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스카이트리 탐방기
하라미술관에서의 마지막 임무를 마치고 서둘러 시나가와를 빠져나왔다. 내가 담당하는 다른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스카이트리 답사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는 전시 관련 일정만으로 잡힌 출장이었지만, 내가 도쿄에 있는 시간에 맞추어 스카이트리 답사 일정이 추가된 것이다. 특히나 이날은 두 일정이 겹치는 바람에 4박 5일 일정 중 가장 정신없이 뛰어다닌 날로 기억된다.
도쿄 스카이트리는 지난 2012년 완공된 높이 634m짜리 거대한 방송탑이다. 스카이트리가 개장하기 전까지 일본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던 도쿄타워가 333m이니 무려 300m나 더 높은 셈이다. 도쿄타워와 동일하게 방송 전파 송출용으로 세워져 실제로도 도쿄타워가 감당하지 못하는 음영지역에 전파를 송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한다.
건축물 분야에서야 800m가 훌쩍 넘는 부르즈 할리파가 전 세계 최고 높이 타이틀을 굳게 지키고 있지만, 건물이 아닌 자립식 구조물 중에는 스카이트리가 전 세계에서 가장 높다. 매표소로 들어가기 전 아래에서 올려다본 스카이트리의 외관은 단연 구조미가 돋보인다. 건축가 안도 타다오와 조각가 스미카와 기이치가 감수했다고 하며 강진에도 무너지지 않고 버텼던 일본 목조탑의 구조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입장은 35분 단위로 이루어진다. 350m에 메인 전망대가 있고, 추가로 표를 끊거나 처음부터 콤보티켓을 사면 엘리베이터를 갈아타고 450m에 있는 텐보 갤러리와 전망대에 들어갈 수 있다. 전망대와는 별개로 100m 정도 높이에서 밖으로 나가 하부 구조물을 가까이에서 살펴보는 투어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낮에만 운영하고 별도 예약이 필요한지라 해보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전망대보다 더 궁금한 프로그램이었기에 아쉬움이 조금 남는다.
입장 마감 시간이 가까워서야 매표소에 도착했으나 생각보다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래도 아시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중의 한 곳을 높은 곳에서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고 하니 일부러 방문해볼 만한 매력이 꽤 있지 않을까. 나 역시 내심 기대를 하며 엘리베이터 줄로 향했다.
사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복도에서부터 어쩐지 기대감이 죽어버렸고 탑승해서는 이내 와장창 무너졌다.
우선 인테리어를 한 것도, 안한 것도 아닌 볼거리 없는 어정쩡한 복도는 마치 설계나 시공을 하다 만 듯한 느낌이 풍길 정도로 황량했다. 엘리베이터는 40인승 규모에 속도는 분속 600m로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350m까지 30초 남짓 하면 올라가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막상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밖을 볼 수도 없고 그나마 상영해주는 영상도 구석 한편에 있는 작은 모니터가 전부였다. 하다못해 서울의 남산타워도 천장 전체를 영상으로 틀어주는 식인데 비해서 너무 신경을 안 쓴 모습이었다. 뭔가 멋진 풍경을 보기 전에 기대하게 만드는 감흥이 전혀 없달까. 그러다 보니 엘리베이터 한쪽을 차지한 정체를 알 수 없는 형형색색의 반짝거리는 LED 문양을 보고는 그러려니 할 정도였다. 정말 이 건물이 2012년에 지어진 게 맞는 것인지...
마침내 문이 열리고 350m 전망대에 도착했다. 야경도 야경이지만 사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창문을 따라 촘촘하게 늘어선 지름 1m는 족히 되어 보이는 하얀 기둥들이었다. 어떻게든 유리창 면적을 넓게 해서 시야를 확보해줘도 모자랄 멋진 전망대에서 눈 앞을 답답하게 가려버리는 불청객이라니. 야경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불편했다.
물론 600m가 넘는 초고층 구조물이고 나름 구조적인 미학을 강조하다 보니 저렇게 된 것이 일면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전망대라면 좀 더 본연의 목적에 충실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못내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야경도 생각보다는 별로였다. 일단 스카이트리가 위치해있는 스미다구 자체가 상대적으로 도쿄에서 낙후된 지역이다 보니 주변으로 높은 고층건물이나 특징적인 야경 요소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 낮고 비슷비슷한 모양의 건물에다가 도쿄의 지리적 특성상 주변으로 큰 산이 없어서 어디를 둘러봐도 다 거기서 거기처럼 보인다. 남산타워에서 서울을 360도 도는 풍경을 봤을 때 보는 방향마다 새삼 달라지는 풍경에 즐거워했던 기억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관람석 한편에 고서화에 등장하는 옛 도쿄의 모습을 함께 놓아 비교해볼 수 있도록 한 부분이다. 그마저도 없었으면 정말 심심한 전망대가 될 뻔했다.
