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상파울루까지
인천에서 상파울루까지
한국에서부터 지구 정반대 브라질까지 가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미국을 경유하거나, 유럽 주요 도시를 경유하거나, 중동을 경유하는 항로가 그것인데, 지난 2016년 유일한 직항 편이 폐지된 이후론 환승 편을 이용하는 방법만이 유일하다. 그중 미국을 경유하는 방법은 거리는 짧을지언정 ESTA를 발급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유럽 주요 도시를 거치는 방법은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싸다. 아부다비의 에티하드 항공, 도하의 카타르 항공, 또는 두바이의 에미레이트 항공을 이용하는 방법이 가장 무난하다고 했다.
어느 날 회사 메일로 날아든 에미레이트 항공 티켓 한 장과 함께 브라질로의 출장이 갑작스럽게 확정되었다. 오고 가는데만 꼬박 사흘은 잡아야 하니 일정을 계획하는 것도 여비를 준비하는 것도 다른 출장 때보다 배로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난생처음으로 가보는 남미 대륙이다. 요즘 들어 인터넷 게시판에서 자꾸만 브라질 치안에 대한 소식이 많이 보이는 것도 근심을 더하게 했다. 그래도 이 모든 상황에도 떠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준 건 순전히 가보지 못한 곳, 접해보지 못한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그렇게 나는 생애 첫 남미 대륙 방문을 '출장'으로 하게 되었다.
마른장마에 종일 덥고 습한 날씨가 반복되던 7월의 끝자락, 출국하는 그날따라 서있기만 해도 등줄기에 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날씨의 서울이었다. 두바이를 경유하여 상파울루까지 가는 내 비행 편은 자정 무렵 인천에서 출발할 예정이었다. 프랑스에서의 짧은 휴가에서 일요일 아침에 돌아와 곧바로 월요일 출근을 했다가, 그날 저녁 회사에서 다시 공항으로 직행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아무리 체력에 자신이 있는 나였어도 이번 출장만큼은 쉽지 않겠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
그래서 였을까. 물론 내가 아직은 좌석 클래스를 따져가며 탈 정도 위인이 아님에도 초청받은 이코노미 클래스 표에 못내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두 번의 비행, 순수 탑승시간만 25시간, 대기시간까지 합치면 총 30시간이 넘는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부디 내가 선택한 자리가 편안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공항행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간발의 차로 버스 하나를 놓치는 바람에 30분이나 더 기다렸다가 겨우 공항에 왔다. 그래도 생각보단 일찍 도착했다. 아직 탑승까지는 4시간 가까이 남은 시각, 느린 걸음으로 에미레이트 항공의 체크인 카운터를 찾아갔다. 그런데 벌써부터 줄 서있는 사람이 많았다. 그 모습을 보고 반사적으로 내 머리에 떠오른 단어는 '좌석 승급'. 몇 년 전, 북경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오버부킹으로 인한 좌석 승급을 받아본 경험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의 경험에 의하면 다음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는 경우 승급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높은 클래스의 표 - 보통 여행사를 통해 구매하는 출장용 표들이 이에 해당한다.
탑승률이 높은 인기 노선 - 당초 초과 예약된 인원이 모두 출석해버리면 자리가 모자라게 된다.
혼자 온 승객 - 위 두 가지 조건에 해당하더라도 동행이 있으면 여러 자리를 승급해야 하므로 순위에서 밀린다.
그렇다. 지금 나는 1번과 3번 조건에 해당하며 방금 본 체크인 카운터의 북적이는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2번의 상황과도 근접해 보였다. 그리고 대망의 체크인 순간, 창구 직원은 나에게 '혹시 동행이 있으신가요?'하고 반가운 질문을 물어왔다.
아뇨, 혼자입니다!
나의 직감은 정확했다. 체크인 카운터의 직원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확인한 후 이코노미가 풀 부킹이라 승급을 해 드려도 괜찮겠냐고 물어왔다. '괜찮기는요... 당연히 너무 좋죠!'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신사답게 '네 괜찮아요'라고 대답했다. 후후...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장거리 비즈니스석을 타보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북경에서 돌아오는 비행기가 첫 비즈니스였는데 일단 단거리 노선이라 그런지 우등버스 정도의 좌석 느낌이었고 그마저도 비행시간이 짧아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타는 두바이까지 비행은 9시간 30분짜리 야간비행이다. 너무 신나 어깨가 들썩거려 주체할 수가 없을 만큼 기뻤으나 신사다운 태도를 계속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후후후...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건 두바이에서 상파울루까지 가는 다음 티켓은 승급이 안되어 여전히 이코노미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하고, 지금은 우선 나에게 주어진 행운을 충분히 즐기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퇴근하자마자 바로 공항으로 온 터라 식사를 하지 못했었다. 라운지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샤워실을 들러 몸단장까지 말끔하게 마쳤다. 이미 시간이 늦어 문이 닫힌 면세구역을 지나 두바이까지 가는 EK323편 탑승게이트로 향했다.
