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은 기울어 지고

사냥꾼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

by Le Studio Bleu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우러져 있는 공간


고등학교 때 음악 선생님이 계셨다.

안경을 끼고 조금은 뚱한 표정의 선생님 이셨다.


아무튼 선생님은 아드레날린 풀풀 날리는 남자 고등학교에서, 우리들에게 음악의 아름다움을 알려 주시기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고독한 분이셨다.


(내 기억으론 첫 번째 성악 시험을 보고 나서부터,

선생님의 근심이 깊어지신것 같다...

우리 반이 시험을 다 보는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아이들의 첫 소절만 듣고 선생님은 절망의

표정으로 '그만'을 외쳤다).


그 이후에 생각을 바꾸신 선생님.


야생 들소 같은 우리에게 시급히 필요한 것은

'음악적 기교'가 아니라,

'감수성' 이라고 판단하셨나 보다.


그래서인지 음악 시간엔 음악실에 모인 우리 앞에서

감상할 음악을 틀기 전에 자신이 보셨던 '소설' 이나 '영화' 이야기를 해주셨다.


선생님의 작전은 일정 부분 성공했던 것 같다.


지루한 수업보다는

그런 영화나 소설 이야기가 재밌기도 했고,


어떤 친구들은 그날 들은 구절들을 복붙 해선,

한참 좋아하던 옆 학교 여자애들에 손편지를 보내서

짝사랑이 이루어지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정말 미녀와 야수 급의 기적이었다.

역시 고딩들은 감수성~~!).


그리고,

그 음악 선생님이 졸리운 오후에 말씀해 주신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서시' 에 관한 이이기였다

(이 이야기는 맨 마지막에~~)



<< 사냥이 끝나고... >>


호구탑으로 올라가는 길


호구탑(후취우타,虎丘塔) 를 올라가는 길은

여러 풍경들로 잘 꾸며져 있다.


아지가기한 동산에 뭘 이렇게 많이 넣었을까 싶지만,물이 풍부한 고장답게 동산 여기저기에는 조그만 호수와 계곡물이 넘쳐흐른다.


걸어서 올라가기 딱 좋은 거리.

조금 땀이 날 즈음에 눈 앞에 호구탑이 보인다.


눈 앞의 풍경을 감상하다가,

이 곳에 오기 전에 보았던 책의 내용이 생각났다.


시간을 바꿔 다시 역사 속....


수 천년 전,

드디어 월나라 왕도 잡았다가 풀어준 오나라의 왕궁에선 대장군 '오자서' 가 고민에 빠져있다.


잚은 오나라 왕 '부차'가 이제 말을 듣질 않는다.


아버지도 성공하지 못했던 월나라 정벌,

이를 성공하고 이제 기고만장한 전형적인

'다이아 수저 집안 아들내미'...


이제 대장군은 팔짝 뛸 노릇이다.


생판 모르는 남의 나라까지 와서 목숨을 건 쿠데타까지 일으키며, 부차의 아버지 '합려'를 왕으로 만든 것이 바로 그였는데,


새파란 아들X은 자신을 이제

'꼰대'라 부르며 피하기만 한다.


오자서는 당대의 실세 였....었다.... (출처: 열국지 오자서와 합려의 쿠데타, https://blog.daum.net/gangseo 님 블로그에서)


젊은 왕의 오른쪽에는

얼굴만 봐도 너무 아름다워 헤엄치던 물고기도 심장마비로 가라앉게 만든다는 전설의 미녀 '서시'가 앉아있다.


오왕 부차와 자신을 이간질하는 환관 '백비'

주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동병상련' 이라는 고사까지 만들어가며 데리고 온 고향 사람이었다.


고민에 빠진 대장군에게

유일하게 그와 말이 통하던 상대가 사람을 보낸다.


요즘 두문불출하던

천재 전략가 '손무' 가 그를 초대한 것이다.


차를 마시며 서로 손을 맞잡은 자리에서,

오자서는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한다.


"손 선생..,

이제 젊은 왕은 내 말을 듣지 않아요.

어쩌면 좋겠소?

나는 이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오."


도사 같은 손무는 그를 바라보더니

웃음을 거두며 이야기한다.


"대장군..,

우리가 같이 여기 와서 오랜 시간이 지났지요?

여러 사건들이 있었구요."


운을 떼는 손무의 눈을 오자서는 바라본다.

그라면 답을 알고 있을 터였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어떻게 되나요?"


이제 중년이 된 노련한 오자서의 눈이 번뜩인다.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 손무, 이자는 나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걸까?


"장군,

사냥이 끝나면 충성스러운 개부터

사라지기 마련이지요."


차가 식어가도록 오자서는 말이 없었다.

손무가 오자서에게 권한다.


"대장군의 충심은 천하가 다 알 겁니다.

하지만 세상이 충성스런 장군을 가만히 놓아둘지..,

저는 그게 걱정입니다."


그리곤 말없이 방 한켠을 가리킨다.

그곳에 놓여있는 여러 짐꾸러미들이 오자서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 그에게 손무가 이야기한다.


"목을 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지요. 장군."


