터,
사람들은 빈센트의 그림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답니다.

이제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신문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
이 모든 것들이 저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만이 제가 남편과 아주버님을 기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 오리에에게 보내는 편지 -
   (1892년 3월 27일, 요한나 봉허)


1892~1900년 사이,

부솜에 바쁜 하숙집 경영 속에서도 요한나는 네덜란드 전역을 돌며 '빈센트 반 고흐' 회고전을 엽니다.


요한나의 노력으로 열린 총 20회의 전시회를 통해, 빈센트의 인지도는 점점 높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감을 얻은 그녀는

빈센트를 위한 대규모 이벤트를 기획합니다.


1905년,
네덜란드의 <스테델릭 뮤지엄> 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484점의 그림들을 묶은

회고전을 개최한 것이었습니다.


유럽 각국의 관객들이 회고전을 보기 위해 찾아왔고, 전시회가 끝날 무렵 빈센트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져 있었습니다.


('피트 몬드리안', '에드바르드 뭉크' 와 같은

 신진 화가들 역시 화풍에서 그의 영향을 받게 되죠).


한 번 날아오르기 시작한

그의 명성은 꺼질 줄 몰랐습니다.


그의 작품 가치는 생전의 20배 이상의 치솟았고,

이제 그의 이름은 독일영국까지 알려졌습니다.


그의 작품을 너무나 좋아한
사업가이자 컬렉터,

'뮐러 부부'
(네덜란드 사업가였던 남편  <안톤 뮐러> 와
  독일 사업가 집안 딸인 아내 <췔렌 밀러>)

는 요한나에게 가격에 상관없이,
모든 빈센트의 작품들을 매입하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돈에 상관없이 빈센트의 작품을 알리고
싶었던 요한나는 정중히 그 제안을 거절하죠.

이후
이들 부부가 평생 모은 약 100여 점의 작품들은, 1938년 네덜란드에 기증되어,

 ‘아른햄’에 위치한,  
<크릴러 뮐러(Kröller-Müller) 미술관> 을
설립하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됩니다.


1914년,

요한나는 오랫동안 정성을 기울여왔던

숙제 두 가지를 끝내게 됩니다.


먼저,

테오가 떠나간 1891년 이후부터 시작하였던,

빈센트와 테오의 편지들을 정리한 책,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들>

이 드디어 출간되었습니다.

<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들 > 에 수록된 빈센트의 편지 중에서, 모든 작품은 아름다운 삽화와 글들이 가득합니다.


600여 통에 달하는 광범위한 편지들을 체계적으로 배열하고 서술할, 전기작가를 끝내 찾을 수 없었기에, 그녀는 스스로 책의 서문을 쓰고 교정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오랜 시간 그녀의 손을 거친 아름다운 편지들은 한 권의 책이 되어 출판사와의 계약을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편집, 마케팅 그리고 출판까지,

이 모든 비용은 요한나가 자비로 지불하였습니다.

 

수년 동안 어머니는 편지들을
순서대로 정리하는데 엄청난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의 편지에는 날짜가 없어,
하나하나 읽어가며 상황을 짐작하고 정리하는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손으로 편지들을 하나하나
옮겨 적다가, 나중에는 타자기를 사용하였다.

어머니는 교열한 것들을 다시 읽고,
네덜란드어와 독일어로 번역되어 출간될
편지들을 읽고 확인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 출간 전 어머니를 회상하며 -
  (1928년, 빈센트 빌헬름 반 고흐)




요한나는 책의 출간과 동시에,

네덜란드 정부와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한,

긴 행정절차를 마쳤습니다.


마지막 남은 숙제를 위해서였죠.


1914년 4월 화창한 봄날.

검은마차 한대가 위트레흐트의 묘지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인부들에 의해 땅에서 파내어진 작은 관 하나가

마차에 실려 문을 나서곤 먼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목적지는 오베 수아즈,

가셰가문 소유의  <오베 묘지>.


겨울 내내 까마귀 소리만 가득하던,

황량하던 밀밭에는 파란 새순들이 돋아 있습니다.