항속거리를 고려할 때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에 위치한 중동 항공 편들은 어디로든 환승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가졌다. 아마 오늘 두바이로 가는 비행기 편에도 전 세계로 향하는 휴가객들이 몰려있을 터다. 풀 부킹 비행 편이었던 만큼 게이트 멀리서부터 긴 줄이 보였다. 하지만 비즈니스 티켓은 별도의 게이트로 들어가면 된다. 한창 배낭여행 다닐 때만 해도 줄 서는데 이골이 날 정도였는데 그냥 휙 지나가버리니 이건 뭐 섭섭할 정도다. 그래도 티 안 나게 절제된 미소를 띠며 유유히 게이트를 지났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두바이 국제공항을 허브로 하는 에미레이트 항공은 가장 부유한 항공사 중의 하나로 유명하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스폰서십 문구로 Fly Emirates가 익숙할 터이고 나처럼 항덕 기질이 있는 사람들은 현존하는 가장 큰 여객기인 A380을 최다 보유한 항공사로도 잘 알고 있으리라. 내가 탄 인천발 두바이행 정기편도 2층 구조로 되어있는 A380-800 기재였다.
보통의 광동체 여객기에서도 비즈니스석은 전면부 일부를 구획하여 만드는 반면에 에미레이트 항공의 A380은 2층 전체를 퍼스트와 비즈니스 만으로 박아 넣었다. 그래서인지 처음 기내에 딱 들어서면 마치 전좌석이 비즈니스석으로만 이루어진 비행기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SeatGuru 사이트에서 확인해보니 1층 이코노미석은 약 400석, 2층은 거의 동일한 면적 안에 퍼스트 14석과 비즈니스 76석이 배치되어있다.
부자 항공사답게 좌석도 완전히 180도 눕혀지는 풀 플랫(Full-flat) 타입으로 장착되어 있었다. 사진상 좌석 오른쪽에 보이는 테이블 같이 생긴 부분은 매 열마다 좌우를 바꿔 등장하는데 뒷좌석 사람은 이 공간 하부로 발을 집어넣고 완전히 누울 수 있도록 되어있다. 동체의 상부층이라 상대적으로 벽체가 기울어져 생기는 좌석과의 틈에는 가방을 수납하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있다. 때문에 상부 선반의 쓰임새는 비교적 여유로운 편이다.
화장실도 가보고, 라운지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하다 보니 어느새 잘 시간이 되었다. 이대로 잠들어버리기엔 좀 아까운 기분이었지만 한국 시간으로는 어느덧 새벽 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부터 출근했다가 바로 공항으로 온지라 온 몸 구석구석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승무원이 이불을 깔고 잘 준비를 해 주었다. 이런 호사는 몇 번이고 누려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복도 쪽 자리이긴 했지만 팔걸이가 가림막 역할을 해서 주변 방해받지 않고 여섯 시간가량 푹 잤다. 처음 접해보는 풀 플랫 좌석이 제법 편하고 기분 좋았다. 하지만 자리에 누워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한 평 남짓한 고시원에서 쪽잠을 자는 것과 어찌 보면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아무리 좌석이 승급되어도 비행기에서 자는 건 여전히 고달프다. 혹시 퍼스트는 다르려나.
먹는 것도 꽤 잘 먹었다. 잠자기 전후로 총 두 번의 기내식이 나왔다. 물론 아무리 비즈니스라고 해도 땅 위에서 먹는 음식에 맛에는 비할바가 못 되는 것이 당연지사다. 그럼에도 음료와 디저트류가 풍부한 점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특히 초콜릿 무스케이크가 맛있었는데 살찔 줄 알면서도 끝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식기가 정리되고 이내 모니터에는 두바이의 새벽 전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A380에는 꼬리날개 수직익에 카메라가 장착되어 있어 마치 게임하는 것처럼 생동감 있는 착륙 장면을 즐길 수 있었다. 내리기 싫은데... 더 타도 괜찮은데... 하지만 야속한 승무원들은 연신 '굿바이'를 웃으며 나를 배웅해주었다. 달콤했던 좌석 승급의 행운은 찰나의 순간처럼 빠르게 지나가버렸다.
두바이 현지시간으로 새벽 5시 무렵에 도착한 탓에 바깥은 아직 깜깜했다. 대기시간이 꽤 있어 시내에 잠깐 나갔다 올까 생각도 했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딱히 들어갈 곳도 없을 것 같아 그냥 공항에 있기로 했다. 덩치가 큰 A380을 위해 별도로 지었다는 제3 터미널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면세구역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쇼핑에 별다른 취미가 없는 나는 건물 한 바퀴 휭 둘러보고는 라운지에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지난밤의 피곤을 중동식 사우나에서 말끔하게 씻어버리고 다음 비행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이제는 다시 이코노미 본연의 자리로 돌아와 더 긴 비행을 맞이해야 할 시간이다. 애초에 이코노미인 줄 알았으면서도 간밤의 호사 때문에 괜스레 아쉬운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도 참 어쩔 수 없는 범인(凡人)이다. 이내 탑승 게이트가 열리고 나는 한껏 풀이 죽은 채 직원에게 표를 내밀었다. 그런데 이 사람... 나한테 갑자기 윙크를 한다?