누각 밖에선 가을 잎들이

바람에 따라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손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손무가 떠났다.

이제 젊은 왕은 주변의 사람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괘씸한 놈들,

장작더미 위에서 잔 것도 나고,

죽을 고생 한 것도 나인데,


이제 좀 내가 편해보겠다는데,

네놈들이 말려?


감히 내가 발탁한 네놈들이?


나 부차야~~

천하가 무서워하는 오나라 왕이라고!


아마 젊은 왕의 마음은 이러지 않았을까?

그의 옆에는 그가 하면 다 옳다고 이야기해주는

사랑하는 '서시'와 충성스런 '백비'가 있다.


그의 분노의 불길은 이제 사방으로 퍼진다.


'손무도 떠났다고?....

모두가 저 꼰대 영감 때문이다.


다 필요없다.

이제 나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


왕궁에 들어와 간언을 하려는

대장군 오자서의 앞에 젊은 왕은 무언가를 던진다.


돌덩이도 베어 버린다는 명검,

'촉루의 검'.


왕은 그에게 자결할 것을 명한다.

검을 바라보는 오자서는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태어났던 나라에서 모함당해 집안이 멸문당했다.


자객들을 따돌리며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오나라에 도착했다.


꾀를 내어 쿠데타로 새로운 왕을 앉혔다.


태어난 나라로 돌아가 원수의 무덤을 파곤

채찍질하며 분을 풀었다.


월나라에 풀어놓은 첩자들의 말로는,

오래전 풀어준 월나라왕 구천이 매일 쓸개를 입으로 핥으며 복수를 꿈꾸고 있다고 한다.


위기가 눈 앞에 있는데,

내 말을 들어야 하는데....


내가 만든 왕의 애송이 아들놈이 이제,

여자와 간신에 눈이 멀어 나보고 자결하라고 한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오자서도

그리 성격 좋은 사람은 아니었나 보다.


서슬 퍼런 칼을 들곤

자식들에게 이렇게 유언을 남긴다.


"내가 죽으면 무덤에 나무 한 그루를 심어라.

나중에 그 나무는 베어서 (저 애송이) 왕의

관짝으로 쓰면 될 것이야.


내 눈은 뽑아서 동쪽 성문에 걸어두어라.

죽어서도 두 눈으로 월나라에 멸망당하는

오나라의 꼴을 꼭 보고 말겠다!"


화가 난 왕은 그런 오자서의 시체를

가죽 자루에 담아서 강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 탑은 기울고 >>


중국인들이 <피사의 사탑> 이라고 이야기하는 호구탑. 탑이 저렇게 기울어있다.


이야기들을 생각하는 동안,

목적지인 '호구탑'에 도착했다.


이 이름은 아직도 좀 그렇다... 하필이면 '호구'니.


하지만 탑 앞에 서자 이런 생각이 싹 달아났다.

이 탑은 중국의 전통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마치 인도의 불탑들을 보는 듯,

탑 층층에는 여러 장식들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지만,

기울어진 탑의 모양은 그 신비감을 더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 탑을

'피사의 사탑' 에 비유하곤 한다.


커다란 불탑 옆으로는 오랜 고찰인 호구사가 같이 있다. 사찰에 불탑에... 호랑이 왕은 이 곳에서 고즈넉한 소주 시내를 바라보며, 편안한 안식을 누리고 있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월나라왕 구천은 아직 살아있었다.


상담(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꿈꾸는) 의 생활

10년 넘게 해온 구천.


오자서가 죽임을 당하고 10년의 세월이 흘러,

그는 드디어 오나라의 수도로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온다.


오랜 시간을 벼르고 벼른 복수전.


이제는 오나라에는 그런 월나라의 군대를 막아줄

천재전략가 손무도, 충성스러운 오자서도 더 이상 없었다.


호구산의 사찰, 오나라의 시절을 기억하는 사당들의 모습
호구산의 오래된 사찰 기와, 여의주를 둘러싼 사자들만이 오나라의 영광을 기억해 주는 듯하다


월나라 왕 '구천' 의 앞으로 '부차' 가 끌려 나온다.

오나라왕 부차가 월나라왕 구천에게 이야기한다.


"내가 오래전 죽을뻔한 그대를 살려주지 않았는가?

이제는 그 빚을 나에게 갚아야 할 시간이네."


승리자가 된 구천은 코웃음을 치며 이야기한다.


"그때 나를 놓아주어 오늘 네가 거기서 무릎을

꿇고 있는 게 아니냐?

그럼 내일은 나보고 그 자리에 있으란 말인가?"


힘없이 끌려나가는 부차는

하얀 천 하나를 달라고 부탁한다.


죽어서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으니,

얼굴을 가리고 목이 잘리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월나라의 복수전을 완성하게 만든 천재전략가, '범려' 는 씁쓸하게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잔학하다...


왕을 도와 '고' 를 같이하며 큰 일을 이루었지만,

왕은 나와 '락' 을 같이 나눌 것인가?


이제 오나라를 차지한 월나라,

일등 공신이 된 '범려' 옆으로 친구인 '문종' 이 찾아온다.


"축하하네,

이제 천하가 당신을 우러러보게 되었군."