먼 길을 달려온 운구차가 조그만 시골마을에 도착하고, 이름 모를 관은 작은묘지 옆에 준비된 구덩이 아래로 내려집니다.


조그만 화환이 요한나와 어린 빈센트에 의해 놓이고, 준비해온 비석이 그 위에 세워집니다.


'테오도르 반 고흐, 여기에 잠들다.'


동생을 기다리며 바라보던 별빛 가득한 작은 창,

형을 떠나보내었던 라부 여관방의 낡은 침대,

그들의 모든 기억이 머물러있는 작은 시골마을,

오베 수아즈.


요한나는 그곳에 빠져있던

마지막 퍼즐을 맞추기 위해,

기나긴 시간을 준비해 왔었습니다.


그렇게,

오베수아즈의 파란 저녁 하늘 아래,

떨어져 있던 두 별은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했듯,

황량한 오베수아즈의 밀밭은

겨울이 지나고 다시 가을이 오면,


두 형제가 좋아하던 황금색 밀알들로

가득할 것이었습니다.


1914년 봄날, 오베 수아즈의 작은 묘지에 두 별은 다시 만납니다. 언제나 함께였듯이.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이들의 이야기를 추억합니다.


<< Loving Vincent (I) >>


젊은 시절의 요한나(좌) 와 말년의 모습(우), 그녀의 뒤로는 빈센트가 조카를 위해 선물한 <꽃피는 아몬드 나무>  그림이 보입니다.


요한나 봉허

(Johanna Bonger, 1862~1925),


'빈센트 반 고흐' 의 제수씨이자

'테오도르 반 고흐'의 동반자였습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그녀는,

보험설계사인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의 보호 아래 아홉 남매 중 다섯째 아이로 태어납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그녀는 학교를 졸업한 후,

직업을 구할 필요가 없었지만 사회적인 참여와 활동을 중요시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대영박물관 도서관 직원으로 근무하며 영어를 베웠고, 귀국 후에는 영어교사가 되어 일하고 있었습니다.


1885년, 

파리 갤러리에서 활동하던 오빠의 소개로 테오를 소개받았고, 그녀에게 반한 테오는 2년의 시간 동안 그녀를 따라다니며, 결혼 승낙을 받게 됩니다.


26살의 나이에 테오와 결혼한 요한나는 이후,

삶의 가장 큰 비극들을 연달아 겪게 됩니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 와 '테오도르 반 고흐', 

그녀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던 두 사람과

짧은 시간 간격 차이로 사별했던 것이었습니다.


28살의 나이에  과부가 된 그녀는 쉼 없이,

빈센트와 테오의 기억들이 잊히지 않도록 뛰어다녔고, 단시간 내에 '빈센트 반 고흐'라는 화가를 불멸의 이름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개인사는 불행하였습니다.


1901년 화가 '요한 코렌 고스랄크'와 재혼하였으나, 1912년 다시 남편과 사별해야 했고, 이는 요한나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게 됩니다.


이후 빈센트와 테오를 기념하기 위한 사업을 계속하여, 1905년 대규모 기획전을, 1914년에는 편지들을 정리한 책을 출판하였고, 1915년에는 네덜란드어와 독일어 번역판 역시 출간하게 됩니다 .


(이는 빈센트를 연구하는 많은 이들에게

  소중한 연구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빈센트의 인지도를 높인 그녀는

1916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3년의 시간 동안 빈센트의 작품을 알리고,

책의 영어판 번역에 매달립니다.  


테오와 사별한 후,

그녀의 인생은 ‘빈센트를 위한 삶’ 그 자체였습니다.


살아생전에 빈센트의 동반자가 '테오' 였다면,

테오의 사후에 빈센트의 동반자는 '요한나'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1925년,

활발한 사회활동과 노동운동을 하던 그녀는

62세의 나이에 파킨슨 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그녀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던, 빈센트의 ‘피에타’ 그림 역시 그녀의 방에서 내려지게 됩니다.




멋쟁이 신사 오리에 (좌), 옷입는 맵시만 보면 '매너 메익스 맨' 이 떠오르네요. 오리에에 대한 책(우)은 아마존에도 팔리고 있답니다.


