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출장은 끝난다
나에게 하루 반나절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쌀쌀했던 4월의 도쿄 날씨는 자꾸만 몸을 웅크리게 만들었다. 출장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자유시간이다. 일정과 일정 사이에 생기는 자투리들을 잘 모으면 나름의 짧은 답사를 다녀오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본연의 업무에는 지장이 없는 선에서 말이다. 다만 그런 시간이 언제, 어디서, 얼마나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뭔가를 미리 계획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저 마음속에 미리 후보지를 두어 군데 점찍어 두는 정도라면 모를까.
이날은 오전 4시에 미술관에서 열리는 콘퍼런스 참석을 제외하고는 오전 내내 일정이 비었다. 전시와 관련해 갑작스러운 돌발상황이 생길 것을 대비해 여유삼아 남겨놓은 시간이었는데 다행히도 일이 잘 끝나 남는 시간이 되었다. 애초에 계획이 없었으니 갈 곳도, 볼 것도 없는 막막한 처지였다. 이럴 땐 일단 구글 지도를 켜서 내 주변에 뭐가 있는지부터 살펴보는 게 좋다.
호텔이 위치한 시나가와를 중심으로 손가락을 오므리며 줌 아웃을 몇 번 하니 화면 왼쪽 아래로 '요코하마'라는 글씨가 눈에 확 들어왔다. 너무나 당연스럽게도 난, 요코하마 페리 터미널을 곧바로 떠올렸다. 건축가 F.O.A가 설계한 요코하마 페리 터미널은 학생 시절 건축과 도서관에서 우연히 다이어그램을 한번 보고는 반해버린 건물이었다.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오래된 건물이라 사진이나 도면으로는 수도 없이 봐 왔기도 했었다. 구글맵에 의하면 내가 있는 호텔에서부터 한 시간이 채 안 걸리는 거리. 난 요코하마가 도쿄에서 이렇게나 가까운 도시인 줄도 몰랐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곧바로 짐을 챙겨서 역으로 향했다.
요코하마와 도쿄의 관계는 딱 인천과 서울 정도인 것 같았다. 방위와 거리도 비슷하고 바다와 접해있는 것도 닮았다(도쿄와는 달리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는 사실은 빼고). 완행열차를 타면 그것만 해도 한 시간은 걸릴 거리였지만 이 날따라 운이 좋았는지 우연히 급행을 타게 되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계획도 없이 충동적으로 시작된 요코하마로의 외유에 작은 행운이 따른 셈이다. 한껏 들뜬 마음으로 창 밖의 경치를 감상하며 짧은 기차 여행을 즐겼다.
요코하마 역에서 미나토미라이선으로 갈아타고 니혼 오도리 역에서 내리면 요코하마 페리 터미널로 갈 수 있다. 터미널만 보고 도쿄로 돌아가기엔 시간이 좀 남는 것 같아 반대 방향에 있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스타디움에도 잠깐 들렀다. 일본 야구 팬인 동생을 위해 기념품이라도 사다 주려고 했는데 샵은 11시나 되어야 연다고 해서 스타디움 앞만 빙빙 돌다가 바다 쪽으로 다시 나왔다.
아침부터 바람도 심하게 불고 빗방울도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바닷가로 나오니 오한이 들고 덜덜 떨릴 정도였는데, 그 와중에 요코하마 페리 터미널을 눈 앞에 마주하니 괜스레 뭉클해진다. 내가 널 보러 여기까지 몸소 왔단다...
국제현상설계를 통해 F.O.A가 당선된 것이 1995년, 완공이 2002년이니 어언 20년이 다 되어가는 꽤 고전(?)에 속하는 건물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이 곳에 꼭 와보고 싶었던 건 파리에서 퐁피두 센터를 꼭 들러야 했던 이유와 비슷하다.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30대 초반의 젊은 건축가 알레한드로 자에라 폴로와 파시드 무사비의 당선, 그동안 보던 건축과 전혀 다른 형태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 그리고 마침내 건축가의 생각대로 만들어져 지금까지 20여 년 가까이 잘 사용되고 있는 실재화된 건축. 이 모든 사건들의 연속선상에서 그 현장에 직접 두 발로 서보고 싶었다.
요코하마 페리 터미널의 다른 이름은 오산바시(大さん橋)이다. 직역하면 큰 잔교, 혹은 선창인데 터미널 자체가 건물로 읽히지 보다는 그냥 배를 대는 넙데데한 잔교 구조물처럼 읽히는 콘셉트를 잘 드러내는 이름 같다. 게다가 이 날따라 건물 양 옆으로 크루즈선 2대가 모두 정박해 만석이었다. 마치 내가 오는 것을 반겨주기라도 하듯이!
