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렬한 그대들의 이름은 정치가
커피를 마시곤 유심히 지도를 바라보다가,
또 한 이름에 눈이 멈춘다.
졸정원(拙政园)
세상에....,
소주의 주인장들은
작명의 천재들임이 틀림없다!
'사자' (가 잠깐 왔다간) 정원에 이어,
'졸렬한 정치인의 정원' 이라니!
아무리 나처럼 무딘 남자라도
어떻게 이런 이름을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이미 한 번 사자에게 당했지만,
나는 그 기억을 싹 잊어버리곤,
기대 가득 졸정원의 겨울을 느끼려 발을 옮긴다.
졸정원은 사자림과는 맞닿아 있는
‘작은 정원’이다(라고 안내책에 쓰여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글바글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아' 하는 탄성이 나왔다.
‘누가 작다고 한거얏!'
먼저 든 생각이 저렇다.
고래등짝만한 집에 호수까지 커다랗게 파놓곤,
작다고 너스레를 떠는 중국 사람들의 스케일이란...
하긴,
자금성에 들어갔다가 탈진해 쓰러진 노인분들도
계신다고 하니 이 정도 크기는 애교일까 싶다.
그나저나,
졸정원의 주인은 참 소심한 사람이었나 보다.
역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16세기 명나라 정덕 황제 때,
뭔 일인지 모르지만, 왕의 심기를 거스르고 쫓겨온 어사 '왕헌신' 은 이 커다란 정원에 홀로 틀어박혀선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소주의 온화한 날씨와 수분 뿜뿜 넘치는 공기도,
북경에서 권력을 휘두르던 기세 등등했던 시절을 잊게 해주진 못했나 보다.
아무튼 정치의 패배자가 되어 내려온 왕어사.
책을 뒤져가며 울화병을 잊어볼까 노력하다가,
드디어 현실을 부정(?) 하기에 이른다.
'그래, 졸자(졸렬한 놈)들이
지금 정치를 하는게야, 나라꼴 봐봐.
(나같은 인재도 몰라주고 말이지)!'
사랑하는 님에게 차여버린 연인들이
마지막에 이르게 된다는 그 단계,
'정신승리'.
수 백 년 전,
임금님의 눈 밖에 나서 궁궐에서 쫓겨나선,
이 커다란 정원에서 물고기 밥을 주며,
'그놈들이 이상한 거야, 내가 이겼다!' 하며 자화자찬 하고 있었을 소심한 노인네를 상상하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원 곳곳에 있는 굽어있는 다리들.
외관상 멋진 디자인이기도 하고,
어느 만화책에서 본바에 따르면,
고대 중국 사람들은, 사람이 아닌 귀신은
이런 다리를 건너지 못한다고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는 다른 의미로
이 다리를 소개해 놓았다.
<就曲避直(곧음을 피하고 둘러가다)>
자식을 해한 원수 같은 상대편도 목적에 따라,
웃으며 어깨동무하고 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정치인의 숙명이다.
정치는 그렇게 뻔뻔해야 하는 거다.
아니 정치만 그럴까....
장사하는 상인들도 머릿속으론
피 말리는 계산을 하면서도 웃는 얼굴을 해야 한다.
왕을 모시는 신하들 역시,
바른 소리 하며 잘난 맛으로 살다간
어느 순간 목이 달아날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네 세상사가 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강자들이 가득한 세상살이에서
마음속이 훤히 드러나는 길을
곧게만 오래 가기는 힘들다.
자신을 숨기고,
몸을 낮추며 돌아돌아 조심스럽게,
그렇게 가야 함을 이 다리가 가르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정치인의 삶을 거침없이 살았던 노련한 정치가가, 어느 순간 발을 헛디뎌 인간세계로 떨어져 버렸다.
결국 돌고돌아 자신이 출발했던 고향집,
구불구불한 이 다리 앞에서 다시 섰을 때,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어쩌면,
'졸렬한 정치가' 라고 한탄하던 그의 넋두리는,
머나먼 북쪽 궁궐에서 지금도 싸움을 벌이고 있을 동료들이 아닌,
어제까지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왔던,
자신을 향한 자조 섞인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대인은 다시는
북경으로 올라가진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세상 사람들에게서 잊혀가는 주인장에게
멀리서 간간히 찾아오는 왕년의 동지들은 너무나
기쁜 손님이었을 거다.
졸정원의 호수를 돌다 보면,
한 켠에 고즈넉하게 마련된 조용한 별채가 있다.
한눈에 보아도 외지에서 찾아온 손님들을 위해,
속세와 떨어진 비밀스런 기분을 느끼고 싶었을 주인장이 일부러 잘 눈의 띄지 않게 낮은 지붕으로 숨겨놓은 듯 보이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냉기가 가득한 돌바닥 위로,
고풍스런 나무와 가구들을 이용한 작은 접견실이 보인다.
가끔씩 주인장을 보기 위해 먼 길 고생하며 내려왔을 친구들을 만나면서, 이런저런 궁궐의 정세를 물어보며 주인장과 식객들은 홀짝홀짝 차를 마셨을 것 같다.
그렇게 입구를 들어서면 만나는 호수는
속세와 정원의 경계를 해자처럼 나누고 있다.
그리고,
호수에 눈이 팔려 잘 찾아보지도 않는 낮은 지붕의 벙커 같은 별채들은 사람들의 눈에서 벗어나고픈 이들의 휴식처가 되어 주고있다.
그렇게 속세에 덧없던 권력을 시원하게 비웃던 정치가는, 더이상 부름을 받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재상집 멍멍이가 죽으면 문 앞이 붐벼도,
재상이 죽으면 아무도 찾아보지 않는다고 한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의 마지막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을까?
호숫가에 앉아 덩그러니 떠있는 조각배를 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나의 뒤에서
한 무리의 중국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웃긴 사람일세.
세상을 욕하며 소박하게 살겠다고 말하던 사람이
뭐 이리 큰 집이 필요하데?
그렇지...
세상의 졸렬한 정치권력자들을 욕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우리들은 고시촌 골방에 앉아서
또 그 권력을 가지려고 오늘도 애쓰고 있는지.
모순으로 가득한 인간세계....
문득 졸정원의 겨울 호수 위에 서있는
멈춰버린 조각배가 쓸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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