감동이 없었던 350m 전망대 관람을 마치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갈아타고 100m 더 위에 있는 450m 전망대로 올라간다. 그나마 이번에는 엘리베이터 천장의 1/5 정도를 유리로 만들어 샤프트 내부를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십몇 초면 올라갈 짧은 거리라 제대로 감상할 시간조차 없었지만 방금 전 타고 올라온 엘리베이터가 너무 별로였던 건 만국 공통이었는지 내 옆에 있던 금발의 아주머니는 연신 감탄을 하며 목이 빠져라 천장만 바라보셨다.
방금 전 전망대는 좀 낮아서 시시했던 거라고 믿으며... 450m 전망대로 들어섰다.
450m 전망대에 도착하면 타워 전체를 한 바퀴 돌며 천천히 오르는 '덴보 갤러리'라 불리는 슬로프를 따라 한층 더 올라갈 수 있다. 근데 이 슬로프도 왜 만들었는지 참으로 공감하기 힘든 것이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주변으로 어딜 봐도 비슷한 풍경만 펼쳐지는데 그걸 한 바퀴 걸으면서 본다고 재미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슬로프 내부에는 전시품이나 볼거리도 전혀 없어 그저 앞만 보고 걸어야 할 뿐이다. 혹시나 초기 계획에는 좀 더 재미있는 요소가 있었던 건 아니었을지 궁금할 정도였다.
350m 갤러리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내 신경을 건드리는 유리의 프레임과 구조물들의 향연이 계속됐다. 충분히 높은 전망대이고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과대해 보이는 구조부재들을 이용하다 보니 밖이 생각보다 잘 안 보이고 안과 밖에 심하게 단절되어있는 듯한 기분마저 느끼게 된다. 조금만 더 신경 써서 설계하고 시공했더라면 세계에 둘도 없는 멋진 명소가 되었을 텐데 아쉽고, 또 아쉽다.
그 외에도 생각보다 성에 차지 않았던 것들이 너무 많아 망연자실한 발걸음으로 타워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사례조사를 하며 모니터를 통해서 접하는 것과 이렇게 직접 두 발로 걸으며 눈에 담는 것은 그야말로 천지차이다. 사진으로는 괜찮아 보였던 공간도 이렇게 직접 와보는 순간 단 1초 만에 '아, 아니다' 싶어 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나마 다른 출장으로 온 김에 여기에 왔으니 망정이지 만약에 이것만 보려고 출장을 왔더라면 꽤 상심이 컸을지도 모른다.
기대했던 멋진 건축을 보지 못했다는 허탈감이 이내 위장의 헛헛함으로 이어졌다. 지친 마음, 맛있는 술과 음식으로라도 달래보기로 했다.
스카이트리가 들어서면서 낙후되어있던 주변 상권에 확실히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완공되기 전부터 스카이트리 주변 맛집 가이드북 같은 게 만들어질 정도였다고 하니 말이다. 일종의 빌바오 효과인 셈이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일본식 술집에 들어가서 저녁 겸 간단하게 생맥주로 목을 축이기로 했다 꽤 다양한 메뉴를 작게 여럿 시켜서 맛보았는데 정신없이 먹다 보니 사진을 못 찍었다. 그나마 딱 한 장 있는 게 저 명란 구이인데, 결혼하고 나서 아내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우연히 명란을 구워 먹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후 즐겨 먹던 메뉴다. 일본에서 먹으면 더 맛있을까 해서 시켜봤는데 음, 내가 직접 구운 게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시부야로 자리를 옮겨 미식회가 계속 이어졌다.
도겐자카 거리 이면에 위치한 아주 작은 이자카야를 찾았다. 손님이래 봐야 여섯 명이 채 못 들어갈 법한 좁은 곳이었는데 현 사장님은 2대째 가게를 이어받아 운영하고 계신다고 했다. 밥을 먹고 오는 길이라 안주삼아 모둠 회만 조금 시켜본다는 게 영어를 꽤 하시던 주인아저씨의 말주변과 분위기에 취해 이 집에서 가장 자신 있는 메뉴들을 연속으로 선보이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우리가 맛과 재료를 알아보자 주인아저씨는 더욱 신이 나셨는지 아예 묻지도 않아도 혼자 골똘히 생각하시다가 메뉴를 척하고 주시기도 했다. 어느덧 문 닫을 시간이 되어 명함까지 서로 주고받으며 즐거운 술자리가 끝이 났다. 스카이트리에서 잔뜩 실망한 마음은 어느새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다 잊어버렸다.
24시간 하는 라멘집을 찾아 닭 육수로 국물을 낸 시오라멘으로 해장까지 깔끔하게 하고서야 긴긴 저녁자리가 끝났다. 이날은 일과시간 중에는 미술관 일로, 저녁시간에는 답사로 이중으로 바빴던 날이라 두둑하게 배가 부르고 나니 그제야 피로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비록 기대했던 만큼의 만족스러운 답사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도쿄를 동서남북으로 누비며 입으로, 귀로, 눈으로 실컷 담아본 날이었다. 어느새 하루 더 지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나에게 주어진 단 하루의 시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는 게 가장 기억에 남을까 고민을 하며 호텔로 터덜터덜 돌아갔다.