입구에 채 들어서기도 전부터 본격적인 나무데크 예술이 시작됐다. 중력을 무시하듯 유선형에 가깝게 굽이치는 형상들을 가장 일반적이고 규격화된 재료인 나무데크를 조합해 구현해냈다. 지어진 지 오래된 건물이지만 조금의 오차도 없이 건재함을 뽐내고 있는 데크를 보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는 생각이었다. 아마 나무데크를 까는 방법에 있었어서는 못해도 십 년은 더 갈 훌륭한 모범답안이지 않을까.
주출입구를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탑승객 로비가 나온다. 기둥 없는 대공간은 표를 사고, 누군가를 기다리며, 주린 배를 채우는 분주한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 느낌이었다. 첫인상부터 큰 감동을 주었던 나무데크는 실내공간까지 연속된다. 다만 바깥보다 대합실 쪽이 이용 빈도가 월등히 커서 그런지 조금 삐그덕거리는 느낌이 있어 아쉬웠다.
이미 수 없이 회자되었겠지만, 실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폴딩 구조의 천장이다. 예전에 구조 수업시간에 종이 접기로 만들어봤던 바로 그 모양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는 대합실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대공간에서 중간기둥을 없애기 위한 역할에 충실한 구조이다. 또한 색이 칠해지지 않은(혹은 원재료의 색상과 비슷하게 칠해진) 철판지붕과 나무 바닥의 조합은 마치 내가 '배의 용골' 아래, 혹은 '갑판' 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을 들게 만든다.
배를 타기 위한 건물에서부터 마치 배에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느낀다라는 건데, 이게 생각보다 기분이 참 좋은 일이다. 왜, 그런 경험 다들 있지 않은가. 공항에 누군갈 데리러 가기만 해도(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공항이란 공간에 온 것만으로도 들뜨는 기분. 아마 요코하마 페리 터미널에 누군가를 배웅, 혹은 마중 나오는 사람들은 함께 배를 타고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두 사람의 분리된 경험의 중첩점을 만들어주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참으로 충실히 하고 있었다.
수평으로 길고, 상대적으로 높이가 낮은 통창을 통해서 정박해있는 크루즈선의 객실에 해당하는 입면이 적나라하게 투과되어 보인다. 건물의 비어있는 입면을 크루즈선이 붙어서 채워주고 있는 느낌인데, 이 창들이 배에 붙어있는 것인지 아니면 터미널 건물의 일부인지 모호해지는 묘한 착시가 일어난다. 이 또한 대합실에 앉아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배에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개인적으로 이 건물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다.
중첩된 공간감은 여러 가지 기술적인 구법들을 통해 더욱 구체화되어 있었다. 천장의 철판은 오픈조인트인 곳도 있지만 일부 구간은 맞댐 용접으로 비드가 적나라하게 보이도록 시공되어있다. 마치 거대한 배의 선체 속 어딘가를 걷고 있는 듯한 착각을 들게 만든다. 간단하면서도 직설적이고, 그리 유치하지 않은 훌륭한 수법이다.
유리창의 테두리 부분을 천장과 바닥 안으로 숨겨버린 디테일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수법이지만 여기에서 만큼은 그 효과가 대단하다. 내외부의 경계에서 시각적으로 인 지지될만한 장애물을 미치 치워버림으로써 앞서 설명한 배-건물 간의 인지적 경계를 허물어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배를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단순한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손에 닿는 실체적 기술을 통해 연속선상에서 구현되었다는 점이 아주 좋았다.
연속되는 나무 데크 경사로를 따라 밖으로 나오면 경험은 더욱 극대화된다. 광활한 지붕판 양 옆으로 정박해있는 두 대의 크루즈선은 말 그대로 '건물'처럼 보인다. 실제 높이도 한 10층 건물 가까이 된다. 일전에 직접 크루즈 터미널 설계를 맡았던 적이 있다. 당시 요코하마 페리 터미널은 생각도 못하고 나름의 스터디를 통해 크루즈선을 하나의 건물이라고 간주하고 터미널과 주변 도시를 설계했었다. 오늘 이렇게 직접 보니 그 생각이 참으로 맞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반갑다.
궂은 날씨 때문인지 지붕 데크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하지만 화창한 날이면 이곳에서 꽤 많은 이벤트가 벌어질 것만 같다. 크루즈 여행객들만 해도 잠시 정박한 틈을 타 이곳에서 체조도 하고, 커피도 한잔 하고 그러면 좋을 테니 말이다. 말 그대로 이 지붕 데크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광장'으로 진짜 작동하는 순간일 게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가능하다면 크루즈 여행자 신분으로?) 정말 그렇게 사용되고 있는지 확인하러 다시 와봐야겠다.