가브리에 알베흐 오리에

(Gabriel Albert Aurier, 1865~1892),


오리에는 시인이자 문화비평가,

그리고 화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현실 이면의 것을 표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던 상징주의(Symbolism) 미술 운동의 선두주자 이기도 했죠.


그런 오리에가 강렬한 색감을 쓰는 '인상파' 화가들을 주목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법학도였던 오리에는 이후 문학과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진로를 바꾸었으며, 잡지사를 운영하기도 하였고, '메세브해 드 프항세'에 투고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리고, 1890년에는

<고독한 이들> 이란 기고를 통해

 '빈센트 반 고흐'의 열정과 능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고흐의 사망 이후,

테오는 형을 재평가할 사람은 오리에라고 생각하고 많은 교류를 가졌습니다만, 비극적이게도 이들의 운명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1890년 고흐의 죽음, 

1891년 테오의 죽음.


그리고,

1892년에는 마르세이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오리에 역시, 티푸스로 인하여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맙니다.


그의 죽음은 빈센트의 작품들을 홍보하던 요한나에게도 적잖은 타격으로 다가옵니다. 프랑스 안에 빈센트에게 우호적인 영향력 있는 친구 하나가 쓰러진 것이었으니까요.


그가 가지고 있던 많은 빈센트의 작품들 역시,

<크릴러 뮐러 미술관> 에 기증되어 많은 방문자들을 반기고 있습니다.




노년의 에밀 베흐나흐(좌), 젊은 날의 자화상(우)은 친구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이 선물해 주었습니다.


에밀 앙리 베흐나흐 

( Émile Henri Bernard, 1868~1941).


고흐 보다는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 역시 프랑스의 유명한 후기 인상파 화가이자 작가입니다.


프랑스 릴에서 태어난 그는 파리 유학시절,

인상파 악동들의 소굴,

페르낭 코르몽 아틀리에로 들어가게 됩니다

(맞아요~ 예전 로트렉 편에서 말씀드린

 바로 그 화실입니다 ^^;;;)


앙리 툴루즈 드 로트렉,

빈센트 반 고흐,

루이 줭퀘탱(Louis Anquetin)...

이 분은 프사가 워낙 강렬해서 올렸습니다 고흐의 절친인  <루이 줭퀘탱>의 자화상입니다. 왠지 한 악동 하셨을 것 같은 ^^

이 화실은 당대의 쟁쟁한 

인상파 악동들이 모여있던,

던전 끝판왕들의 소굴이었죠.


불쌍한 스승님의 주름을 늘리던 악동들 사이에서

에밀은 나름 인싸였던 것 같습니다.


<툴루즈 드 로트렉>과 절친이었던 에밀은,

코르몽 아틀리에를 살짝 거쳐간 <빈센트 반 고흐> 와도 우정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성격이 좋지 않은 수전노,

<폴 고갱> 과도 나름 원만한 관계로 지내었습니다.


(사실 주변에는 하나만 있어도 버거울 친구들일

 '고갱'과 '고흐' 둘 사이에서 에밀은 균형을 잘

  잡아주었죠).


1888년,

아를을 방문한 에밀은 집으로 돌아와

빈센트에게 유쾌한 엽서를 보냅니다.

유쾌한 에밀의 그림엽서, 무려 제목이 < 빈센트를 위한 사창가 스케치 (Brothel Sketch for Vincent) > 입니다. 앉아있는 남자는 빈센트? ^^;;;


엽서 왼쪽 아래에는,

 

나의 사랑스러운 친구 빈센트 형,  
내 유치한 그림 좀 봐줘요~


라고 쓰고 말이죠

(네~~ 사실 에밀은 빈센트보다 15살이나 어린

 새파란 동생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운명의 1888년 12월 23일 저녁,


비극적인 고흐의 귀 절단사건을 듣고

가장 가슴 아파한 이도 바로 에밀이었습니다.


