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 넘지 말아야할 선을 정하다
( 전편의 내용이 길어, 나누고 보충한 내용입니다~)
전쟁범죄는
무력분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국제인도주의법> 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행위들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군인들의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행위, 파괴행위 및 폭력행위 등이 포함됩니다.
사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이거였습니다.
"아니, 전쟁이 일어나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겨야지.
국제질서는 원래 냉정한거 아냐?
거기에 무슨 인도주의가 있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신속하게 전쟁을 끝낸다.
냉혹하면서도 매력적인 말이죠.
어쩌면 전쟁을 치르는 이들에게는
가장 달콤한 말일 수도 있지만…
우리 인류는 그런 유혹에 빠져서
너무나 무서운 결과들을 경험했답니다.
독가스와 같은 대량살상 무기들과 폭격기의 등장으로 이젠, 민간인들 역시 전쟁에서 무사하지 못함을 보여주었죠 (과거 1차 세계대전에서는 군인 10명 당 민간인 1명이 죽었다면, 이제는 비슷한 사망 비율이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국제인도주의법> 이란 무엇일까요?
그 법이 뭐라고, 언론에서는 러시아의
국제법 위반을 연일 떠들어대고 있는 것일까요?
이야기가 조금 길어집니다만
(각오하시라는 뜻입니다 ^^),
<국제인도주의법> 의 배경에는 스위스의
‘앙리 뒤낭(Herny Dunant)’ 이란 사업가가 등장합니다.
시간만 나면 쌈박질을 일삼던
화끈한 유럽의 군주들 사이에서,
대박칠 기회를 꿈꾸며 두 발로 뛰어다니던 사업가.
그런 그에게 중요한 고객이 등장합니다.
남의 집 뒷마당, 이탈리아까지와서 무력을 과시하고 있던 당시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국군’이 그들이었습니다.
1859년,
이탈리아의 '솔페리노(Solférino)' 지방으로 원정온 프랑스군들을 접대(?)하기 위해, 출장 방문하였던 그는 내친김에 근방에서 진행되고 있던 전쟁을 구경하러 가게 됩니다.
당시에 이탈리아는
<비토리아 에마뉴엘레 2세>의 지휘하에
오랫동안,
자신들의 독립을 방해해온
'오스트리아' 와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1세 때부터
오스트리아와는 사이가 좋지 않던
프랑스 역시 이탈리아 편에서
전쟁에 참여하였던 것이었죠.
이곳 솔페리노의 평원에서
이탈리아-프랑스 연합군과
오스트리아군의 전쟁이 한창이었습니다.
낭만적인 기병대의 돌격과 애국심 넘치는 군인들이 싸우는 멋진 전장의 모습을 기대하던 앙리의 눈앞에,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지옥 같은 풍경들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승리한 지휘관들이 전장을 떠나
축배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병상이 모자란 시내의 여기저기에
부상당한 군인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숨을 헐떡이는 그들 주위를
까마귀와 쥐 때들이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1859년 6월 24일,
이날의 전투에서 3만 명 이상의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뒤엉켜 싸웠고, 총 4천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시민들을 도와 군인들을 치료하고,
그 와중에 죽어가던 군인들의 목소리를 듣게 된 앙리, 그는 이 날의 기억을 평생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1862년,
<솔페리노의 회상(Un Souvenir de Solferion)> 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죠.
전쟁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직접 목격한 그는,
전쟁이란 그리 낭만적이지도 않고,
모두가 피해자가 되는걸 알려야 한다고 결심합니다.
더하여 그는 하나의 단순한 의문을 갖습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서로를 죽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이런 야만적인 전쟁통 에서도
서로를 도우는 사람들도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앙리의 아이디어는
대부분 사람들에겐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몽상적인 앙리의 이야기를
무시하지 않고 들어주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은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기욤 앙리 뒤푸르(Guillaume Henri Dufour)'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앙리의 이야기를 듣곤
가슴 깊이 지지를 보냅니다.
몽상가와 리얼리스트의 만남,
앙리가 전쟁의 위험성을 목격하고 문제가 있음을 생각했다면, 평생을 전쟁에서 살아온 기욤은 앙리의 생각을 현실적으로 다듬어 주었습니다.
무른 쇠가 불 안에서 단단하게 재련되듯이,
앙리와 기욤의 하나된 마음은
국제사회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국제적십자연맹(ICRC)' 의 탄생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이들이 전장에 존재한다....
죽음이란 명예로운 일이라 포장되고,
부상자들에 대한 치료는 귀족과 승리자들의
특권이라고 여겨지던 전쟁터에서,
적과 나를 구분하지 않고,
오직 사람을 살리기위해 뛰어다니는 이들이 있다.