그런 친구에게 범려가 이야기한다.


"예전에 '손무' '자서' 에게 그랬다고 합니다.


사냥이 끝나면 활은 버려지고,

충성스러운 개부터 잡아먹는다고...


그런데... 이제 사냥이 끝이 났구려."


나라 최고의 재상이었던 '범려' 역시 어느 날,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팔아 수레에 얹고는

월나라를 탈출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 문종을 비롯한 많은 신하들 역시

새로운 왕, 구천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름을 감추고 도망친 '범려',

그는 멀리 남쪽으로 내려가 장사에도 성공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리고,

평생을 자신을 감추고 필요할 때에만

드러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많은 동남아 화교 상인들이 자신들의 먼 뿌리를,

세상 이치를 읽기에 능하고 이재에도 밝았던,

신비로운 책사 '범려'에게서 찾는다고 한다).



<< 사냥꾼이 되지 못한 사람들 >>


사당에 걸려있는 현판, 서시와 함께 오나라는 사라졌지만, 이름만은 계속 남아있다


그럼 '서시' 는?


오왕 부차를 홀린 건 서시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서시는 권력자들에 의해 선발되어 바쳐진 거고, 그녀에게 그냥 다이빙한 건 오왕 부차 자신이었다.


사실 강가에 한적한 시골에서

가족들과 멋모르고 살다가,


월나라 관리들에 눈에 띄어서 다른 나라 공녀로 간 그녀가 '블랙위도우' 같은 무슨 엄청난 스파이 교육을 받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녀가 굉장한 훈련을 받은 인물이었다면,

오나라가 멸망한 후 기록도 명확히 남아 그 공을 칭찬했겠지만, 아쉽게도 그 후의 그녀에 대한 기록은 정확히는 없다.


어떤 이들은 서시가

성난 오나라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도망치던 월나라 재상 '범려' 를 따라 그녀도 도망쳐 같이 숨어 살았다고도 한다.


다른 이들은 월나라왕 구천이 그녀를 다시 궁전으로 데리고와 첩으로 앉혔지만, 질투한 왕후의 모함을 받아 죽었다고도 한다.


어떤 결론이든 그녀의 이야기는

유교 빌런들의 손을 통해서,


군주가 여색에 빠지면 나라가 어찌되는지

본보기로 교육되어야 했고,

항상 나쁜X이 되어야했다.


그래서, 기록 속에서도

그녀는 곱게 천수를 누릴 운명은 되지 못했다.


서시의 전설을 쫓는 연인들은 영원토록 소주를 찾아올거다.


어느 여름날,

점심 먹고 졸음이 가득하던 음악실에서

선생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영원히 나쁜여자,

오페라 <카르멘> 의 곡들을 감상해야 할 우리에게,

어디서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서시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오나라의 동쪽 문에서 불길이 일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오왕 부차는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목이 잘렸다.
월왕 구천은 자신이 아꼈던 보물, '서시' 를 찾아 나섰다.

멀리 호수 가운데,
'서시'가 배 위에 앉아서 비파를 타고 있었다.

월왕 구천은 급히 그녀를 불렀다.

"이제 드디어 우리가 이겼다.
나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자꾸나."

그런 왕을 서시는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내가 살아서 해야 할 일은 끝났습니다.
월나라 사람으로 해야 할 일을 했어요.

하지만,
모두가 나를 복수를 위한 도구로 볼 때,
나를 한 여자로 사랑해준 사람은 오직
오나라왕 ‘부차' 뿐이었죠.

이제 저는 죽어서 해야 할 일을 하겠어요."

그리곤
그녀는 깊은 호수 속으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역시나 슬픈 이야기다.

만약 복수라는 그 감정이 조금만 옅었더라면.


'서시'는 오나라의 왕궁에서

평생 행복하지 않았을까?


'오자서' 역시 난관 속에서 운명을 개척한

승자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거고,


'손무' 는 소주의 아름다운 운하를 보면서

손자병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범려' 역시 먼 남쪽으로

수레를 끌고 도망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역사의 물결이란,

보통 사람들에겐 그리 관대하지 않은 것 같다.


큰 사냥이 끝나고 나면 그저,

사냥꾼들은 전리품을 챙기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사냥꾼이 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는

교훈처럼 남아 후대에 입으로만 전해질뿐.


그렇게 기울어진 호구탑과 파란 하늘이

이야기 하는것 같았다.


브런치 덕분에[ 수 년 만에 완성한 채색스케치. 다시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ㅠㅠ

(반전1)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음악선생님은

선이 굵은 '남자' 셨다.


(반전2)

짝사랑에 성공한 기적을 썼던 동기녀석은

다음주에 차였다.

다음 음악수업을 들었던

다른 반 아이의 또다른 손편지로 인해서~

라고 녀석은 변명했지만...

(역시, 고딩은 감수성 보다 외모다!)


(반전3)

음악 선생님이 말씀하신

이야기의 원본은 아직도 찾질 못하고 있다....

(심지어 중국에서 그렇게 서점을 뒤졌음에도...

출처를 아시는 분은 제보부탁 드려요~)


《 수저우, 후취우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