나는 생각의 힘이 느껴지는 건축을 참 좋아한다. 설계자(건축가)의 머릿속 생각이 도면/그림/말/글 등의 형태로 변환-전달되어 타자(건축주, 시민단체, 정부, 시공자 등)에게 오해나 변형의 여지없이 이해 또는 동의되었을 때가 건축이 첫 번째 감동을 형성하는 순간이다. 두 번째는 그 공유된 생각이 다시 한번 오해 또는 변형의 여지없이 물리적인 실재로 구축되었을 때이다. 실무를 해보면 으레 첫 번째 과정 조차 순조롭기가 대단히 어렵다. 설령 무사히 첫 번째 단계를 거쳤다고 해도 실무경험이 별로 없거나 노련함이 부족한 많은 건축가들은 두 번째 단계에서 주저앉아버린다. 공모전 당선까지만 해도 참 멋졌는데 몇 년 후 실제 지어진 곳에 직접 가보면 대단히 실망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건축이 궁극적인 감동을 형성하는 세 번째 순간은,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구현된 건축을 경험한 또 다른 타인(불특정 다수의 시민)으로 하여금 맨 처음 했던 설계자의 생각이 다시 한번 공감과 동의를 얻는 순간이다. 답사를 하며 가장 짜릿할 때가 바로 두 번째 단계까지 잘 거쳐낸 건축을 보며 박수를 쳐주고, 돌아서자마자 남는 여운으로 비로소 세 번째 감동까지 흠뻑 느꼈을 때이다. 오늘은 흔치 않은 그런 날이었다.
오늘 요코하마에 오길 백번 잘했다! 페리 터미널에서 받은 벅찬 감동에 흠뻑 젖은 채, 다시 도쿄로 돌아오는 전철을 탔다. 출장 첫날부터 미리 점찍어둔 초밥 맛집에서 홀로 맛있는 점심을 먹으려고 시간 맞춰 바쁘게 도쿄로 돌아왔는데 알고 보니 저녁 장사만 하는 집이다. 문은 굳게 닫혀있고 배는 고픈데 안에서는 묵묵히 장사 준비를 하고 계신 사장님은 나를 외면하신다. 어쩔 수 없이 바로 옆에 있는 가게에서 중국식 탄탄멘을 먹기로 했다. 세찬 바람 부는 야외에서 추위에 떨다가 온지라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어 기본 메뉴를 시켰는데, 뭔가 자판기에서 잘못 선택했는지 소스만 따로 나와 찍어먹는 쯔케멘이 나왔다. 내 실수인데 누굴 탓하랴, 그냥 맛있게 먹었다. 생각을 실재화한다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일이더라. 그 흔한 라멘 하나 내가 먹고 싶은 대로 먹질 못하다니. 라멘집 테이블에 앉아 다시 한번 요코하마 페리 터미널을 떠올려 봤다.
점심을 다 먹고도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 덴노즈아일에 위치한 아키-데포(Archi-Depot) 박물관을 일부러 찾아갔다. 이곳 역시 구글 맵으로 주변을 살펴보다가 찾아낸 곳이다. 한국어 웹에서는 디자인정글이라는 곳에 올라온 기사 하나(https://www.jungle.co.kr/magazine/24466)가 유일한 정보인데, '건축 모형 전용 창고 박물관'이라는 매력적인 소개가 있었다. 원래 창고 임대업체의 창고였던 곳을 건축가들의 모형을 모아 두고 이를 전시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모형 박물관으로 조성했다는 곳이었다. 미술관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조금 빡빡했지만, 안 가볼 수 없게 만드는 소개 문구에 거의 뛰다시피 덴노즈아일로 향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키-데포 박물관에는 모형이 없다! 생각보다 장사가 잘 안된 것이었는지 몰라도 일 이년 전쯤에 싹 리모델링을 하고 지금은 그냥 건축과 관련된 기획전을 하는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3000엔이나 하는 티켓을 끊는 그 순간까지도 그걸 모르고, 전시실에 들어가서야 알아차린 이 바보는 졸지에 두 개의 기획전을 강제 관람했다. 전시가 나쁘진 않았지만, 결론적으로 오늘의 세 번째 실패의 순간이다.
4박 5일간의 모든 출장 일정이 끝났다. 다섯 편의 글을 쓸 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바쁘고, 많은 일들을 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감독했던 하라미술관에서의 전시도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시점에선 종료되어 정리가 한창일 게다. 시간 참 빠르다.
출장 이후, 나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일상으로 복귀했고, 직원들에게 출장 답사 보고를 발표하며 이런저런 경험을 공유했고, 생각보다 많은 영수증을 정리하느라 꽤 시간을 소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