이런 존재가 세상에 받아들여질지는
아직은 미지수 였습니다.
그리고,
바다건너 미국에서는 '클라라 바턴' 이라는
걸출한 여걸이 등장합니다.
아직은 변방으로 취급받던 미국,
여성들의 목소리가 낮았던 사회 분위기에서
그녀의 광폭행보는 주목을 받기 충분했습니다.
17살의 나이부터 교사로서의 사회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많은 여성들이 그러했듯, 보이거나 보이지 않던 벽들에 부딪히게 됩니다.
4년에 걸친 내전기(남북전쟁) 를 거친 미국.
에너지 넘치는 그녀를 마땅찮아하던,
속좁은 남정네들의 질투로, 교사일을 그만둬야 했던 바턴은 새로운 업무를 찾습니다.
그녀가 맡은 업무는 다름아닌,
내전 당시에 전쟁터에서 전사한
신원미상 군인들의 신상을 밝혀내는 업무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일을 멋지게 처리합니다.
(열정적이던 그녀의 노력으로, 무려 22,000명의 전사자들이 신원이 밝혀져 고향의 가족 품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1869년,
휴식차 유럽여행을 떠난 그녀는
스위스의 '국제적십자연맹' 본부를 방문하였고,
이 방문은 그녀의 운명을 바꾸어 놓습니다.
적십자연맹의 활동에 감명받은 그녀는
프러시아-프랑스 전쟁(보불전쟁)에 자진하여
적십자활동원으로 참전하였고,
수 많은 죽음과 삶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후 그녀는 사회의 차별 속에서도
미국을 움직이기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1881년,
헌신적인 그녀의 노력으로
신대륙 역시 인도주의 활동에 동참하게 되죠.
미국에 최초의 적십자연맹지부가 설립되게 된 것입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무려 60세 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죠.
이후 무려 23년의 기간 동안
그녀는 ‘미국적십자연맹’ 의 대표로 활동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미국 의회는 오랜 동안 유지한 고립주의를 버리고
<제네바협약> 을 정식으로 비준합니다.
(앙리, 기욤, 바턴 ... 모두가 전쟁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사람들 이었고, 그러기에 더욱 합심해서 전쟁의 위험을 알리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1864년,
<육상 전투에 있어서의
군대 부상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협약>,
줄여서 <제네바 협약> 이
앙리와 조력자들의 노력으로 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10년 뒤,
저 멀리 불곰국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1874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전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열정적인 연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럽 전역에 평화조약의 필요성을 주장합니다.
전쟁이라면 빠지지 않던 불곰국이 갑자기 평화?
라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사실 당시의 러시아는 '크림전쟁' 의 패배로 엄청난 재정난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러시아에게
'군비지출 감축' 과 ‘낙후된 사회개혁’은
왕조의 명운이 걸린 일이기도 했습니다
(혼란한 왕조의 운명을 보여 주 듯, 알렉산드르 2세는 이후에 혁명세력에게 암살당하게 됩니다,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이 다가오고있음을 알리는 불길한 신호였죠).
영광이 가득할 것 같던 유럽 제국들이
어렴풋이 전쟁의 위험성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
유럽 각 국 정상들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네덜란드 헤이그에 모이게 됩니다.
(우리에겐 <헤이그밀사> 로 유명한 그 회의입니다).
1899년과 1907년,
두 번에 걸쳐 개최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에서는
기존의 <제네바 협약> 의 정신에 기반하여,
1. 육지전투에 대한 관습을 체계화하고
2. 해양에서의 전투에 대한 법령을 신설한
부가 협약들이 맺어집니다.
이를 <헤이그협약>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각종 미디어에서 이야기하는
전쟁범죄에 대한 주요 국제 법률은
바로 이 두 개의 협약,
<제네바협약> 과 <헤이그협약> 을
기본으로 하는 <국제인도법 (International humanitarian law)>을 의미합니다.
전쟁범죄에 대하여 특별히
많은 분량을 할애한 이유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일어 나왔던
'전쟁' 이라는 행위를,
우리 인류가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
을 이야기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우리 인류가 지구의 주인이 되고
수 만 년의 시간을 살아왔지만,
전쟁이란 행위가
‘규제되어 마땅하다’ 라고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생기게 된 시기는
불과 120여 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성의 힘을 믿고, 예술을 즐기는 우리는 어쩌면 생각보단 아둔한 피조물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무력으로 공격하는 행위,
침략행위를 정의하는 말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의 작은 도시
‘뉘른베르크' 의 전범재판 법정에선,
조용하지만 단호한 선고문이 낭독됩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에 대하여
우리 인류는 역사를 통하여
이를 죄악시하여왔고,
<켈로그-브리앙조약 (파리 부전조약)>
을 통하여 이러한 생각을 구체화하기도 하였
다.... 피고들이 행한 타국에 대한 침략 행위.