그 날은 아를의 예술가 공동체가 깨어진 날이자,

더하여 그들 셋의 우정도 산산이 부서진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고갱, 고흐, 에밀,

이 셋의 재미있는 일화는~

아래의 브런치 작가님(대린나님) 의 링크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꼭! 읽어보셔요~~ 재미있고 깔끔하기도 하답니다)



(1) 지난 연말 올리려던 글이 작업하면서 한 달이 넘어서야 끝났습니다. 연재를 하면서, 이 화가만큼 어려웠던 주제는 단연코 없었던 것 같아요. 너무 늦게 찾아뵘에 죄송스런 마음 전합니다.


(2) 너무나 많은 자료와 관점 속에서 저만의 해석으로 남겼답니다. 부디 너그럽게 보아주세요 ^^ 쓰고나서도 만족스럽지 않고, 아직도 궁금한 조금은 신비로운 느낌이랍니다.


러빙빈센트 시리즈는 앞으로 두 어번 더 진행할 예정입니다. 한 화는 고흐가문의 비극적 가족사에 대하여, 나머지는 그의 마지막 죽음에 대한 여러 해석들을 알아볼 예정입니다.


(3) 요한나와 주변인들 시리즈는 한 천재화가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노력해준 여러 고마운 사람들의 이야기 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주인공이 아니어도 주변에서 자리를 지키며 일하는 고마운 분들을 조명해보려 하였습니다. 의도가 잘 전해졌을지 조금 걱정이에요, 즐거운 감상 되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새해엔 기쁜일들만 가득하시길 :)



[ 도움주신 내용들 ]


1. 바우터르 반 데르 베인, 페터르 크나프 공저, 『반 고흐, 마지막 70일 』,  2011 --> (반 고흐의 마지막 작품시기, 오베수아즈의 작품활동과 이야기들을 정리한 책입니다. 무엇보다 기존의 실패자, 비극의 상징으로만 여겨진 반 고흐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 서술한 것이 참신한 작품이에요).


2. 그레고리 화이트 스미스, 스티븐 네이페,  『화가 반 고흐 이전에 판 호흐』,  2016 -->  (반 고흐의 백과서전 같은 책이랄지... 엄청 두꺼워서 라면 덮개로 쓸수 없는 책입니다. 충실한 판화와 설명들이 좋은 책이에요).


3. 신성림,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1』,  2005 --> (고흐와 테오의 편지들을 묶은 기록들 입니다. 둘의 편지들이 잔잔한 삽화들과 함께 잘 들어가 있답니다).


4. 김지현, 윤재은."빈센트 반 고흐의 ‘아를의 침실’에 나타난 공간적 특성에 관한 연구", 2012 --> (아를 시절의 고흐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와 그 주변 내용들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


5. 김철기, "이미지 설명자를 위한 고흐의 작품의 시대별 특성분석", 2012 --> (고흐의 사대별 작품들의 특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정리해 놓고 있는 논문입니다.


6. 유봉자, "고흐 작품에 나타난 노란색의 색채이미지", 유럽문화예술논집, 2012  --> (고흐 작품의 노란색에 대한 의미를 풀어놓은 간단한 기고입니다).


7. Nyculture, "요한나의 반고흐 전설만들기 프로젝트", 2021, (http://www.nyculturebeat.com) --> (요한나 봉허의 빈센트와 테오에 대한 부흥 프로젝트에 대하여 잘 정리해 놓은 사이트 입니다.).


8. 김영애, '[아트인사이트]반 고흐의 전설을 완성한 여인', 2021 (https://www.chosun.com/opinion specialist_column/) --> (역시 요한나의 일대기를 기록한 내용입니다. 올해 초에 요한나에 대한 기사가 유독 많아보이네요).


9. 정여울, '누군가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 2016,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6) --> (알베흐 오리에와 빈센트 반 고흐의 이야기 입니다. 누군가를 인정해 준다는 것, 그리고 그 내면의 가치를 알아간다는 것에 대한 잔잔한 기사입니다 ).


10. 시공사, '소외된 사람들 (by 알베흐 오리에)', 2004, ( http://www.ofof.net/gogh/resourcescriti\c_04.htm ) --> (오리에가 썼던 '소외된 사람들;의 원문입니다. 이게 있을 줄을 상상도 못했었는데~~오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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