게이트 직원은 여권에서 내 이름을 확인하더니 빠른 동작으로 책상 밑에서 새 표를 꺼내어 내 손에 쥐어줬다. 얼떨결에 받아본 표에는 선명하게 적혀있는 바로 그 이름 '비즈니스'. 그랬다. 나는 이번에도 다시 한번 자동승급이 된 것이다. 어쩐지 상파울루 가는 사람이 생각보다 너무 많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이코노미는 풀 부킹이었던 모양이다. 인천에서 처음 승급됐을 때 보다 훨씬 더 기뻤다. 다시는 못 가볼 줄 알았던 A380 2층에 한 번 더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출장길, 시작부터 참 마음에 든다!
떠나오기 전부터 브라질의 치안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도 들은 터라 막연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상파울루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그런 생각이 싹 없어졌다. 남미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이자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라는 명성에 걸맞게 상파울루로 향하는 옆자리 사람들은 대부분 사업가나 높은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내가 탄 비행기는 A380 중에서도 가장 최신 기자재가 탑재된 신형이었다. 모니터, 리모컨, 좌석 스위치 같은 큼직한 사양들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USB 전원의 위치까지 훨씬 편리하고 보기 좋은 위치로 바뀌어 있었다. 뭐가 달라졌는지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한 가지 눈여겨본 건 같은 비행기에 한국인들도 더러 있었다는 점이다. 막연히 한국에서 먼 곳이라 한국 손님은 나 혼자일 줄 알았는데 가족단위 승객도 보이고 이래저래 신기한 풍경이었다. 다들 무슨 사연으로 이 먼 곳까지 가시는지 매우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보진 못했다.
이코노미에 비하면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대단히 편하게 왔지만 그래도 15시간의 비행은 만만치가 않았다. 인천에서 뉴욕까지도 12시간 남짓, 가장 먼 유럽의 끝 마드리드로 가더라도 13시간이 걸렸으니 이번 비행은 나름 개인 최장시간 기록을 세운 셈이다. 낮비행이지만 앞선 비행에서와 마찬가지로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불 깔기 서비스를 제공한다. 의자를 완전히 눕혀도 보고 잠깐 세워도 보고 라운지에 들러 운동도 해보지만 그래도 종국에는 허리가 아플 정도로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영화만 총 네 편을 보았는데도 비행기는 아직 대서양 위에 있더라.
주는 대로 음식을 다 받아먹다 보니 간식까지 총 다섯 번을 먹었다. 조식-간식-점심-간식-(간이) 저녁 이런 식이다. 이미 두바이까지 오는 동안 기내식 두 번에 간식 한 번을 먹었고 기다리는 동안 라운지에서도 식사를 한 번 더 했으니 상파울루까지 오는 동안에만 총 아홉 번 뭔가를 먹었다는 계산이 된다. 여기에는 중간에 마신 음료는 포함되어있지 않으니 뱃속에 얼마나 많은 게 들어갔을지 상상도 못 하겠다. 그래도 분에 넘치는 행운을 두 번이나 겪어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
이제는 정말 내려야 할 시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긴 비행을 마치고 어느새 창밖으로 상파울루의 시가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먹고, 자고,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할 일이 많았고 처음 타보는 A380 비즈니스석에 호기심이 발동해 이것저것 가지고 놀다 보니 출장과 출장지에 대한 생각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창밖으로 건물과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새삼 내가 지구 반대편에 진짜 왔구나 하는 현실 자각이 되기 시작했다. 아아, 감상에 젖어있을 시간은 이제 끝났다.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야겠다는 책임감 만이 무겁게 가슴을 눌러왔다. 혹시 이번 출장의 운을 오는 길에 다 써버린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마저 엄습해왔다.
짐을 찾고 이것저것 챙기고 공항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어둑해진 시간. 픽업하기로 되어있는 차를 기다리면서 심호흡을 크게 하고 새로운 도시의 공기에 적응해본다. 생각보다 쌀쌀한 날씨에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 얼른 겉옷을 챙겨 입었다. 찌는듯한 더위의 한국에서 출발해 남반구의 상파울루의 겨울까지 오게 된 30시간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도착한 차에 올라 시내에 위치한 호텔로 향했다. 상파울루 외곽도시에 위치한 과를류스 국제공항에서 시내까지는 40분 남짓 걸리는 거리다. 차멀미였을까. 갑자기 12시간의 시차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한 익숙한 기분과 함께 옅은 두통이 찾아왔다. 비로소 출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