는 국제법상
<최고로 사악한 범죄행위 >
(Supreme International Crime)
라고 칭할 수 있다."
소란스러운 피고석,
변호인들은 반발합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도
반성도 않고 이의를 제기하다니...
하시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이전까지 전쟁이란 여러 국가들에게
인정되어온 권리였습니다.
'전쟁개시권'은 역사적으로,
주권을 가진 국가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로
존중되었고,
정해진 절차(선전포고 등)를 따른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다수의 인식이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란 따끔한 주사를 맞고도
이러한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죠.
1928년,
파리에 승전국들이 모여 이를 고치고자,
<켈로그-브리앙 부전(不戰)조약 >
을 맺었지만 이내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이제 두 번의 전쟁을 경험한
국제사회는 모여서 한 목소리를 냅니다.
타국을 침공하는
전쟁을 개시하는 것 자체가
국제사회에서
최고로 사악한 범죄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당시 가장 큰 목소리를 낸 국가는
독일의 침공으로 피해를 본 구소련 이었답니다.
침략범죄에 대한 정의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에
러시아가 보여준 행동들이 이해가 됩니다.
2014년 우크라이나 돈바스 전쟁 당시,
러시아는 공식적으로 이 전쟁을
우크라이나의 '내전'으로 몰아가고 싶어 했죠.
크림반도를 놓고
우크라이나군과 교전하던 세력은
우크라이나 내부의 친러시아 반군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이... 음.... 실제론 어느 나라의 군인인지,
누가 그 무기를 공급해 주었는지는...)
이번 전쟁 초기에도 위장전술 이기는 했지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지역 안에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 의
독립을 승인하였습니다.
또한,
이들 국가(?)들이 러시아에게
'지원군' 을 요청하는 모습 을 만들려고 했죠.
번거로워 보이는 이런 행동을 취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국제법 상의 범죄행위에 대한 부담감을 떨쳐내기 위함입니다.
우크라이나 내부의 전쟁이 발생했고,
이들을 도와주는 형식으로 군대를 파견했다는
명분을 얻기 위한 사전 행동이었던 것이었죠.
물론,
이런 조심스럽던 행보도 키이우(Kiev) 에 대한 직접적인 침공이 시작되면서, 모두가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UN 헌장과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들의 ‘거부권' 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러시아가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있는 한, UN군의 우크라이나 사태 개입은 힘들어 보입니다 (러시아가 조상님 버프를 받는다는 댓글이 맞아 보여 안타까워요).
현재 미국과 NATO는
우크라이나는 NATO 회원국이 아니기 때문에,
전쟁 개입이 힘들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죠.
그렇다면,
UN 이 의결한 '4대 중대범죄' 에
러시아의 행위들이 해당된다면 어떨까요?
러시아의 행위가
R2P(보호책임) 가 규정하는
범죄행위에 해당된다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제사회의
최소한의 개입 여지는 생기게 됩니다.
(비록 UN을 통한 지원은 힘들겠지만 말이죠...)
우선 부차 지역 등에서 일어난
민간인에 대한 광범위한 학살행위,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발생하고 있는
금지된 무기들(백린탄, 집속탄 등)의 사용,
그 외의 각종 고문 및 학대행위들은
'국제인도주의법' 을 위반한
<전쟁범죄> 입니다.
더하여 우크라이나 북부에서 벌어진
대규모 러시아 정규군의 침략행위는
두 말할 것도 없는 <침략범죄> 로
위법행위가 성립됩니다 (러시아는 저 4가지 중 벌써 2가지를 위반했네요...).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
올해 3월부터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 중 러시아 잔학행위'
증거수집은 이러한 기소를 위한 사전 행동입니다.
(현재 ICC는 대규모의 조사단을
우크라이나에 파견해 증거를 수집하고 있답니다.)
재미있는 것은 러시아의 반응입니다./world/view/2022/06/529575/
이제는 국제 여론을 크게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러시아도 뒤로는, 여러 경로로 진행사항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솔직히 현재 상황으로는
푸틴을 강제로 법정으로 끌고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적어도 러시아 땅에서 계속 있는 한은 말이죠)
하지만,
국제사법기관이 조사를 하고 있다는 자체 만으로도 당사자들이 불편해하는 상황은 분명한 듯합니다.
시간이 걸리고는 있지만,
명분은 점점 러시아를 떠나는 모습이구요.
재판소의 결론이 어떨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이번 전쟁으로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 국제사회가
또.한번 발전적인 방향으로의 교훈을 얻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