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항저우 탈출기? #4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저녁이 지나가고,
기차가 속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창 밖은 벌써 밝은 햇살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나는 그 날의 아침 풍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부스스하게 머리를 매만지며 일어서는 사람들.
덜컹 거리는 기차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은 일어나 자루들을 들곤 서서히 하지만 단호하게, 차디찬 플랫폼으로 발을 디뎠다.
아무리 남방이라고는 하지만,
2월의 새벽 날씨는 몸을 움츠리게 만든다.
더군다나 남방의 습기 찬 공기는
또 다른 종류의 추위를 선사해준다.
바로 뼈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그것이다.
북경에서는 건조한 바람으로 살이 에이듯 아팠다면,
이 곳에서는 기분 나쁜 습기가 온몸으로 스멀스멀 퍼져 들어오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2년 동안
겨울을 잊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듯한 필리핀에서 나의 몸은 한없이 늘어져 있다가 혹독한 대륙의 추위를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고 있는 거다.
나는 점퍼의 지퍼를 위로 올리곤 짐을 들고는
기차를 내리기 위해 줄을 선다.
벌써 저기 문 앞으로 나에게 마늘을 강제로 쥐어주었던 어르신이 문 밖에 있다.
인사라도 나누었으면 좋았을 것을..
아무래도 눈치 빠르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이 곳의 분위기에선, 조그만 인사마저 사치 인가보다.
사람들에게 밀려 밀려, 드디어 기차 밖으로 나왔다.
참...
여기를 오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하고 달려왔는지...
계획대로라면, 나는 지금쯤
멋진 운하에서 내려 상쾌한 아침 햇살을 맞으며,
아마 사진도 여러장 찍고, 쑤저우의 아름다운 아침 하늘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내 앞에 놓여있는 이 곳은
칙칙한 무채색의 기차 플랫폼이다.
입에선 어제 먹은 마늘냄새가 아직도 나는 듯하다.
나는 사람들을 따라 발을 옮긴다.
한참을 걸어가다 뭔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는 도착 전광판에 있는 기차 정보를 바라본다.
응??????
분명 전광판에 'Xuzhou' 라고 적혀있다.
내 기억 속에 있는 그곳의 이름과 뭔가 다르다...
나는 설마 하며
옆에 지나가는 사람을 황급히 붙잡았다.
"这里不是苏州吗?(여기 쑤저우 아니에요?)"
까치집 머리의 아저씨는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시크하게 전광판을 손으로 가리키곤 사라져 버린다.
나는 지갑에 넣어놓은 차표를 황급히 꺼낸다.
헉....!!!!!
종착지 이름이 '쒸저우(Xuzhou)'라고 되어있다.
(내가 가야 하는 곳의 이름은 '쑤저우(Suzhou)' 인데!!!).
나는 머릿속에 하얘졌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나는 너무나 놀라서
역 밖에서 한참을 간판을 보고 서 있었다.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봐도
이 역의 앞글자는 '苏(Su)' 가 아닌 '徐(Xu)' 다.
거의 울상이 되어있는 나를
사람들은 이상하게 쳐다보며 지나쳐갔다.
하지만 우두커니 서있는 나의 앞으로,
오늘의 해는 떠올랐고, 배는 다시 고파왔다.
나는 일단 주변을 둘러보았다.
간단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 곳.
역시나 KFC 매장이 눈 앞에 보인다.
나는 힘없이 발걸음을 옮긴다.
뭐라도 먹지 않으면 서있기도 힘들 것 같다.
햄버거 하나를 입에 쑤셔놓고 어플로 지금의 위치를 검색해 본다.
무슨 방법이 있을까?
충격에서 나는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나저나 도착하자마자,
돌아갈 기차 편을 검색해야 하다니 ... 인생 참.
어제저녁만 해도
나의 발목을 잡는 일들이 가득했던 항저우에서 결국 기차표를 쟁취하곤, 저녁 기차 안에서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되었던 것 같았는데.... 는 '개뿔'!
세상에 이런 모지리가 있을까.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
어느 정도였냐면, 창 밖에 마차에 묶여있는 당나귀가 나를 보고 비웃는 것 같아 고개를 돌리곤 핸드폰만 뚫어져라 쳐다볼 정도로...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배가 채워지자 차근차근
어제 일들이 생각이 나기 시작한다.
오후에 그 많던 사람들 앞에서,
나는 표를 사지 못할까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리고,
겨우 표를 가지게 되었고 이내 '폭동(?)' 이 일어났다.
그 시끄러운 와중에 나의 '쑤저우~' 이러는 말소리가, 퇴근을 못해 짜증이 가득하던 누님에겐 '쒸저우' 이렇게 들린 걸까?
어설픈 나의 중국의 실력이 'S' 와 'X' 를 헷갈리게 만들어서 이런 대참사가 터진 걸까?
아니, 혹시~~
그 누님이 그냥 내키는데로 표를 던져준 거 아냐?
갑자기 뇌 회로들이 이상한 추론을 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표를 받고 나는 왜 확인을 하지 않았을까?
표를 못 살 수도 있다는 조바심에,
표를 받자마자 안도감으로 마음이 풀어진 걸까?
그래도 희한한 일이다.
나는 분명 표를 확인했는데,
왜 그 상황에선 이름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뒤에 '저우(Zhou)' 라는 이름이 같다고
대충 보아 넘긴 건가?
이후에 생활을 하면서,
이 일이 종종 생각날 때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조그만 깨달음을 얻었고,
조금 더 타인에게 관대해졌다.
일단,
정말 뭐가 안되려 하면, 나쁜 일들은 연달아서 미친 듯이 일어날 수도 있다. 내가 막아보려 해도 둑 터진 강물처럼 사정없이 밀려온다.
더하여 내가 조급해지면,
이럴때는 정말~~~ 눈뜨고도 화를 당하게 된다.
나는 분명 확인하고 검사를 했는데도,
뭐에 홀린 듯 놓치는 경우들도 있고,
누군가가 진심 어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해줘도
귀에 전혀 들리지 않을 때도 있다.
신기하지만 정말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일을 할 때,
누군가가 다급한 상황에서 실수를 해서 나에게 피해가 올 때면, 쒸저우 역 앞에서 울상짓던 '바보여행자' 를 떠올린다.
비록 그들이 내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 같은 결과를 일으켰더라도,
본래의 그들의 의도는 분명 선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한 번 참은 다음
같이 이야기해보겠노라 노력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지만,
'그때의 그 바보가 바로 나였으니까.'
그나저나..
바보여행자의 여행은 언제쯤 끝이날까?
《 쉬저우 들리고 다시 기차안에서 ㅜ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